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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기원
작고 아담한 절집이라고 그 연륜이 짧거나 함부로 해도 좋을 정도로 유래가 보잘 것 없지 않다. 의상 대사가 창건한 절이라고 하니 그 어느 묵직하고 거대한 사찰과도 어깨를 견줄만하다. 불교가 쇠락하는 조선 시대에도 장릉에 제를 올릴 때 제수를 장만하던 조포사로 지정되면서 국가적 보호를 받기도 했다.

절집의 유래를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안내판을 찾아 보았다. 유적지에 와서 안내판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이 있다. 딱딱하고 건조한 문체가 재미없고, 전문 용어 또한 어렵기만 해서 큰맘 먹고 읽어보려던 이들도 읽다가 싫증내기 쉽다. 설령 다 읽고 돌아서 발걸음을 옮긴다 해도 읽고 나서 얻는 뿌듯함보다는 무얼 읽었는지도 모를 허전함이 공복처럼 다가온다.

안내판에 의하면 보덕사는 668년 의상조사가 건립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지덕사란 이름이 붙여졌는데, 조선시대 장릉의 조포사로 지정되면서 보덕사란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안내문을 읽으며 문득 떠오르는 의문이 있다.

절의 유래를 읽어보면 의상의 이름이 등장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는 사실이다. 절의 건립은 물론이고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둔 것이 뿌리를 내려 나무가 되었다는 얘기 또한 상당수의 절의 유래에서 확인되고 있다.

당이 고구려 백제에 이어 신라마저 멸망시키고 한반도 전체를 장악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당나라 유학 중에 깨달은 의상은 홀연 귀국을 했다. 신라는 처절한 전쟁을 통해 당 세력을 축출하고 통일을 달성했지만, 상처투성이 통일일 뿐이었다. 이런 시기를 전후해서 의상에 의해 각지에 절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통일을 전후한 시기 신라 왕조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이념은 무엇이었을까? 다름아닌 사회 통합의 이념이었을 것이다. 패배한 백제와 고구려의 반발을 무마시키고 신라 중심의 이념으로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였을 것이다. 그 이념적 바탕의 하나로 작용했던 것이 의상의 화엄사상이었다. 화엄사상에 대한 다음의 자료를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법이 없다.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 … 화엄의 이런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의 대립도 지양시켜 마음을 통일하게 한다. 이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적인 통일국가의 정신적 뒷받침이 되었다. (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화엄사상 중에서)

신라 왕조나 의상이 추구했던 통합이란 신라 중심의 통합이었고, 궁극적으로 신라의 전제왕권을 중심에 놓고 통합을 이루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통합의 이념을 널리 전파시키기 위한 목적에서 각지에 절이 건립되었다. 당연히 그 많은 절의 건립자로 의상의 이름이 널리 사용되었던 것이다.

의상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절은 대략 100여 개 정도 된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그 많은 절이 모두 의상이 직접 건립한 절은 아닐 것이다. 낙산사나 부석사처럼 직접 건립한 절도 있겠지만 의상이 부적으로 만들어 날린 봉황이 내려앉은 자리에 세웠다는 봉정사의 경우처럼 의상의 권위를 빌어 건립한 사찰도 있을 것이다.

영월의 보덕사는 어떤 경우일까?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해는 670년이다. 그런데 보덕사 건립 연대는 668년이다. 보덕사 건립 연대가 정확하다면 보덕사는 의상에 의해 건립될 수 없었다. 의상이 귀국하기 2년 전이기 때문이다. 결국 영월의 보덕사는 건립 이후에 귀국한 의상의 이름을 차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상의 이름을 차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신라 정부가 추구했던 통합의 이념을 널리 전파시키기 위한 수단이었을 것이다.

작지만 아담한 절집 보덕사는 결코 가볍지 않은 역사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다. 그럼에도 보덕사는 찾는 이들에게 그저 작지만 아담한 절집의 모습으로만 다가서고 있을 뿐이다.

덧붙이는 글 | 홈페이지(http://www.giweon.com)에서도 이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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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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