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동양의 예에 대한 일반적 평가는 '복잡하고 형식적'이라는 것이다. 특히 상례나 제례의 복잡함과 형식성은 엄격하게 상(喪)을 치러 본 사람이나 제대로 격식을 차려서 제사를 지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동양만큼 예학이 발달하고, '예'에 대한 논쟁이 많은 지역은 그리 많지 않다. 아마도 처갓집 제사에서 사위가 '감 놔라 배 놔라' 하다가 양반·상놈 논쟁이 터지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지 싶다. 제례를 비롯한 동양의 예가 '형식적'이고 '복잡하다'는 데 대해서는 누구나 동의하고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예가 생긴 시점을 보면 이것은 의외로 인간의 기본적인 정감에 의거하고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극단적인 사례 가운데 하나가 삼년상이다. 만 2년을 꼬박 상주로서 살아야 하는 삼년상은 조선 시대 유학자들에게 반드시 지켜야 할 상례였다. 하지만 이것이 교리화 되기 이전 삼년상은 의외로 일상적인 인간의 정감에 기초한다.

공자가 삼년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논어>에 등장한다. 공자의 제자인 재아가 공자에게 삼년상의 불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새로운 곡식이 나고 지는 것이 일년을 주기로 돌므로 상(喪) 역시 일년으로 하는 것이 예가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러자 공자는 재아가 나간 후 제자들을 향해서 "우리 모두는 태어나서 삼년이 지난 이후에 비로소 부모의 품에서 떨어질 수 있다"라고 말하면서 그에 대한 보답으로 최소 삼년은 상을 치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아무리 적어도 만 2년의 보살핌을 받았으므로 돌아가신 후 만 2년은 슬퍼하면서 상을 치르는 것이 순리에 맞다는 말이다. 이것이 예의 모습으로 고착화되면서 유학자들에게 삼년상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법칙이 된 것이다.

'삼년상'만을 예로 들었지만 나머지 예제들도 마찬가지이다. 제사 역시 '조상이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일상적 정감에서 출발한다. 그 감사의 마음이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여 돌아가신 날만이라도 제대로 대접해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표면화된 것이 제사다. 그리고 이것이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상을 차리는 정성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제사를 굳이 밤 12시 이후에 지내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제사날은 돌아가신 날 하루 전이다. 예를 들어 1월 20일에 돌아가셨으면 제삿날은 1월 19일이다. 1월 19일 제사 준비를 하고 제사는 반드시 밤 12시를 넘겨서 지낸다. 이렇게 되어야 돌아가신 날 첫 시간 즉 1월 20일 첫 시간에 제사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 역시 돌아가신 부모를 기억하면서 그날 첫 시간을 부모에게 드리기 위한 것이다.

음식을 차리는 방법 역시 마찬가지다. 옛날 사람들은 죽음을 삶의 반대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생활 방식 역시 반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사상을 차릴 때에는 산 사람의 상차림과 반대로 한다. 보통 산 사람들은 밥을 왼쪽에 국을 오른쪽에 놓는데 제사상은 제사를 받는 쪽을 기준으로 밥은 오른쪽에 국은 왼쪽에 놓는다. 이것은 죽음과 삶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음식을 놓는 순서 역시 그렇다. 제사상을 차리는 수많은 용어들이 있지만 그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예컨대 생선을 놓는 방법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옛날 사람들은 생선에서 가장 먹을 것이 많고 맛있는 부분은 생선의 등 쪽이라고 생각했다. 내장이 흘러나오지 않으므로 먹기에도 깔끔하고 가장 많은 살점이 붙어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제사를 받는 사람이 먹기 좋도록 생선의 등 쪽을 제사 받는 쪽으로 위치시킨다. 여기에다가 동쪽을 양으로 보고 서쪽을 음으로 보는 음양론에 기준해서 제사를 받는 쪽을 기준으로 꼬리는 서쪽(왼쪽) 머리는 동쪽(오른쪽)에 위치시킨다. 이른바 두동미서(頭東尾西)라는 생선 놓는 원칙이다.

내친 김에 상차림에 대해서 하나만 더 생각해 보자. 일반적으로 식사를 할 때 가장 맛있는 것을 앞에 놓고 후식을 뒤에 놓는다. 이러한 원칙이 제사상에 적용되면서 제사를 받는 쪽에서 1열에는 주식인 밥과 국이 올라가고, 2열에는 식사와 직접 연관된 탕과 전·조기, 그리고 고기 종류가 올라간다. 그 다음 열에는 채소나 기타 음식들을 올리고 마지막 열에는 후식 종류인 과일과 과자 따위를 올리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각 지역이나 집안의 풍습 그리고 그 쪽에서 중시하는 음식에 따라서 바뀔 수 있다. 하지만 맛있는 것에서 시작해서 후식을 뒤로 배치하는 원칙은 분명하다. 홍동백서니 어동육서니 하는 어려운 말 이전에 '맛있는 것은 앞으로 그리고 후식은 뒤로'가 원칙이다. 이것만 지키면 감 놔라 배 놔라를 가지고 굳이 싸울 필요가 없다.

제사를 지내는 방법 역시 일상 생활양식에 기초한다. 처음에 이른바 '강신'이라는 것을 하는데 이것은 신이 향 냄새를 맡고 길 잃지 않고 집안으로 찾아 올 수 있도록 향을 피우는 것이다. 그리고 오셨을 때 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우선 술이라도 한 잔 하시라고 상위에 술 한 잔을 부어 놓는 것이다. 여기에 어려운 형이상학적 근거는 없다.

그리고 제사에 들어가면 1년 만에 오신 부모님께 자식들 가운데 맏이가 대표로 제주가 되어서 먼저 인사(절)를 한다. 그리고 술을 한 잔 드리는 일반적 식사례를 따른다. 이후 제사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을 인사시키고, 각 대표들이 술을 한 잔씩 따르고 인사(절)를 한다. 그리고 식사를 권하고 밥 먹는 시간 동안은 자리를 피해준다. 마지막으로 이별을 위해 다시 모두가 절을 하면 제사가 끝이 난다.

이것은 집안의 어른이 찾아 오셨을 때 함께 식사를 하는 예와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가장 일상적 생활 양식이 예제의 모습으로 만들어졌을 따름이다. 여기에 '반드시' 그러해야 하는 형이상학적 근거나 규칙은 없다. 다만 일상인들이 조금만 생각해 보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상식이 예의 모습으로 바뀐 것일 뿐이다.

예제가 어려웠던 것은 이러한 일상적 상식이 이론화되면서부터다. 이론화를 위해 어려운 형이상학의 옷을 입히고 특정한 법칙과 규칙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실제로는 특정 사안에 대해 참여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를 일일이 세분해서 기록하다보니 어려워진 것이지 원리와 원칙은 간단하다.

예를 들어 부모와 자식 간에 친밀도와 삼촌과 조카 사이의 친밀도는 다르며 여기에서 발생하는 정감 역시 다르다. 예학은 바로 이러한 정감을 중심으로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을 이론으로 구성한 것이다.

장례에서 조카가 자식보다 더 슬퍼할 수 없게 하고 조카보다 더 마음 아픈 자식의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하도록 행위양식을 규정하다보니 자식과 조카에 대한 행위양식을 일일이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복잡함과 형식성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그 원리와 원칙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 조카보다 더 마음 아픈 자식의 정감을 가능한 효과적으로 드러나게 하려 했던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정감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너무나 어려운 것이 제사다. 특히 제사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는 상을 차리고,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를 지내는 행위 방식에 있다. 옛날 유교 예제에서는 이것을 일일이 이론으로 구성해서 세밀한 것까지 규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기에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제사를 지낼 때 일년만에 아버지가 집에 찾아 오셨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를 기준으로 상을 차리고 예를 표하면 적어도 제사의 원칙만큼은 충실하게 지킨다.

덧붙이는 글 | 다음에는 지방이나 축문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