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있는 까닭에 때문에 영화 <스캔들: 조선남여살열지사>를 최근에야 봤다. 그런데 그 영화에는 '열하일기'가 양념으로 밖에 들어었지 않았다. 서학(천주교)에 관심있는 정씨 부인(전도연 분)이 서고에서 이 책을 보고 관심을 갖자, 조원(배용준 분)이 이 책의 한 부분을 읇조리고 나중에 이 책을 정씨에게 선물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사실 이 과정에서 '열하일기'는 그저 시청자들의 머릿속에 익숙한 낯익은 소재이기 때문에 쓰인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또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전체적인 시대상도 그다지 세밀하지 않다. 그저 서학과 한국 학문이 맞부딪혔던 시기 정도로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연암 박지원이 살았던 시대 상황은 휠씬 광범위하고 복잡하다. 반면에 이 책은 시대 인식에 비교적 충실하다.(영화를 탓하기 보다는 그 정도라도 소재를 찾아낸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정조가 죽은 후 안동 김씨 세력이 세도를 잡으면서 시파(詩派: 정조 지지파)에 대한 벽파(僻派)의 공격과 천주교에 대한 일대 탄압 등의 정세. 그리고 현실정치에 회의를 품고 부유하는 이들까지. 특히 1792년 정조가 주도한 문체반정 이후 벌어진 지식인들의 자기검열에 이르는 흐름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다.
물론 이런 저간에 쏟아진 다산 정약용과 연암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등 변혁기 지식인들의 텍스트는 도드라지고, 그 가운데 다산과 연암의 가치는 단연 돋보인다.
사실 이런 텍스트들은 아직 대부분 국립도서관이나 대학도서관에 숨겨져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학자 중심으로 서서히 빛을 보고 있는데 지난해 가장 도드라진 것이 ‘미암일기’를 풀어쓴 정창권의 ‘홀로 벼슬하며 그대를 생각하노라’(사계절 출간)와 이 책 등이다.
고미숙의 연암 읽기가 전향적인 문화연구 단체인 ‘수유 연구실’을 통해 가능했다면, 정창권의 미암 읽기는 학생들과 같이했던 ‘고려사연구회’라는 작은 단체를 통해 가능했다. 사실 지난해 두 연구자의 작업이 약간 빛을 봤지만 문화 발전을 위해서는 이런 단체와 활동이 끊임없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아직 해석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수많은 텍스트들이 외부의 손을 탈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또 음식사의 접목으로 독특한 맛을 내 인기를 끈 드라마 ‘대장금’처럼 일반인들은 ‘태정태세’를 외우기 보다는 선인들의 콘텐츠 속에 숨어있는 미묘한 맛에 더 관심을 보인다.
종횡으로 연암읽기
다시 고미숙의 ‘열하일기’로 돌아가 보자. 작가가 글을 쓰는 철학이나 방식에 있어서 그가 가장 중시한 것은 수유연구실의 방식인 ‘유목’이다. 이는 그 단체의 좌장 이진경의 ‘노마디즘’을 상당 부분 수용한 것이다. 이런 흐름은 역마살을 통해 새로운 자아를 찾아다니는 작금의 우리 모습과도 상당히 닮아있다.
초반기부터 작가가 풀어가는 연암은 친근하기 그지없는 인물이다. 천재적인 기질을 가졌지만, 자신의 몸을 주체하기 힘들만큼 거대한 체구, 과거에 응시하기를 싫어하는 기질을 가늠해보면 대강의 연암을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 ‘형을 생각하며’(83p)라는 시에서 나타나는 느낌은 그가 덩치 큰 곰처럼 착하고 여리기 그지없는 지식인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그런 부분은 그의 자화자찬에 “용기는 자로(子路)와 버금가며”를 넣지 않은 것에서 쉽게 느낄 수 있다.
사실 곰처럼 순박한 천재를 좋아하지 않을 이들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그 대열에 작가도 어쩔 수 없이 끼어들었다. 때문에 죽자살자 그를 쫓아가는 심연의 여행을 시작한다. 그런데 문제는 코드로 봤을 때, 박지원의 코드를 찾기가 쉽지 않은 것에 문제가 있다.
박지원의 캐릭터는 은둔 지사의 풍모가 있는 반면에 반향적, 극좌적 지식인의 상징인 이탁오와 같은 기질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한 부분으로 편향되어 분석도 쉬울 뿐만 아니라 논리가 단순한 인물들에 비해 휠씬 흥미롭다.
작가는 이 박지원의 세계를 현대에서 통용되는 문화 분석의 키워드로 파고 든다. 이 작업은 글발이 상당한 작가의 능력으로 인해 흥미진진하게 진행된다. 다만 문제는 작가가 서서히 자아도취에 빠져들면서 정작 연암의 매력을 캐기 보다는 자신의 글쓰기 매력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이 드는 데 있다. 또 후반에 연암과 다산을 비교한 것은 상당히 유용한 면이 있지만 지나치게 분량이 많아 전체적인 구성에서 엇박자가 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연암 인식의 한계와 당시
책에서 가장 쉽게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가 우리나라의 대외인식 부분의 문제다. 가령 병자호란 이후 벌어진 북벌론의 허구성이나 국력이 쇄약해 지면서 반청복명을 주창하는 썩어빠진 소중화 사상의 실체 그리고 그것을 감지하는 지식인들의 인식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런 분위기는 열하에서 티베트 법왕 판첸 라마를 만나는 사신의 모습에서 극단적으로 느낄 수 있다. 당시 티베트 불교가 이단 중에 이단이라고 하지만, 그들 앞에서 벌이는 해프닝은 어찌보면 우리들의 '깡다구'지만, 정확히는 '무모한 오기'에 가깝다.
그런 와중에 연암은 계속해서 현상에 대해서 회의하기 시작한다. 그들이 여전히 숭앙하는 명나라는 이제 흔적도 없고, 청나라는 “무슨 덕화(德化)를 베풀었기에 이런 태평천하가 가능하단 말인가”라는 탄식이 쏟아진다. 사실 그렇다.
변방민족과 한족을 막론하고 중국 역대 왕조에서 가장 빼어난 치적을 세운 황제는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로 이어지는 3대라는 것을 부인할 중국인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한무제, 당태종, 칭기즈칸이 있지만 그들은 다양한 한계를 가진 반면에 이 세 황제는 문무를 완벽하게 조화시키면서 지금 중국이 가진 대부분의 기반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날카로운 시선을 가진 연암이라고 해도 모든 사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가 펼치는 천하의 다섯가지 형세론에서 그가 당시 국제정세를 읽는 한계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는 황제가 장성밖 황벽한 열하(熱河)에서 거처하는 것을 두고, 몽고의 강성함으로 파악한다.
물론 그가 파악한대로 몽고의 강성함도 있지만 몽고의 황제들이 열하에 여름 별장을 세운 것은 구중궁궐에 있을 때, 벌어지는 나약함에 대한 경계였다. 그래서 그들은 만리장성의 축수보다는 열하에 행궁을 세우고, 목란(木蘭)위장(圍場)을 세우고 그 안에서 사냥을 통해 군사훈련을 했다.(자세한 설명은 위치우위의 ‘천년의 정원’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티베트 판첸라마를 외팔묘에 모셔 둔 것을 보고, 티베트에 대한 두려움을 말한다.
하지만 기자는 이런 인식의 방점을 오히려 라마교에 대한 숭수한 숭배로 받아들인다. 황하이북의 불교인 라마교는 지배자들 뿐만 아니라 사상계 전반에서 상당히 깊숙이 침윤했다. 판첸 라마의 열하 거주는 사실상 숭배적인 의미가 상당히 크다. 그 의미를 너무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에게 부여된 노마디즘
이 책에 소개되는 열하일기 본문 가운데는 “나 역시 성질이 재물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이렇게 가난하게 되었으나, …이번에 요동벌을 지나오면서 밭가에 둘린 뽕나무 숲을 바라보다가, 끝없이 넓은 것을 보고는 망연자실할 따름이었다”(66p)는 ‘동란필섭’(銅蘭涉筆)의 한 대목이 나온다.
사실 밖에서 보는 우리나라는 너무 작다. 정치의 고루함 만큼 경제나 문화 등도 폐쇄적이기 그지 없다. 문제는 작가 스스로가 말하듯이 유목적 사고를 기르는 것이다.
그 유목적 사고는 한가지에 매몰되지 않는다. 한가지에 매몰되는 시기는 조선조 5백년으로 충분하다. 세계가 한 마을처럼 되는 시기에는 연암의 시각마저도 흐트릴 수 있는 드넓은 세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언덕마다 아오파오(熬包 서낭당이자 사막과 초원의 등대)를 세우고, 세계를 주유하던 몽고의 노마디즘이 필요한 시기다.
사실 연암이 작고한 것이 1805년이니 올해로 2백년을 맞는다. 먼 이야기 같지만 먼 이야기도 아니다. '넷(net)'이라는 사막을 헤엄치면서 새로운 '콘텐츠'라는 아오파오를 새우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박지원은 나름대로 괜찮은 등대다. 이런 등대의 가치를 전해준 작가에게 감사하는 한편 한국 문화계가 이런 아오파오들을 찾는데 한층 더 노력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섣부른 주문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