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은 반역을 기다린다
우리는 고전에서 세상을 읽을 수 있는 눈을 얻는다. 때로는 바르게 사는 지혜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세상을 뒤집을 혁명의 사상을 얻기도 한다. 무엇보다 우리는 고전에서 새로운 가치와 현재에도 유효한 메시지를 발견하기 때문에 늘 고전을 펼쳐든다.
한편 고전은 새로운 해석을 기다린다. '지금 이곳에서' 새로운 해석을 만나지 못하면, 한낱 빛바랜 책이 되고 마는 것이 고전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전은 그것을 넘어설 새로운 고전이 탄생할 밑거름이 된다.
그래도 '고전은 반역을 기다린다'는 말을 '건방지게'(?) 할 수 있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 무슨 '겁도 없는'(!) 소리냐고 말이다.
그러나 여기 '겁도 없는' 기획을 실천해 우리 시대, 우리의 문제의식으로 고전을 다시 써 출판계와 인문학계에서 주목받는 시리즈가 있다. 바로 그린비 출판사의 다시 쓰는 고전 '리라이팅 클래식' 시리즈다.
한국의 소장학자들이 박지원의 <열하일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함께 쓴 <계몽의 변증법>을 풀이하고 우리 시대, 우리의 문제의식으로 다시 쓴 것이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고미숙 지음 / 2003년 3월 25일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 고병권 지음 / 2003년 3월 25일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 권용선 지음 / 2003년 3월 25일
(이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 <니체의 위험한 책>, <이성은 신화다>로 표기)
지금 이곳의 관점으로 고전을 새롭게 쓴 '리라이팅 클래식'은 독자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책이다. 이에 '리라이팅 클래식'의 기획자인 김현경씨를 만나 기획의도와 저자 발굴 과정, 인문서 출판사의 고민, 출판현실 등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어 보았다.
"고전이라는 이름은 인문서 출판사들에게 매우 매력적인 텍스트"라고 입을 여는 김현경 편집장에게서 먼저 '리라이팅 클래식'의 진행과정 당시의 고민에 대해 들어보았다.
"우선은 기존의 인문학 서적과는 다른 개념의 인문학 서적을 내고자 했습니다. 항상 <청소년이 읽어야 할 고전>, <대학 신입생이 읽어야 할 고전>하는 식으로 목록이 나오는데,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번역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있고, 청소년이나 대학 신입생이 읽기에는 터무니없이 어려운 원서들이 있기 때문이죠.
고등학생 때 니체 책 한 번 잡아보다 실패하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계몽의 변증법>도 시도했다가 포기하는 등 유사한 경험이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결국 '고전을 끝까지 읽을 수가 없구나'하고 자포자기하게 되는데, 무엇보다 고전을 쉽게 해설한 책이 필요합니다."
김 편집장은 먼저 이렇게 현 출판계의 고전 출판에 대해 문제의식을 내비쳤다. 또 고전을 대하는 현 수준과 고전 해석에 관한 안일한 지적 풍토에 대해 넌지시 비판의식을 보였다. 그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이미 고전에 대해 쉬운 해석과 풀이는 시도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많지 않은 그런 책들조차 대부분 번역서라는 데 아쉬움이 있습니다. 또 유럽의 지적 풍토와 우리의 경우가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생기는 괴리가 있죠.
그래서 우리 필자들이 우리 언어로 새롭게 풀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그것이 독자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이 될 거라 생각했죠."
이것이 김 편집장이 말하는 '리라이팅 클래식'의 시작점이다. 그런 고민을 하던 김 편집장은 당시 맑스 학위논문 번역을 위해 그린비 출판사를 드나들던 고병권씨를 통해 '연구공간 수유+너머'와 만나게 된다. 그는 그들의 강좌도 들어보고 하면서 이미 "지적 풍토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 터라 함께 작업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리라이팅 클래식'과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만남으로 이어지면서 편집자의 기획의도를 읽을 수 있었다.
"리라이팅 클래식이 새로운 실험으로 얘기가 되면서 그들과 회의를 자주 열었습니다. 당시 연구실 사람들이 "나는 그냥 쉽게 풀이하기만 하는 것은 싫다. 지금 현재의 의미를 담아 고전을 풀이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그 때 '바로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들었죠. 고전에 주눅 들지 않는다는 거죠.
이 기획물의 가장 중요한 점은 지금 여기의 삶과 고전 해석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 또 완전하게 저자 당신의 언어로 써야 한다는 것. 이 두 가지였습니다."
이렇듯 '리라이팅 클래식'은 출판 편집자의 기획의도와 소장학자들의 새로운 학문 태도가 아름답게 결합해 탄생한 책들이다.
톡톡 튀는 유쾌한 문장에 대한 '검열'(?) "문체반정이 떠오른다"
고전의 가치를 인정하지만, 그래도 고전이나 고전에 대한 해설이라면 짜인 형식, 만연체 문장, 지루함 등이 떠오른다. 그리고 '인내심(!)'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그러나 '리라이팅 클래식'은 기존의 형식을 타파해 버리고 문장 또한 매우 자유롭다. 무엇보다 명쾌한 해설과 호흡이 짧은 문장으로 읽기에 부담이 없는 것이 큰 장점이다. 구체적으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을 한 번 보자.
"소품이란 말 그대로 짧은 글이다. 우선 고문이 지닌 불필요한 긴 호흡을 한 칼에 잘라버림으로써 그 위압적인 무게를 해체해 버린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게 소품의 전략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뛰어난 기지와 창발성이 받쳐줘야 한다… 그래서 소품이 번성했다는 것은 새로운 삶과 사유로 무장한 신지식인들이 출현했다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115쪽)
<열하일기>의 저자 연암 박지원이 살던 시대 유행했던 소품의 특성과 그것이 번성했던 시대의 의미까지 짧은 호흡의 문장으로 명쾌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러나 '리라이팅 클래식'의 '오버(!)'가 여기서 멈춘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더 나아가 그 문장들은 생동하는 구어, 문장부호의 잦은 사용, 명사형 끝맺음 등 문장이 톡톡 튀다 못해 '야단'스럽기까지 하다. 다시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에서 그 중 '점잖은' 경우를 하나 보자.
"호모 루덴스가 펼치는 '개그의 향연!' - 만약 <열하일기>를 영화로 만든다면, 나는 예고편의 컨셉을 이런 식으로 잡을 작정이다. 고전을 중후하게 다루기를 원하는 고전주의자(?)들은 마뜩찮아 할 터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유머 없는 <열하일기>는 상상할 수조차 없으니.
아니, 더 솔직하게 말하면, <열하일기>는 유머로 시작하여 유머로 끝난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도처에서 유머를 구사한다. 그것은 배꼽잡는 해프닝이 일어날 때만이 아니라, 중후한 어조로 이용후생을 설파할 때, 화려한 은유의 퍼레이드나 애상의 분위기를 고조시킬 때, 언제 어디서나 수반된다. 이를테면 유머는 <열하일기>라는 '고원'을 관류하는 '기저음'인 셈."(229쪽)
당대 왕조의 통치 철학인 성리학의 권위에 도전하고, 이용후생을 설파하는 북학파의 대표적인 저서가 <열하일기>다. 그런 저서의 컨셉을 "호모 루덴스가 펼치는 개그의 향연!"으로 잡는다?
그것 참 흥미로운 일이지만, 그 문장 또한 흥미롭다. 사실 만만치 않은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이 책은 지루해 하거나 하품할 틈은커녕 한 눈 팔 틈을 주지 않는다. 이는 아카데미의 규율보다 대중과의 소통에 더 힘쓰겠다는 뜻이리라.
기자는 인문서의 '문체 혁신'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이 어떤지, 그리고 어떤 의도로 진행한 일인지 김 편집장에게 물어보았다.
"당황스러워 하는 사람도 있고,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물론 있습니다. 처음에는 당황스러워했다가 이내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처음부터 신선하고 좋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너무 싫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럴 때는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에 나오는 문체반정이 떠오르죠.
박지원의 자유로운 문체에 대해서 당시 한학자들이 가졌던 반감, 그런 문체반정의 광경이 고스란히 떠올랐습니다.
아주 자유롭기는 하지만 인문학의 냄새가 많이 나는 글쓰기까지가 현재 용인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독자들의 그런 생각도 깨고 싶었습니다. 얼마든지 자유로운 글쓰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김 편집장이 말하는 "자유로운 글쓰기"가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었는지, 이번에는 <이성은 신화다, 계몽의 변증법>의 경우를 보자.
이 책의 서술도 건조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시공을 넘어 마치 손에 잡힐 듯 우리에게 다가온다. 특히 이 책은 문학을 전공한 저자 권용선씨의 장점이 확실히 사는 경우라 할 수 있다. 권씨는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생애를 1인칭 시점에서 마치 자서전처럼 구성해 놓아 어려운 내용에도 불구하고 술술 읽히게끔 만들어 놓았다.
"맑스의 사적 유물론만으로는 완전히 해명되지 않는 인간 정신의 측면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나는 심리학 혹은 정신분석학을 연구소에 도입할 필요를 느꼈다. 사람들은 맑스와 프로이트를 사이좋게 결합시킨 우리 연구소의 이론을...(중략)
하지만 진리를 포기할 수는 없다. 지배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 이성을 구제하고 계몽을 계몽하는 일, 그것이 더 나은 세계를 위해 나에게 부여된 사명일 것이고, 그것을 수행하는 것이 나의 운명일 것이다.
1973년 7월, 나는 너무 오래 살았다. 하지만 내게 부여된 운명의 몫을 감당하기엔 시간이 너무 모자랐다."(23, 27쪽)
이런 서술방식을 택함으로써 권씨는 쉽게 읽히는 장점뿐만 아니라, 문학적 감상의 재미까지 더해 놓았다. 권씨의 혁신적인 형식은 이에 그치지 않는다. 권씨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기획회의를 가상으로 구성하기까지 한다.
아도르노 : 아래층에 세 들어 있는 카페에서 밤낮없이 재즈만 크게 틀어대는 통에 아주 미치겠어요. 그 차이 없이 반복되는 단조로운 음이 뭐가 좋다는 건지 참, 이해가 안 됩니다.
호르크하이머 : 하하, 아도르노씨는 기존의 음악 문법을 전복하는 음악만 너무 편애하는 거 아닙니까. 대중음악에도 관심을 좀 가져 보시죠.
아도르노 : 취향도 취향이지만, 사실 요즘 전 미국의 대중문화에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아무 생각들이 없는지…. 할리우드 영화만 해도 그렇구요.
호르크하이머 : 그게 어디 대중들 탓입니까. 그들을 점점 더 아무 생각 없는 자들로 만드는 이 가공할 지배의 체계가 문제 아니겠어요.
아도르노 : 예, 게다가 이 망할 놈의 자본주의는 정말, 뭐든지 다 돈으로 만들어 버리는 기막힌 재주를 가지고 있으니.
호르크하이머 : 그래요. 대중들은 자신들이 뭔가 자발적으로 하고 있다고 믿지만, 그 뒤에는 분명히 보이지 않는 손이 있지요. 소비문화도 문제지만, 문화산업에 의해 전파되는 이데올로기의 힘을 보면 저는 경악을 금할 수가 없어요.(141-2쪽)
권씨는 이들의 자유로운 대화 속에 이들 사상의 핵심을 담아 놓았다. 이들의 대화를 흥미롭게 따라가다 보면 저절로 이들의 사상의 정수를 접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매우 탁월한 발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계몽의 변증법>의 난해한 내용을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담으면서도 독자들에게 쉽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는 지금까지 인문서에서 보기 힘든 획기적인 형식이다. 김 편집장은 소설적 형식의 도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걸 봤을 때 '그래, 바로 이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 전에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형식이고 저자의 장점이 가장 잘 드러난 글쓰기였습니다."
현실과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고전 해석의 재미
그럼 이쯤에서 과연 이 책들의 내용은 어떤지 살펴보면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먼저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고미숙 지음)은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들뢰즈의 사유를 바탕으로 고전을 다시 쓴 경우다. 유목, 탈주, 분열자 등 들뢰즈의 개념어로 <열하일기>를 소설처럼 쉽고 흥미롭게 재구성했다.
무엇보다 저자 고미숙만의 '유쾌한' 문체와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유머와 패러독스'로 풀이하는 것이 눈에 먼저 띈다. 저자는 서문에서 "연암이 얼마나 '유머의 천재'인지 널리 알리고 싶어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할 정도다.
그리고 저자는 <열하일기>를 통해 "조선 후기는 예기치 않은 목소리들이 웅성거리는 '지적 향연'의 장을 우리 앞에 펼쳐 보인다"며, 그곳에서 지금 이 시대를 넘어설 새로운 사유를 발견한다.
다음으로 <니체의 위험한 책>(고병권 지음)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평이하고 체계적으로 풀이한 책이다. 니체 사상의 전모를 접할 수 있으며, 그간 니체에 대해 잘못 알려진 오해를 바로잡기도 한다.
예컨대, 여성에 대한 니체의 이해하기 힘든 발언 즉 "여자는 봉사하기를 바라며 봉사에서 행복을 느낀다", "여자는 매력을 상실하는 것과 비례해서 증오하는 법을 배운다", "학구적인 성향을 지닌 여자에게는 성적 결함이 있는 게 보통이다"는 식의 '악담'(?)들에 대해 논한다.
과연 니체가 '꼴통 수준의 마초'인가? 서구 문화에 그토록 급진적인 비판을 가했던 니체, 플라톤부터 칸트, 헤겔까지 서구 철학의 관념론과 형이상학을 통렬하게 비판한 니체, 그가 정말 '꼴통 수준의 마초'였을까? 어쩌면 우리가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확인해 보기 바란다.
또한 <니체의 위험한 책>은 저자의 명쾌하고 평이한 해설, 그리고 다양한 화보와 함께 니체를 읽는 재미가 있으며, 최근 몇 년 사이 급속하게 성장한 니체 철학에 대한 한국 학계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어 주목할 만한 책이다.
여기서 잠깐. 책에 '미친' 한 독자로서 '건방지게' 말해 본다면,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분석한 맑스, 모든 우상에 대해 사정없이 망치를 내리친 '선천적 반골' 니체, 이 둘은 이 시대를 고민하는 진지한 젊은이라면 19세기 서구 고전 중에서 반드시 독파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여정에 <니체의 위험한 책>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계몽의 변증법>(권용선 지음)은 '지금 이곳의' 문제의식이 치열한 것이 눈에 띈다. 이성과 합리성을 지니고, '근대 계몽 프로젝트'를 통해 진화한 인간이 어떻게 파시즘과 같은 집단적인 광기에 휘둘릴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이 책의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원저자의 문제의식도 그렇지만, 고전을 다시 쓴 권용선씨의 문제의식 또한 그에 못지않게 치열하다. 그는 인류를 야만 상태로 몰아가는 파시즘의 힘이 지금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다고 본다.
즉 저자는 부시가 벌인 이라크 전쟁, 그리고 한국의 지역차별, 여성차별, 외국인차별에서 파시즘의 욕망과 징후를 발견한다. 무엇보다 저자는 21세기판 파시즘인 이라크 침략전쟁에 분노한다. 이 책은 이런 광기가 이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21세기에 <계몽의 변증법>은 여전히 다시 읽어야 할 고전임을 확인케 한다.
이 책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을 뽑는다면, 그것은 근대 혹은 근대성을 비판하고 뛰어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계몽의 변증법>이 '근대 계몽 프로젝트'에 대한 직접적 비판이라면, 니체의 사유와 연암의 유머는 근대적 이성의 파산을 선언하고 나아가 근대를 넘어설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찾는다.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는 책읽기의 경계를 허물어 버리고 싶다"
그리고 세 권의 책은 모두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고전을 쉽게 풀이했다. 둘째, 저자만의 사유로 고전을 해석했다. 셋째, 저자만의 문체로 서술하고 기존의 형식을 타파하여 자유롭게 서술했다. 넷째, 지금 이곳의 문제의식으로 고전을 해석했다. 즉 현실과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한편 이런 특징을 지닌 이 기획물에서 한국 소장학자들의 자신감을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즉 서구 고전을 수입하기에 급급했던 시대에서 벗어나 이제 그것을 다시 쓰는 정도의 수준으로, 그것도 기존의 형식을 타파하고 저자 자신만의 사유로 재구성할 만큼 지적 토양이 성숙했음을 확인케 한다.
이런 '리라이팅 클래식'에 대해 기획자 자신은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을까? "인문학 출판의 전환점에 저희 책도 기여했다는 생각은 한다"고 운을 떼는 김현경 편집장의 말을 들어보았다.
"매우 근대적인 사고들, 이를테면 형식이 정해져 있고, 고전에 대한 엄숙함이 있고, 책을 쓰는 저자와 대상이 분리되어 있고, 독자는 하나의 대상이고 하는 것들. 또한 기존의 책읽기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되는 데, 그러한 경계들을 모조리 허물어 버리려고 노력했습니다.
글쓰기가 매우 고독하고 외로운 작업이라고 하지만, '리라이팅 클래식'은 매우 즐겁게 쓴 경우입니다. 즐거운 글쓰기, 그래서 읽는 독자도 즐거워지는 새로운 독서문화. 이런 전환점이 될 거라 봅니다."
한편 시리즈의 첫 책, 다시 쓰는 고전이 <열하일기>다. 맑스의 <자본>도 아니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도 아니다. 그렇다고 <논어>도 <장자>도 아닌 <열하일기>란 말이다. <열하일기>를 첫 책으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에 대해 김 편집장은 "사실은 처음부터 첫 책으로 정해 놓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며 '비화'(?)를 털어 놓았다.
"첫 책으로 플라톤의 <국가>나 맑스의 <자본> 정도를 암묵적으로 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원고를 보는 순간 그것이 바뀌었습니다. 왜냐면, 우선 인문학 책의 문체의 자유로움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느 책에서도 볼 수 없는 자유로운 저자 자신의 문체와 목소리가 담겨 있죠.
사람들은 인문학 책은 항상 객관적으로 쓰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와 책이 거리를 두고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이 책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은 고전을 해설하는 고미숙과 고전의 원저자 박지원이 너무 친밀하다는 것. 저희는 그런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이 새로운 형식이 될 수 있다고 보았죠.
그리고 내용에서도 고미숙이 들뢰즈의 철학으로 박지원을 접하고 그 가치를 발견했다는 것, 그래서 고미숙 자신만의 박지원을 발견했다는 점. 또한 서양의 사유와 만나고 지금의 저자와 옛날의 저자가 마치 친구처럼 만난다는 점이 가장 전범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첫 책으로 선정했죠.
또 한국 고전에도 오늘을 극복할 철학적 사유가 담겨 있다는 것을 독자에게 알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새로운 필자 발굴 너무 힘들어"
이러한 굵직한 기획물은 10년, 20년 길게 내다보고 하는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자본력이 빈약한 출판사가 이런 기획물을 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어려움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당연히 기존의 시리즈를 생각했으면 아마 못했을 겁니다. 저희가 자본력도 부족하고, 특히 이 시리즈를 기획했을 당시(1999년 말)에는 아이엠에프 시절 부도의 살벌함에서 겨우 벗어난 시점이었죠.
그러나 저희는 새로운 사유를 보여주고 각각의 책이 특색을 갖춘다면 최소한 손해는 보지 않는다고 판단했습니다. 알아보는 독자는 꼭 있을 거라 생각했죠. 그리고 어차피 떼돈 벌 생각으로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할 수 있는 기획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희처럼 작은 규모의 출판사에게 연구공간 수유+너머가 큰 힘이었죠."
이야기가 이쯤 진행되자, 화제가 자연스럽게 필자 발굴의 어려움으로 넘어갔다. 기자는 이 시리즈에 적합한 필자라면 최소한 두 가지 점을 충족하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하나는 지금 이곳의 문제의식을 가지고 고전을 해석하는 능력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대중적으로 풀어서 설명할 수 있는 서술능력이다.
문제는 그러한 필자가 한국 학계에 과연 얼마나 있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 편집장은 "저자 발굴이 너무 어렵다. 정말 발굴하고 싶은데…"하면서 답답한 속내를 감추지 않았다.
"기존의 학계만 뒤지다 보면 찾을 수 있는 필자가 너무 없습니다. 지금 현재 드러난 저자들이 많지 않죠. 두 가지를 충족시키는 분이 과연 얼마나 있는지는 열 손가락 꼽기도 힘들죠. 이를테면 유시민, 고종석, 진중권 정도는 되어야 하는데, 그런 능력을 가진 필자가 매우 드물어요. 따라서 새로운 필자를 발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그게 너무 어렵습니다."
김 편집장은 이어서 "광고성 멘트를 꼭 넣어 달라"고 기자에게 부탁했다. 내용인즉 "책을 너무 사랑하고 그 책과 즐겁게 만나기를 원하는 필자가 있다면 누구나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와 주셨으면 합니다"하는 것이었다.
한편 '리라이팅 클래식'에서 앞으로 출간할 목록에는 <자본>, <순수이성비판>, <국가>, <에티카> 등이 있는데, 서양고전에 치우친 것이 아쉽다. 한국 고전을 포함한 동양 고전에 더 힘쓸 필요가 있어 보인다. 이에 대해서도 김 편집장의 말을 들어 보았다.
"맞습니다. 저희가 올려놓은 것은 거의 확실하다고 한 것만 올려놓았는데, 그 외에 지난 목록에는 올라가 있지 않지만 <논어>와 서산대사의 <선가귀감>도 있습니다. 그래도 부족하기는 하죠. 그 부분은 저희도 신경을 더 많이 써야겠죠."
사실 동양고전에 대한 수요는 많지 않다. 독자들도 많이 찾지 않는다. 그리고 서양 고전보다 더 저자 확보에 어려움이 많다. 따라서 어떤 출판사라도 힘들게 마련이다. 무리인 줄 알지만, 이 부분은 꼭 부탁하고 싶다. 출판사가 할 수 있는 수준에서 타개책을 고민해 주기를.
이어서 이번에는 '리라이팅 클래식'에서 앞으로 나올 책들을 독자들 앞에 밝혀 놓았는데, 진행이 얼마나 되었는지 물어 보았다. 김 편집장은 이진경씨가 새로 해석한 마르크스의 <자본>이 가장 먼저 나올 것 같다고 한다.
"3월이나 4월경에 <자본>이 출간될 수 있을 듯합니다. 다양한 형식 실험을 하는 중인데, 단지 <자본>을 쉽게 풀어쓰는 수준이 아니라, 저자의 사유를 더 보여주는 방향으로 나갑니다. 즉 이진경씨만의 사유를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춘 <자본>이죠. 그 외 근거리에 있는 원고가 <에티카>, <순수이성비판>, <논어> 정도가 있습니다."
이진경씨만의 사유를 담은 <자본>이라? 어떤 파격적인 책이 될지 참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이 침체되어 있고 인문학 서적도 침체를 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린비 출판사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현재 뭐가 꼭 필요한가, 나를 포함한 독자들이 꼭 읽고 싶어 하는 책이 무엇인가 고민을 합니다. 거기에 맞는 책을 낸다면 리라이팅 클래식을 찾아준 것처럼 얼마든지 찾아줄 독자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인문학 출판의 위기도 자연 사라질 거라 봅니다."
확실히 자신감 넘치는 답변이다. '리라이팅 클래식'의 저자와 편집자가 모두 자신감 넘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런 자신감으로 앞으로도 시대와 호흡하는 좋은 책을 많이 만들어주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