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9일과 16일 KBS가 방영한 <인물현대사> '장준하 2부작 시리즈'는 의문의 죽음에 가려 있던 민족주의자 장준하의 진면목을 알게 해 준 프로그램이었다. 방송을 통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장준하와 김재규' '장준하의 쿠데타설' '죽음 직전의 반유신투쟁 계획'등이 다양한 증언과 자료를 토대로 집중 조명됐다.
"해방을 꿈꾸며 청년 장준하는 '나의 젊음을 조국의 제단 위에 바친다'고 말했다. 혼란스런 해방 공간에서 젊은 군인 박정희는 '나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생명을 제단에 바친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쪽은 독립군을 거쳐 재야민주투사의 길을 걸었고, 한쪽은 일본군을 거쳐 독재자의 길을 걸었다."
먼저 <인물현대사>는 장준하와 함께 박정희를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다. 1944년 7월 두 사람의 선택은 기묘하게 엇갈렸다. 27살의 청년 장교 다카키 마스오(박정희)가 만주군 소위로 임관한 바로 그 때 26살의 젊은이 장준하는 일본 학도병에서 탈출하여 광복군 입대를 위해 중국 대륙 6천리를 횡단한다.
장준하는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계획을 알고 있었나.
그리고 꼭 20년이 흐른 후 두 사람 사이에는 김재규라는 인물이 있었다. 하지만 <인물현대사>를 통해 드러난 장준하-김재규의 관계는 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동지에 가까웠다. 1974년 장준하와 함께 감옥에 있었던 이해학 목사(성남주민교회)의 증언이다.
"장준하 선생은 '박정희 정권은 관동군에서부터 독립군을 잡아죽이던 뿌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총을 가진 군대만이 군사 정권을 청산할 수 있다'고 했고, 학생들이 군사 쿠데타의 악순환을 우려하면 '애국적 군인이 있는 한 그렇지 않다'고 했다. '그런 군인이 있냐'고 묻자 '양심적 군인이 분명히 있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부영 의원의 회상은 '양심적 군인 = 김재규'의 가능성을 높게 만든다. 이 의원은 "장준하 선생이 군에도 박정희를 반대하는 세력이 있다며 김재규를 '마음속으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언젠가 우리와 손을 잡고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이부영 의원은 '위 이야기를 들었을 때가 언제인가'라는 질문에 "개헌 청원 서명 운동 전후로 기억한다"고 답했다. 이 운동은 1974년 1월 8일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는' 긴급조치 1호를 불러일으킨 운동이다. 결국 장준하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15년형을 선고받고 병보석으로 출감하기까지 11개월을 복역하게 된다. 이해학 목사의 증언이 나오는 시기다.
"장 선생은 상당히 온화하고 다정다감하신 분이다. 그런데 어느 날 아침에 선생이 딱 굳어 있어 인사도 받지 않더라. 말을 건네도 대답을 하지 않아 이유를 물었다. 질문에는 전혀 괘념도 하지 않고, '장관이 그렇게 좋아?'라며 배신당한 표정을 했다."
<인물현대사>는 그 시기에 장관으로 임명된 인물을 찾다 보니 뜻밖에도 김재규가 나타났다고 밝혔다. 그리고 1974년 9월 14일 김재규가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된 날짜를 주목했다. 김재규가 박정희 암살을 계획했다는 날이다.
10·26 공판 당시 김재규를 담당한 강신옥 변호사는 접견 기록을 토대로 "김재규는 건설부 장관 사령장을 받을 때도 권총을 휴대했고 그래서 양복 주머니가 불룩했다고 했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인물현대사>는 "만약 김재규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장준하가 암살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얘기가 될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또한 <인물현대사>는 이듬해, 즉 장준하가 죽음을 맞이한 1975년 봄에도 장준하가 김재규와 만났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장남 장호권씨는 "김재규씨가 건설부 장관을 할 때 <중앙일보>사 근처 냉면집에서 장 선생님이랑 만났다. 우연한 만남처럼 꾸몄다. 내가 수행했을 때인데 인사를 나눴다. 두 분이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모르겠다"고 증언했다.
오랫동안 장준하는 쿠데타를 준비했다?
그렇다면 장준하와 김재규를 맺어 준 힘은 무엇인가. <인물현대사>는 장준하가 뛰어난 정치 역량으로 군부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인물현대사>는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옥중 출마한 장준하는 당시 공화당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동대문 을구에서 당선된다"며 "유일한 독립군 출신 국회의원 장준하가 선택한 상임위는 다른 의원들이 맡기 꺼려한 국방위원회였다"고 소개했다.
장준하는 당시 월남 파병 사령관인 채명신 장군이 여당 의원에게 수없이 건의해도 안 고쳐지던 급식 문제를 해결하고, 장교들의 의복비를 줄여 최전방에서 근무하는 사병들에게 두꺼운 방한복을 안겨준다. 야당 의원인데도 국방 예산의 증액을 요구하기도 한다. 채명신 장군은 <인물현대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장준하 선생은 대령급들이나 사병들에 이르기까지 아주 광범위하게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지지를 받고 있었다. 존경을 받고 있었다고 본다. 만약 장준하 선생이 대통령에 입후보했다고 하면, 나는 정치를 모르고, 정치는 하지도 않았고 완전히 담쌓고 있지만, 그런 분이 대통령에 출마했다면 정말 맨발로 뛰어다니면서라도 운동하고 싶은 입장이었다."
여기에 1967년 대선에서 윤보선을 야권의 단일 후보로 만들어내면서 장준하에 대한 신뢰는 정치권에서도 높아졌다. <인물현대사>는 당시 장준하에 대한 신망의 예로 미국 대사관에서 받은 두 가지 선물을 소개했다. '대통령의 길'이라는 정치 전략서와 미국 정계에서 대통령을 상징하는 모자를 받았다는 것이다.
"장준하는 반유신투쟁 거사일 하루 전에 죽음을 맞았다"
<인물현대사>는 "1975년 3월 31일부터 '장준하의 불순 기도를 탐지, 사전에 저지 와해 봉쇄하기 위한 목적'에서 위해분자 관찰계획 보고서가 작성되기 시작했다"며 "중앙정보부가 특별 관찰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이어 보고서가 작성되기 시작한 날짜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장준하가 야권 통합을 위한 4자 회담을 성사시켜, 김대중 김영삼 윤보선 양일동 등 야당 당수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날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장준하의 움직임도 분주해졌다. 장준하는 전국을 누볐고, 중앙정보부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인물현대사>에서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 문형래 조사관은 "당시 동향일지를 보면 하루에 두, 세 번씩 보고된 경우가 있다. 장준하의 움직임에 상당히 민감하게 정보 보고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인물현대사>는 특히 장준하가 사망한 1975년 8월의 심상찮은 행적을 환기시켰다. 장준하가 김구와 이범석의 묘에 격식을 갖춰 참배를 했고, 평생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알려졌던 임시정부 태극기를 대학에 기증했다는 점도 예로 들었다. 또한 장준하는 부인 김희숙씨와 천주교식으로 결혼식을 다시 올렸다.
이와 같은 행적을 <인물현대사>는 장준하가 당시 준비했던 반유신투쟁과 연관 지었다. 최근 김대중 전 대통령은 진상규명위에 "장준하씨가 '민주 회복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 당신이 움직일 수 없으니, 나라도 움직이겠다'고 말했다"며 "당시 장준하씨는 박정권의 제거대상이 됐던 걸로 안다"고 증언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75년 7월 29일 자택에서 장준하를 만났다.
1975년 8월 9일 장준하는 광주에서 홍남순 변호사를 만났다. 홍 변호사는 지난 2001년 "장준하 선생은 8·15 경축일을 기해 10여 명 정도 인원으로 유신체제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성명서를 준비 중이었다. 18일 내지 20일 경에 발표했으면 한다고 말씀하셨다"는 증언을 남겼다.
장준하의 비석을 홀로 지고 산에 올랐던 무술인 박세정씨는 중앙정보부 동향보고서에 여러 번 등장한 인물이다. 박씨는 <인물현대사>를 통해 "반독재 운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희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뜻 맞는 무술인들과 함께 산악게릴라 훈련을 해왔다"며 "이 사실을 장준하 선생에게 알리자 '실전에 옮겨질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비밀을 지키고 신중을 기하면서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이부영 의원 역시 방송에서 "장준하 선생이 75년 7월말부터 8월초까지 전국을 다니며 지역 인사를 만나고 전국적인 봉기를 준비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 되면 지리산에 혼자라도 들어가 무장 투쟁을 하겠다는 말씀까지 하셨다고 그랬다더라"고 말했다.
하지만 장준하는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군 약사봉 계곡 암벽 아래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높이 14.7미터, 경사 70도의 산악장비 없이는 전문 등산가조차 오르기 힘든 곳에서 추락으로 약 1톤의 충격을 받았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깨끗한 시신만을 남긴 채. <인물현대사>는 "정확한 사고 장소도 죽음의 원인도 아직 모른다"며 "장준하는 투쟁 거사일 하루 전에 죽음을 맞았다"고 보도했다.
김재규 "장 선생님은 추락사한 것이 아니다"
1976년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재규가 장준하의 가족을 찾아왔다고 한다. 장남 장호권씨는 방송에서 "그 분(김재규)이 장 선생님은 추락사한 것이 아니다. 정권 차원에서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하셨다"고 증언했다.
사체는 검사 지휘를 받기 위해 사고 현장을 보존 중이며 현지 경찰(3명)이 현장을 경비 중에 있는데, 동 일행인 김○○(동대문구 이문동 거주)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장준하 부인 및 가족 등이 20:30분 경 현장에 도착하였음.
지난 1월 14일 진상규명위가 마지막으로 공개한 문서는 1975년 8월 17일자(장준하 사망 당일) 중앙정보부 동향보고서다. <인물현대사>는 "장준하의 죽음이 신고되기 전에 가족과 동아일보 편집국에 사고를 알려 준 괴전화의 주인공이 보고서에 들어 있었다"며 "중앙정보부는 전화 도청으로 주인공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인물현대사>는 "김○○는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로 장준하씨가 추락사했다고 증언한 인물로 이후 여러 차례 진술을 번복해서 주목을 받아왔다"고 소개했다.
진상규명위 김희수 상임위원은 "김○○가 중앙정보부 유급 정보원(PA)이었다는 진술을 확보했지만 PA대장이나 첩보 카드 등 여러 서류를 열람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밝혔다. <인물현대사>는 "최근 진상규명위가 김○○씨를 조사했지만 그는 중앙정보부 문서 내용을 모두 부인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김 상임위원은 "지금 현재는 '국가기관의 책임이 있다, 없다. 타살이다, 아니다'를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국가기관이 해당 자료를 떳떳하게 공개해서 진실 규명에 협조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국정원은 "진상규명위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며 "가지고 있지 않아 제출하지 못한 것을 협조 거부로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밝힌 바 있다.
끝으로 <인물현대사>는 "2차 조사 시한은 올해 4월까지다. 이제 정보를 감추는 것이 습관화된 정보기관이나 두려움으로 숨어버렸던 관계자 또는 목격자는 역사 앞에 용기를 갖고 입을 열어야 한다"며 "진상규명위에서 1975년 8월 17일 장준하 선생의 유가족을 상봉터미널에서 약사봉 계곡까지 태워다 줬던 택시운전기사나 사망 직전 장준하 선생과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던 육군 사병 두 사람을 찾고 있다"고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