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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친족의 종가인 사촌 큰형님 댁에서는 일년에 제사를 여섯 번 지낸다. 기일 순서대로 꼽으면 조모님, 증조모님, 증조부님, 조부님, 그리고 백모님과 백부님 제사다.

내 어렸을 적에는 고조님들에 대한 제사도 있었다. 사촌 형님들이 결혼을 해서 출산을 하게 되니 그 아이들에게는 진고조가 되는 내 고조님들 제사는 어느 해부턴가 지내지 않게 되었다.

백부님과 선친께서는 당신들 사후에, 즉 내 사촌 형님들이 손자를 보게 되면 그 아이들에게는 진고조가 되는 우리 증조님들에 대한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하셨지만, 우리는 지금도 계속 증조 제사를 지내고 있다. 그리고 고조 이상의 조상님들에 대한 제사는 일년에 한 번씩 시제(時祭)로 대신하고 있다.

시제는 밖에서(8대조 효열정문 앞에서) 지내는 것이니 제외하고, 나는 일년에 다섯 번 사촌 큰형님 댁에 제사를 지내러 다닌다. 여섯 번이 아닌 것은 증조모님의 기일이 내 선친의 기일과 같은 날이기 때문이다. 즉 우리 집에서 따로 선친 제사를 지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고 또 조카들을 보기 시작한 후로는 설날과 추석에는 사촌 큰형님 댁에 가지 않게 되었다. 사촌 큰형님 댁에 가서 차례를 지내고 와서 선친 차례를 지내기는 시간이 너무 늦고, 집에서 선친 차례부터 지내고 큰댁에 가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고 해서 궁리 끝에 사촌 형님들께 선언을 했다.

나도 한 집안의 장자로서 동생들과 조카들을 둔 처지인데, 그들이 모두 모이는 명절에 자리를 비우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다. 동생들과 내 자식들과 조카들을 모두 데리고 집에서 차례를 지내겠다는 말을 하고 세 분 사촌 형님의 양해를 구했다.

이렇게 명절 차례는 집에서 따로 지내지만, 다섯 번의 제사에는 정성껏 참여하고 있다. 기일마다 아침 일찍 정육점에 가서 쇠고기 두 근을 사다가 사촌 큰형님 댁에 드리곤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매번 아내와 함께 큰형님 댁을 간다.

지난달 29일은 증조부님의 기일이었다. 하필 그때를 잡아 아내가 서울에 가고 없는 탓에 혼자 집을 나서야 했다. 가뜩이나 제사 지내는 사람이 적어서 쓸쓸한 판에 아내마저 출타를 한 것이 서운하기도 하고 허전함이 컸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남편과 동행하여 꼭꼭 제사에 참여해 주곤 했던 아내가 새삼스럽게 고마워지는 마음도 있었다.

아들녀석을 꼭 데리고 가고 싶었으나 이번에도 실패를 했다. 아들녀석은 컴퓨터 앞에서 떨어질 줄을 모르며 도리질을 했다. 내 어렸을 적 몹시 엄하셨던 선친을 떠올려보았지만, 제사 음식 먹을 욕심에 선뜻 아버지를 따라나서고 했던 내 모습도 함께 떠올라서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녀석이 좋아하는 쇠고기 산적 얘기를 하니, 녀석은 그걸 가져다달라는 말뿐이었다.

아버지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었지만 제사 음식 먹을 욕심과 부푼 기대로 아버지를 따라 동네 고샅길과 신작로를 걷던 날 밤의 투명한 달빛, 또는 눈길을 밟는 뽀드득 뽀드득 소리에 대한 기억이 잠시 내 가슴에 알싸한 그리움을 안겨주는 듯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두 다리 걸음이 아닌, 자동차를 이용하는 시절이었다.

장남 노릇이 참 힘들다는 공연한 생각이 또 잠시 내 뇌리에 엉겼다. 나이 사십이 훌렁 넘도록 사촌 큰형님 댁 제사는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사는 동생들이 슬며시 섭섭해지는 마음이었다. 매번 제사에 같이 참여하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바쁜 일에 허덕이거나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동생이 대신 큰댁 제사에 참석에 주는 것도 좋은 모습일 텐데….

먼저 사촌 작은형님의 가게 앞으로 갔다. 18년 전 내 선친께서 작고하시던 해의 연세(66세)보다 올해 한 살을 더 잡수신 사촌 작은형님의 모습에서 나는 일순 선친 생전 모습의 어떤 잔영 같은 것을 느끼는 기분이었다. 재작년 여름 서른 여섯 한창 시절인 큰아들을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후 상심과 싸우며 사시는 형님은 요사이 흰 머리칼이 좀더 늘어난 모습이었다.

형님과 함께 내 차에 오른 아이는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형님의 큰손자 정흠이었다. 제 아비를 닮아 체격도 크고 성격도 서글서글한 아이였다. 그 어린것이 아빠를 대신하듯 매번 제사에 참여하곤 하는 것이 기특하기 그지없었다.

녀석은 유치원 시절부터 제사에 따라와서 보곤 했던 제 아빠의 생전 모습을 잘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제 아빠가 한 것처럼 스스로 나서서 잔에 술을 따르고, 잔을 받아서 상에 놓고 하는 일을 했다.

요즘 제사는 옛날처럼 자정 시간을 고집하지 않는다. 9시가 넘으면 시간 보지 않고 제사를 지낸다. 옛날엔 밤 12시를 기다리는 시간이 참으로 지루했었다.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라디오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나는 또래 사촌들과 노는 것도 시들해서 잠을 자기도 하며 그 시간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제사를 지낸 다음 큰어머니가 나누어주는 밤 대추 곶감 따위를 주머니에 넣고 아껴 먹던 재미, 한참만에 먹어보는 쇠고기 미역국이며, 고소한 김에 싸서 먹는 하얀 쌀밥이며…그 모든 것은 제사에 따라와서 오래오래 참고 기다린 보람, 바로 그것이었다.

옛날에는 제삿날에 모인 어른도 많고 아이들도 많았다. 그 세월이 아득히 멀어져서인가, 이제는 제사 자리가 썰렁하고 쓸쓸하기조차 하다. 증조부 제사는 사촌 큰형님 내외와 작은형님, 나와 정흠이, 이렇게 다섯 사람이 지냈을 뿐이었다. 남자가 네 명인 것은 근래 들어 거의 고정된 것이기도 하다.

세 분 사촌 형님의 자녀들이 모두 고향을 떠나 사는 탓이고, 유일하게 고향에 남았던 정흠이 아빠마저 젊은 나이에 이승을 하직했으니….

정흠이 아빠가 없는 그 빈자리의 아쉬움과 허전함이 아직은 감돌고 있고, 거기다가 사촌 둘째형님이 벌써 수 년째 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연도 있으니 제사 분위기는 좀더 무겁고도 침울하다.

제사를 지낼 때마다 혼자 생각을 해보곤 한다. 제사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부모나 조상들의 기일에 음식을 차려놓고 자손들이 함께 절을 올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도 일종의 효(孝)라면, 효의 참 모습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우선은 자식들이 서로 나누고 돕고 우애하는 참 형제다운 모습을 조상님들께 보여 드리는 것이 제사의 바른 모습이 아닐까?

세상 떠난 이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그 시간만이라도 인생의 덧없음과 세상 욕심의 무가치함을 생각하고, 형제간의 우애와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마련하는 것이 형식적인 제사보다 더 중요함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여러 가지 조건으로 볼 때 우리 집안의 오늘의 이 제사가 언제까지 지속될지 알 수 없다.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사촌 형님들이 모두 돌아가시면 각 집의 부모 제사는 몰라도 조상 제사는 함께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현재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촌 큰형님의 큰아들이 장차 장손의 책무로 모든 제사를 이어받을지도 모르지만, 더욱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혈족간의 '사랑'일 터이다. 지금의 어른들이 자식과 조카 손자 모두에게 두루 본을 보여 주고 가르치는 형제간의 우애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넉넉히 감돌 때 모든 자손들의 조상 제사에 대한 애착과 책무도 함께 커질 수 있을 것이다.

전에는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할 때 나 혼자 성호를 긋는 것이 조금은 무안하고 외롭기도 했다. 그러다가 재작년 여름 내 당질이 죽음 자리에서 나로부터 대세를 받은 것에 연유하여 엄마와 함께 천주교 신자가 된 정흠이가 요즘은 밥상 앞에서 당당하고 명확하게 성호를 긋는 것을 보게 되었다. 대견하고 흐뭇한 마음 크다.

그런데 며느리와 손자와 함께 내 사촌 작은형님 내외도 드디어 성당에 나오기 시작했다. 엊그제 주일 두 분이 함께 정식으로 '예비자' 등록을 했다.

성당에서 두 분의 모습을 보며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어느덧 노년기에 접어든 두 분의 새로운 발걸음은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는 가운데서 신앙의 의미와 참 가치를 탐구해 보려는 마음이 싹튼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사랑'의 실체와 가치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가슴 깊이 자리했기 때문일 터였다.

지역에서 의용소방대장을 하며 오랫동안 봉사 활동을 하신 사촌 작은형님은 젊은 시절부터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며 집안의 대소사를 앞장서 주선하고 처리해 온 분이었다. 선대의 유산 상속과 관련하여 형제들간에 갈등이 빚어진 국면에서 일찍부터 자기 지분 포기를 선언하고 그 조건으로 다른 형제들간의 적절한 배분 처리를 촉구하시는 분이기도 하다.

욕심에 집착하지 않는 그런 심성 위에 하느님 신앙이 굳게 자리한다면, 작은형님으로부터 더욱 좋은 영향들이 주변에(제사 분위기에도) 많이 미치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 희망을 싸안으며, 사촌 작은형님 내외분이 잘 준비하여 참 신앙인이 되고, 그 신앙 속에서 노년의 삶을 잘 경작해 가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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