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5 남북공동선언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게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 순안공항에서 포옹하는 장면이다. 반세기에 걸친 우리의 냉전의식을 일거에 깨트리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느낌에 지나지 않았다. 그 때의 감동은 지금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사라졌다. 남북공동선언의 정신은 진전된 것이 없다. 보기에 따라 그 이후에 많이 진전되지 않았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 때의 감동과 의미를 생각해 본다면 거의 진전된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핵심은 남북한이 상호간에 통일 방안을 합의했다는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귀국보고를 통해 분명히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남북공동선언을 한 이후 앞으로 정상회의, 각료회의, 국회회의 등의 단계적인 회의를 열어가면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에 합의해 나가겠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그런 이야기까지 했는지 의문의 들만큼 남북관계가 경색돼 있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왜 남북공동선언이 휴지조각이 되었는지, 그렇게 되는데 어떤 기제가 작용했는지를 들여다보면 사회개혁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국가보안법과 한미동맹을 문제 삼는 것은 여전히 터부시
남북공동선언 며칠 뒤 남쪽의 수구기득권·냉전 세력들은 일제히 공세를 가했다. 그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을 지켜야 된다고 주장했다.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한나라당과 독과점적인 세 신문사는 자유민주주의의 정체성으로 국가보안법과 한미동맹을 핵심으로 들었다.
당시에는 수구세력의 트집잡기 정도로 인식했지만 지금 보면 그들의 공세가 먹혀 들어갔다는 걸 알 수 있다.
국가보안법이 살아있고 한미동맹을 문제 삼는 게 여전히 터부시 되고 있다. 네티즌 사이에는 많은 성역과 금기가 깨져나갔다고 하지만 여전히 본질적인 변화는 없다. 통일과 개혁을 이야기할 때 잊지 말아야 할 본질적인 요소라고 생각한다.
송두율 교수 사건은 한국사회가 갇힌 사회라는 증표
송두율 교수 사건을 보면 우리 사회의 현실을 알 수 있다. 송두율 교수는 조선노동당도 탈당했다. 남쪽에서 여생을 학문하면서 보내고 싶다는 세계적인 학자이다. 그런 그에게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전향을 요구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어떻게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는지 끔찍하다.
이런 상태라면 통일이 될 리도 없지만, 된다 하더라도 또 다른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북쪽에 있는 수많은 노동당원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공존의 자세가 조금도 없다.
하나하나 생각해보면 모순덩어리를 발견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를 거론하며 국가보안법을 들먹이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사상의 자유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들이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며 보수를 자임한다는 세력들이 국가보안법을 끝까지 사수하고 있다. 이러한 체제 아래서는 그 어떤 사고나 상상력도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
북한 주민이 느끼는 전쟁의 공포를 생각해야
한미동맹도 마찬가지이다. 북쪽은 공동선언 이후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02년 7월부터 경제개혁을 시작했다. 경제 발전을 위해 조일수교에도 나섰다. 조일수교의 과정을 보면 북쪽이 얼마나 경제 발전을 열망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지금까지 조선노동당은 65년 한일협정에 대해 강력히 비판해 왔다. 일제 강점기의 피해에 대해 제대로 배상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일수교를 서두르며 김정일은 고이즈미와의 평양 회담에서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만큼 절박했다는 얘기다.
지금 이 순간도 북쪽은 꾸준하게 경제개혁 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핵문제가 불거졌다. 사실 북핵문제라고 하는 것은 정확한 지적이 아니다. 미국에 의한 전쟁에 대해 평양 일반시민들이 느끼는 전쟁 공포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보자. 미국에 공산당 정권이 들어서고 일본은 사회주의 경제로 전환했다고 가정해보자. 소련의 군사력은 재배치되고 있고, 소련 지도자가 ‘노무현은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이다’라고 자꾸 거론한다고 상상해보자. 얼마나 전쟁 공포에 불안하겠는가.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정권교체를 거론하며 북한 폭격설을 심심치 않게 흘리고 있다. 경제는 봉쇄되어 있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붕괴되고 아사자가 속출하고 있다.
북한의 지상과제는 하루빨리 경제개혁을 달성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위해 남북공동선언을 했고 민족경제의 균형발전을 이야기했고 조일수교를 서둘렀다.
미국은 북핵카드로 동아시아 패권 재구축
그런 상태에서 느닷없이 이른바 북핵문제가 불거졌다. 미국의 입장에서 본다면 한반도에 평화국면이 찾아오는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자신들이 동아시아에서 누렸던 견고한 패권이 눈 녹듯이 사라질 수 있는 위기 상황이었다. 남북간의 관계 개선과 조일 수교가 이뤄진다면 미국의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 지렛대가 사라질 수 있는 위기였다. 그 위기감이 미국에게 새로운 국면을 주동하는 계기가 됐을 것이다. 그게 바로 북핵카드다.
미국의 고위 당국자는 언론에 북한의 핵개발 사실을 흘리고 이것은 확대 재생산 기정사실이 됐다. 미국은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일거에 잃어가던 패권을 견고하게 재구축했다.
북한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원한다. 그러나 미국은 관계 정상화의 의지가 전혀 없다. 문제는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이 이와는 반대로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치 북한이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려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왜 진실과 다른 내용이 보편이 됐을까.
반전반미의식의 제도화가 관건
한국을 장악하는 미디어들이 그런 세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북쪽은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원하지만 미국은 김정일 정권의 교체를 원한다. 그러한 갈등 속에서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이 상당히 먹혀들어가고 있으며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높아만 가고 있다.
부시가 재선에 성공할 경우 한반도의 전쟁위기는 매우 높아질 것이다. 미국은 후세인 체포 이후 6자 회담의 참석에도 시큰둥하다. 부시가 재선되고 이라크 민중의 저항이 수그러든다면 미국의 다음 목표는 이 땅이 될 것이다.
미국은 북쪽과의 전쟁을 치밀하게 세우고 있다. 94년에도 그랬고 지금은 더 견고하다. 팬타곤은 전쟁계획을 세운 기밀문서의 존재를 부인하지 않는다.
전쟁계획에는 두 가지 전략개념이 담겨있다. 첫째는 휴전선에 배치돼 있는 북한군의 재래식 무기를 첨단무기로 일거에 사라지게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평양의 시설을 폭격한다는 것이다. 전격적인 작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일거에 북한을 괴멸시킨다는 것이다.
평양에 폭격을 개시한다는 것은 어느 순간에 일어난다는 것이다. 부시와 미국 핵심지배세력들이 남쪽의 우리와는 상관없이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외부적으로는 이라크 민중들이 얼마나 항쟁하느냐, 부시가 재선에 성공할 수 있느냐가 변수가 될 수 있지만 대내적으로는 남쪽의 사회구성원들이 얼마나 반전반미의식으로 무장돼 있느냐가 유일한 변수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수구언론의 이데올로기적 책동 깨나가야
그러나 현실은 암담하다. 부시 행정부가 끊임없이 전쟁 위기를 부추기고 김정일 정권의 교체를 얘기해도 우리는 무관심한 상태다.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까 생각한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구한 말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 없이 지내다가 전쟁 한번 치르지 않고 일본에 넘어간 과거가 떠오른다. 당시에도 언론은 일본이 우리의 근대화를 돕는 세력이지 침략세력이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미국 제국주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가 초래할 결과는 상상하기로 어렵다. 한국에서는 부시에 대해 반대하면 반미하자는 거냐고 한다. 촛불을 들고 나섰던 네티즌 사이에서도 반미는 안 된다는 생각이 퍼져 있다. 이 땅에서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미국의 제국주의적인 전쟁 책동을 한국 민중들이 얼마나 인식하고 있으며 제도화 시킬 수 있는지에 달려있다.
촛불은 타올랐지만 다시 꺼져있다. 거기에는 수구언론들의 이데올로기적 책동이 있다. 조중동과 텔레비전에 얼마나 세뇌당할까 의문을 갖겠지만, 줄기차게 우리의 의식 속에 다가오는 무기이다. 매일 아침, 저녁 마다 반미는 안 된다는 원칙을 설파하고 있다.
그 결과 촛불은 꺼져가고 있고, 광화문에서 촛불추모비를 철거해도 별다른 반대운동이 없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이 초래할 위험성이 우려된다. 자주성도 좋지만 용미를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다. 말장난이다. 용미를 하기 위해서라도 반미가 조직화돼야 한다. 미국을 조금만 비판해도 반미로 몰고 가는 이 견고한 틀을 깨나가는 게 중요하다.
노무현 정권에 기대할 바는 없다고 단언한다
이런 상태에서 무슨 일을 할 것인가. 결국은 지금 나타나듯이 수구·보수 정당 일색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깨나가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천천히 해나가면 되지 않겠느냐 하겠지만 한가하게 대처하기에는 우리의 상황이 너무나 위험하다. 한반도의 전쟁이 초래한 민족적 재앙을 상상해 봐라.
남북한의 각종 핵관련 시설에 폭격과 공습이 이뤄진다고 생각해봐라. 그 가능성을 아주 높다고 말하진 않겠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분명히 존재하고 그것을 최소화하는 게 이 땅 위에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그 가능성은 분명 두 자리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치솟고 있다.
노무현 정권이 보이고 있는 한계는 명확하다. 윤 외교부 장관이 자주적인 외교를 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책임회피다. 윤 장관 때문에 언제 노정권이 자주적인 외교를 펼치지 못했는지를 살펴보면 이는 명백하다. 후임으로 거론되는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윤 장관 보다 더 자주적이지 못한 사람들도 비일비재하다. 노 정권에 기대할 바는 없다고 단언한다.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처해있는 민족적 위기의 심각성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조선일보가 왜 무섭겠는가. 수구 보수세력들의 논리가 조선일보를 통해 끝없이 재생산되고 이 땅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민운동 등에서 보다 치열하게 싸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 | 노무현 정권의 안보의식 소박하고 무지하다 | | | 손석춘 위원과 청중들의 질의응답 | | | |
| | ▲ 손석춘 위원 | | | 이날 강연회가 끝난 후 예정보다 한 시간이나 지난 시간까지 청중들과 질의응답시간을 가졌다. 손 위원은 <한겨레신문>과 민주노동당 관련 질문에 대해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으나, 4월 총선과 언론개혁 과제, 북핵문제 등을 묻는 질문에 명쾌한 논리로 답변을 이어갔다.
-민중의 반전운동에 미국이 별 반응 보이지 않는다면?
“만약 남북한 모두 휴전선 동쪽부터 서쪽까지 촛불을 들어도 미국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을까. 미국대사관이 지금 이 순간에도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정보파악을 하고 있을 것이다. 중요한 정책 결정과정에서 만만치 않은 영향을 끼칠 것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민중의 반전반미운동 이외에는 마땅한 대응 수단이 없다는 것이다.
참여연대와 같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단체에서 반미문제를 제기하고 나선다면 그 여파가 클 것이다.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패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국내 반전운동이었다. 미국이 불장난을 저지를 때 남쪽 군대의 총부리가 어디를 겨눌지 예측 못한 상태라면 상황은 달라질 것으로 생각한다.“
-수구 언론의 이념적 공세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하나?
“인터넷이 활성화되어 있지 않느냐. 점점 더 많은 영향력을 지닐 것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오마이뉴스>에 칼럼을 쓰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참여연대와 같은 시민사회의 몫이 크다고 생각한다. 참여연대가 지금까지 해온 무게 때문에 상당한 여파를 미칠 것이다.”
-노무현 정권에 대해 평가한다면.
“광주경선에서 당시 노무현 후보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과거와는 달리 성장을 위해서는 분배가 필요하다고. 지금 노무현대통령에게는 그런 생각을 찾아보기 힘들다. 노무현 정권이 유럽의 좌파나 진보정당 수준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성장일변도의 정책을 수정해 나갈 것으로 기대했고 노 대통령 스스로도 그렇게 이야기했다.
노 정권이 가지고 있는 안보의식도 참 소박한 수준으로 보인다. 비전투병을 파병할 때 뭐라고 했는가. 전투병 파병은 절대 안한다고 했다. 얼마 전에는 미국의 부시 대통령과 이라크에 파병하는 대신 북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전화로 약속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그토록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를 하며 얻어낸 거라고는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했다. 미국에서 이야기하는 더 진전된 단계란 바로 군사적 공격 아닌가. 부시 대통령과 대화하는 바로 그 시간에 백악관 보좌관들은 ‘북핵문제와 관련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는다’는 기자회견을 했다. 미국이 지금까지 해왔던 것에 대해 노무현 대통령이 무지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과 이회창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들린다.
“이회창 전총재가 집권했더라도 뭐가 달라졌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노 대통령에게 실망했다. 그러나 선거를 통한 혁명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측면은 인정한다. 민중운동과 시민운동의 성숙이 관건이라고 생각한다. 이회창 정권이 섰다고 가정한다면 차라리 싸움의 대상이 확실했을 거라는 생각도 해본다. 노무현 정권을 다그쳐도 될까라는 주저하는 모습이 많다. 그러나 그런 가정 자체가 비역사적이다. 노무현 정권의 등장이 후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소위 진보진영이 북한 인권 문제에 무관심하다는 지적이 있다.
“간단한 문제이다. 인권 중에 인권은 생존권이다. 전쟁의 가능성을 공공연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봐라. 얼마나 끔찍한 인권유린인가. 생존권의 문제를 먼저 거론해야 한다. 연간 수 조원의 음식쓰레기를 버리면서 같은 겨레는 아사하는 상황 아닌가. 남아도는 쌀 보내는 것도 방해하는 사람들이 무슨 인권을 거론하는가.
-한겨레신문에 대한 여러 지적의 목소리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한겨레신문 자체도 여러 색깔을 띠고 있다. 너무 많이 기대하면 실망도 클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이 우리가 이룩한 성과이자 키워나가야할 과제이듯 한겨레신문도 제대로 키워나가야 것이 중요하다. 돌 던질 일이 아니라 함께 끌고 나가야 한다. / 김태형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