“나는 이야기를 할 때 ‘통일’이라는 말을 별로 하지 않는다. ‘통일’은 남과 북의 통합 과정에서 최종적인 상태를 말하는 것인데, 남한에서는 절차와 과정에서 극복하고 해소해 나가야 하는 당면한 어려운 일들을 고민하지 않고, 추상화된 ‘통일’만 이야기한다. 그러다 보니 통일논의의 내용이 공허해지고 있다.”
리영희 한양대 석좌교수는 13일 오후 4시 정동 프란체스코회관에서 열린 ‘광화문 통일포럼’ 초청 강연에 참석해 “남과 북의 정치, 경제, 사회 모든 것이 하나가 되는 ‘통일’을 지금 단계에서 생각하지 않고 있다”며 “좀더 구체적으로 해방 후 지금까지 60년 동안 쌓여온 분단구조를 푸는 것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리 교수는 이날 강연에서 “남북한이 살아가는 모양이 어때야 하는가”라는 구체적인 문제의식을 가지고 남북통합 문제에 접근할 것을 요구했다. 리 교수는 이러한 물음을 통해 “체제수렴적인 통합을 위한 의식의 변화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체제수렴적인 변화”는 북한이 변하는 것만큼 남한도 변해서 두 정치 체제가 거의 비슷한 형태의 체제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리 교수는 동서독의 통일을 예로 들며 “1970년대 서독과 동독 사이에 대화가 시작됐을 때는 지금 우리의 남한과 북한보다도 분단과 갈등, 적대시가 훨씬 덜한 상태였다”면서 “동서독처럼 최소한 20년 후 통일이 이뤄지게 하려면 지금부터 갈등을 해소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민주노동당은 우리 사회의 상당한 진전”
리영희 교수는 이어 남한에서 정치적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는 현실을 꼬집었다. 다양한 정치적 주장이 반영될 수 있을 만큼 사회가 열려있어야 한다는 요지다.
이러한 문제의 해소가 그가 강조하는 “남북통합 발상에 있어서 체제수렴”의 조건이다. 그는 “북한 사회가 과거 동독 사회만큼의 개명된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고, 그 필요성보다도 더 긴박하고 큰 필요성을 가지고 남한 사회가 서독 사회정도로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과거 서독에서도 사회주의적 정당들은 아무런 문제없이 서구 사상의 정치적 표현으로서 그 사회에서 당연하게 인정됐다. 서독에서는 과거 공산당도 5%의 표를 얻으면 의회정당으로서 국가경영에 참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나라당이 있고, 민주당이 있고, 열린우리당이 있는 것처럼 당연하게 이념과 사상, 시민 개개인의 의식들이 반영된 정당이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남한은 극우반공으로서만 정당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보더라도 과거 서독과 지금 남한은 국가적, 사회적인 비교도 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러면서 리 교수는 강연 중에 “이념과 철학이 현실화해서 정치에 뿌리를 내리도록 해야 한다”고 지적한 후, “민주노동당은 우리 사회에서 상당한 진전이라고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남과 북, “상호융합적, 상호협력적인 관계 개선이 필요”
리 교수는 이어 “통일문제를 다루는 토론장에 가보면, 우리 체제 스스로 변할 필요가 있다는 발상은 나오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북한의 사회와 생활 양식을 남한을 중심으로 ‘이질화’ 시키려는 움직임들만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이질화를 부추기는 원인으로 리 교수는 “북한은 악마라는 미국식 사고에 익숙해져있기 때문”이라고 꼬집었다.
또한 리 교수는 “통일문제에 정치, 경제학적인 담론만을 이야기 할 필요가 없다”며 “담론만이 오고가면 문제가 순환론적으로 흐르기 쉽다”고 지적했다. “큰 학문적 성찰 없이도 알 수 있을 것”이 남북통합을 바라보는 리 교수의 생각이다.
“동독과 서독이 접근을 통해 하나로 재통합되는 것을 추진했다면 남북의 경우 거꾸로 변화를 통해서 접근을 이뤄야한다고 생각한다. 변화가 이뤄지지 않고서는 본질적인 접근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이다. 변화를 통한 접근. 이것은 북한이 우리의 장점으로 생각하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높이는 쪽으로 변화하는 것을 통해서, 남한의 경우 극단적인 문제를 야기하는 파괴적 자본주의에 사회주의적인 제도를 도입함으로써 변화시켜야 진정한 남북통합이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초청강연에 참석한 서재정 코넬대 교수가 “앞으로 있을 6자회담에서 중국이 어떤 역할을 취할 것으로 보는가”라고 묻자, 리 교수는 “북한체제유지를 위해서 중국이 보호막과 같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지금 중국의 국가 이익은 미국과 연관되어 있다”며 앞으로 있을 6자회담에 중국이 미국의 대북한 압박카드로 사용될 수도 있음을 내비치기도 했다.
| | 리영희 교수가 보는 'KAL기 사건'과 '고구려사 문제' | | | |
| | ▲ 경청 중인 청중 | ⓒ김태형 | | 이날 강연을 마친 후 이어진 청중과의 질의 응답 시간에서 리영희 교수는 최근 의혹이 증폭되고 있는 KAL858기 사건의 진상규명과 관련한 국내외 언론의 보도 태도와 중국의 동북공정 프로젝트에 따른 고구려사 귀속 논쟁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먼저 KAL858기 사건 당시 감사원 현직 공무원이었다는 한 청중의 관련 질문을 받고 리 교수는 “내가 아는 범위 내에서 말하자면 남북의 화해를 거부하고 힘에 의한 점령·접수·병합 통일과 같은 방법론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 과거에 고위급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미국과 일본을 분주히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리 교수는 “그 사람들을 김 누구, 박 누구라고 특정화 할 필요는 없고, 중요한 것은 그런 세력이 많다는 게 사실이라는 점”이라며, “한국, 일본 등지에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 주로 정보를 교환하고 사적·공적으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리 교수는 “한국에서 KAL기 사건과 관련된 의혹이 제기되자, 마치 무슨 네트워크가 작동되는 식으로 일본의 모 주간지에서 즉각 받아 반응하고, 이것을 다시 한국의 특정 언론들이 받아쓰는 구조를 잘 살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리 교수는 “미국이나 일본 등지에서 남북문제에 관한 매우 부정적인 기사를 보내오는 보수언론인들을 살펴보면 대부분 소식의 발신지는 한국의 언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며, "한미일 간에 서로 밀접하게 연관돼 반공·반북을 외치는 필진들의 오랜 모습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고구려사의 귀속문제를 묻는 한 대학생의 질문에 리 교수는 “고구려사 문제는 단순히 문화적인 차원이 아니라 보다 심층적인 차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중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한반도 통합 이후 조선 민족의 영토 주장으로 인해 국경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을 가장 염두하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리 교수는 “중국의 방해나 저지만 없다면 미국은 군사적인 수단으로 북한을 괴멸시키고자 할 것인데 이렇게 된다면 미국은 남북한 모두에게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한 후, “그렇게 된다면 압록강, 백두산까지 확고하게 확장된 미국의 영향력과 한국 내 극우세력들의 성향은 중국 측에 상당한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리 교수는 “중국은 이러한 가능성 때문에 장기적인 국가정책 아래 이 지방에 대한 한국의 영향력 자체를 차단 상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보인다”며, “고구려사 문제는 중국의 이러한 입장을 파악한 후, 자칫 과거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해 들어갔던 것처럼 영토에 대한 복고주의적인 태도로 치우치는 것을 경계하며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 김태형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