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주(85) 할머니의 수요일 아침은 일찍부터 부산하다. 정오에 열리는 수요집회에 참여하려면 적어도 아홉 시까지는 집을 나서야하기 때문이다.
"비 많이 오고 몸 아프면 나도 안 나가. 그렇지 않으면 나가야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황 할머니가 수요집회에 빠지는 일은 거의 없다. 황 할머니는 자신을 비롯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요구와 투쟁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지금으로서는 일본대사관 앞에서 구호를 외치는 것으로 억울한 속내를 달랠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 그는 알고 있었다.
2년 지나면 놓아 주겠다고 속여
황금주 할머니가 위안부로 끌려간 것은 1941년. 그가 겨우 스무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내가 안 가면 식량이고 고무신이고 배급을 주지 않는 걸. 안 가고 배겨. 그때 나를 데리고 가면서 일본인들이 그랬다고, 돈 많이 벌게 해 주고 2년 지나면 이 자리에 그대로 돌려 놓겠다고. 한마디로 처녀공출 당해 나간 거야."
황 할머니가 살던 함흥에서만 스무 명이 넘는 여자들이 모였고 일본인 군인이 그들을 인솔해 기차에 태웠다.
"기차 안에 새까만 종이 커튼이 달려 있고 불도 안 켜서 종일 깜깜해. 가다 서다를 반복했어. 그렇게 한 2~3일쯤 갔을 거야."
다 왔다고 해서 내려 보니 길림역이었다. 역 마당에는 여러 대의 트럭이 서있었고 여자들은 다시 트럭에 실려 뿔뿔이 흩어졌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한 군인 병원이었다.
"병원에서 군인들의 식사나 빨래를 해 주나 보다 했지 뭐. 배운 게 좀 있으니까(당시 할머니는 함성여자강습소라는 야학에서 일본어와 숫자를 익혔다) 병원에 데려간다고 했거든."
"만주는 그런 곳이야"
고야(小屋, 오두막집)라고 부르는 막사에 짐을 풀고 나자 먼저 와있던 여자 몇 명이 "너희들도 이제 죽었구나. 불쌍하다"며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라고 일러주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어리둥절했지만 황 할머니 일행도 곧 그 속뜻을 알 수 있었다. 그 다음날부터 군인들이 찾아왔고 하루에 네다섯 명씩 많게는 마흔 명까지 상대해야 했다.
"낮에는 통역을 해. 조선인 졸병들이 일본말을 모르니까 내가 약 이름도 일러주고 그랬다구. 그네들이 말 못 알아듣는다고 많이 얻어맞고 그랬지. 그럼 내가 왜 때리느냐구 또 대들어. 그러면 나도 또 개 맞듯이 맞지. 그리고 밤에는 그 짓을 당하구. 나는 시집도 안 간 처녀라고, 죽어도 싫다고 하면 때리고 여기 오면 다 하는 거라고 윽박지르구 그랬지. 발로 차고 막대기로 찌르고 얼마나 맞았는지 몰라."
처음 얼마간은 밤새 울고 두드려 맞는 일이 계속되었다. 두어 달이 지나면서부터는 마음껏 울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황 할머니는 지쳐갔다.
"목숨 건져 나가야지, 그 생각뿐이었다구. 한두 달만 지나면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게 돼. 만주가 그런 곳이야."
또 다른 지옥의 시작
그처럼 지옥같은 생활을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하루하루 버텨나갔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이 되어도 밥 먹으라는 소리가 없었다. 슬그머니 나와보니 군인이고 트럭이고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 해방이 되었다고 했고 그제서야 황 할머니도 '일본인들의 생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거기서부터 세 달을 꼬박 걸어 내려왔어. 춘천쯤에 와서 석탄차를 탔는데 바닥이고 변소간이고 사람들이 꽉꽉 들어찼더라구. 청량리역에 내리니까 그때가 12월 2일이었어. 먹을 것 입을 것 없는 거지꼴로 돌아온 거지."
또 다른 지옥이 시작되었다. 그 와중에 한국전쟁이 터졌고 피난길에 만난 네 명의 고아를 거두어 먹이기 시작했다.
"전쟁 끝나고 다시 서울로 왔지. 다리 밑에서 거적 깔고 자고 깡통에다 밥 얻어서 한 숟가락씩 나눠 먹으며 3년쯤 살았어."
딱한 처지를 알게 된 주변 경찰서장과 병원장의 도움으로 자그마한 전셋집과 세간들을 구할 수 있었다. 병원장은 자궁적출수술도 무료로 해주었다.
네 아이를 아는 집의 호적에 올려 학교를 보내고 장사를 해서 번 돈으로 뒷바라지를 했다. 자식과 다름없는 아이들을 시집장가 보내고 지금은 황 할머니 혼자 살고 있다.
"역사에 뭘 남길 거야? 우리들 다 죽고나면 어떻게 할 거냐구?"
황 할머니가 피해자 신고를 한 것은 최초로 위안부 증언을 했던 김학순 할머니를 텔레비전에서 보고 난 직후인 91년 11월이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3년이야. 외국만 24개국을 갔다 왔어. 그렇게 뛰어다녔는데도 변한 것이 없어. 일본은 그렇다고 쳐. 우리 정부는 뭐하는 거야? 우리를 허술히 보니까 그런 거라구. 독도 문제도 딱 부러지게 한 마디 못하는 바보들인 걸 뭐. 아무리 호소를 해도 모른 척하는 거야."
그러면서 그는 앨범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대통령된 사람들 다 그랬다구, 할머님들 한 풀어 드리겠습니다. 그래놓고 대통령 되면 한 마디도 못하지. 우리가 13년을 싸워도 말 한 마디 못한다구. 한심하지."
할머니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 | | 소수인권 보호를 위한 공적상 수상 | | | | 황금주 할머니는 제55회 세계인권선언기념일이었던 지난 12월 10일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수여하는 소수인권 보호를 위한 공적상을 수상했다.
황 할머니를 추천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은 이유로 수요집회에 꾸준히 참여하여 피해자들의 인권수호자로서, 시민들의 역사교사로서 활동한 점, 제네바 유엔인권소위원회(92년 8월) 등 국제적 증언활동을 통해 평화의 전도사 역할을 한 점, 일본의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국민기금)' 거부를 몸소 실천한 점 등을 꼽았다. | | | | |
"이렇게 해 가지고 역사에 뭘 남길 거야? 우리들 다 죽고 나면 그땐 어떻게 할 거냐구? 죽도록 사과해도 시원찮은 판에 이러고 있으니 우리가 억울하고 서러워서 어떻게 살아."
이제 황 할머니에게 남은 마지막 소원은 일본의 사죄를 받아내는 것이다.
"돈 다 필요 없어. 더러운 돈 받아 뭐해? 진정으로 사죄하라 이거야. 내 청춘 돌려놓으라 이거야."
13년의 고통과 한이 맺힌 외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