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와 언론계를 통역하는 심정으로 했다. 똑같은 한국말인데도 기자들은 노동계 얘기를 못 알아들었고, 노동계는 기자를 두려워했다.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둘 사이에 통역이 필요했다."
99년부터 민주노총의 대언론 창구를 지켰던 손낙구(43) 전 교육선전실장은 '통역사'에 빗댄 표현으로 5년간 소감을 대신했다. 최근 민주노총의 새 지도부 출범에 따른 인사개편으로 5일 교육선전실장을 물러난 그는 이달 중순 보직 발령까지 잠시 휴식을 취할 예정이다.
'통역이 필요했다'는 그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노동계와 언론의 소통은 원활하지 못했다. '적대적인 관계'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노동계와 언론은 평행선을 달려왔다.
이데올로기 공세의 선두주자였던 보수언론은 노동운동을 '빨갱이'이자 '체제 전복세력'으로, 또는 '북한의 사주를 받는 집단'으로 매도하기에 바빴다. 2000년대 들어서는 과거 이념공세와 달리 '노조 망국론', '경제 악영향론' 등 경제적인 논리로 노동자를 압박하고 있다는 게 노동계 해석이다.
그런 와중에 손 전 교육실장은 1000여명이 넘는 기자들과 얼굴을 맞대면서 '언론과의 전쟁'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는 마지막 보도자료에서 "부족한 점은 많았지만 최선을 다했기에 미련은 없다"고 이별사를 전했다.
모처럼의 가족여행을 앞둔 그를 6일 밤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났다.
언론과의 전쟁, 5년을 말하다
- 민주노총 교육선전실장을 맡게 된 사연은?
"81년 대학에 입학해 86년 대학원 3학기를 마친 뒤 노동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러다 94년 전국조선업종노동조합협의회 교육선전부장을, 96년 민주금속연맹 교육선전국장을 각각 맡았다. 98년 10월 단병호 전 위원장이 민주노총 위원장이 되면서 중앙 사무총국 교육선전실장으로 파견됐다. 처음부터 언론관련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한번 맡은 사람이 쭉 하다보니 10년째 하게 됐다."
- 민주노총을 취재하는 언론사, 기자 수도 많이 늘었을 텐데.
"언론사 수가 엄청 늘었다. 일단 인터넷언론이 새로 생겼고, 방송의 경우 지상파4사, YTN, iTV, 경제전문 케이블 등 10여개가 넘는다. 97년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노동문제 비중이 커지자 종이신문의 관심도 높아졌다. 지금은 10개 종합지는 기본이고 7개 경제지, 지방지, 외신까지 취재대열에 합류했다. 그동안 거쳐간 기자만 1000여명이 넘는다.
예전에는 <한겨레> 정도만 친노동적 보도를 하던 양태도 달라져 다른 종이신문의 관심이 늘었다. 특히 방송의 노동보도가 가장 많이 변했다. 투쟁 모습만 부각하더니 이제는 '노동자들이 왜 이러는지' 묻고 알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 민주노총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높아진 이유는?
"2002년 말 정부통계에 따르면 민주노총 조합원 수가 68만명, 한국노총은 87만명이다. 더욱이 민주노총은 전교조와 대공장 노조, 언론노조, 사무금융노조 등 파급력이 큰 노조를 두고 있다. 미가입 상태이지만 공무원노조도 민주노총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또 민주노총의 조직력, 투쟁력도 매우 높다. 이러다보니 언론에 많이 나오게 되고 민주노총이 어떻게 할지 주목거리가 된다. 지금은 경제정책은 물론 파병문제 등 웬만한 사회의제에 대해 거의 발언할 정도이지 않은가."
- 그 많은 일을 혼자 한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 현재 조직규모나 언론사 숫자로 보면 최소한 3명의 전담자가 필요하다. 그래야 왜곡보도에 대한 일상적인 점검과 신속한 대응, 정책입안 등을 유기적으로 할 수 있다. 이슈가 터지는 날이면 기자들 전화만 하루 100여통 넘게 받는다. 밤에는 입이 아파서 딸이 뭘 물어도 대답하지 못할 지경이다. 이런 사정은 민주노총 상근자들이 공동으로 겪는 문제이다. 신임 지도부는 대변인제 신설 등을 공약으로 걸었기 때문에 언론사업 분야가 강화될 것으로 본다."
- 제도권 언론에 대한 적응이 쉽지 않았을 텐데.
"'장사한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기자들은 어차피 하루마다 기사를 사야 하는 처지이고, 나는 그 물건을 파는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손님이 훌륭하든 그렇지 않든, 고운 말을 쓰든 아니든, 물건만 팔자고 생각했다. 기자들과 소모전은 가급적 피하면서 관계개선을 꾀했다. 물론 성질대로 하면 상대 못할 기자들이 왜 없겠는가(웃음). 말도 안되는 왜곡보도를 접할 때 화도 많이 났다."
첫 목표, "기자들이 맞지 않도록 하자"
- 대언론창구 역할에도 나름의 목표가 있었을 것 같다.
"초기 방송사 카메라 기자들과 저녁을 먹게 됐는데 허심탄회한 얘기를 많이 나눴다. 그들은 '화면(그림)이 중요하다, 방송은 그림 없으면 못나간다, 우리도 진실을 보도하고 싶고 잘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사진기자, 카메라기자 등으로 시야를 넓혔다. 또 취재현장에서 제발 때리지 말아달라는 기자들 부탁을 받고 첫 목표를 '기자들이 안 맞도록 하자'로 세웠다. 제도언론의 왜곡보도에 대한 분노를 일선 기자에게 푸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최악을 막아 차악의 보도라도 만들자는 생각이었다. 우리 언론환경에서 그같은 영역조차 포기하면 선전홍보할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 흔히 말하는 '조중동' 등 반노동자적이라는 언론사 기자들과의 접촉에 어려움은 없었나.
"민주노총은 2001년부터 대의원대회 결정으로 <조선일보>에 대한 취재와 기고, 인터뷰, 구독을 거부하고 있다. 따라서 조선 기자들을 만나는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다른 언론사 기자들의 경우 취재를 통해 인간적으로 친해진 사람도 많다. 일부 기자들은 진실의 실체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면서 데스크와 노동계의 틈바구니에서 뭔가 방법을 찾으려고 했다. 기자들이 '이상하다'는 제보를 해줘 위원장 검거를 면한 경우도 꽤 있다."
- 언론의 반노동자적 이데올로기는 어디에서 비롯됐다고 보는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언론사의 중심기류가 있는 듯하다. 취재를 거부하는 조선은 그렇다 치고, 우리가 상식적인 주장을 하는데도 <동아>·<중앙>의 논조가 변하지 않는다. 보수언론의 노동보도는 일관되게 '고립→분열→섬멸→확인사살'의 단계를 거친다. 결국 사주 논리가 지배하는 언론사 소유구조에서 문제가 비롯된다. 부자신문은 기사 핵심이 내려오고 기자도 그런 방향으로 쓰지 않으면 어려운 분위기가 팽배해 있는 것 같다. 노동문제를 경제, 치안논리로 바라보는 언론사 상층간부의 낡은 인식도 문제이다. "
- '조중동' 등 보수언론을 설득시키는 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노동운동에는 '노동자를 위해 일한다'는 계급노선과 '열사람이 한걸음'이라는 대중노선의 기본원칙이 있다. 언론사업의 대상은 기자와 소속 언론사이므로 그들 눈높이에 맞춰야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러나 보수언론에 당한 피해가 워낙 큰 노동자들은 기자를 매우 두려워한다.
기자를 직접 상대해보니 매우 조심스러운 인물들이긴 하다. 기자들도 차장급 이하는 386세대로 80년대 민주화를 경험했고, 90학번 기자들도 학생운동을 겪었기 때문에 그들 언어로 설명하면 노동운동 정책이나 논리를 이해할 수 있다. 대중노선 원칙을 언론사업에 적용하려고 노력했다."
- 일각에서는 노동계가 언론개혁에 관심이 적다는 지적도 한다.
"노동운동은 언론에 대해 반감만 있지 정교하게 느끼지 못한다. 또 파업이 끝나면 언론에게 당한 일을 쉽게 잊는다. 안티조선운동만 해도 '왜 조선일보만 공격하느냐'는 논쟁을 치르곤 했다. 민주노총 조합원을 빨치산 특공대 수준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할 수 있는데도 못하는 것처럼 봐서는 안된다. 생존문제로 권리의식을 깨우쳤으나 언론문제 등은 제도권 교육과 보수언론에 세뇌당한 일반 국민과 같을 뿐이다. 노동자들의 사회의식을 높이기 위해 언론교육이 필요하다는 의견에 전폭 공감한다. 그러나 노동계 내부 인사가 노동자 눈높이에 맞춰 교육해야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조선에 대한 취재거부 방침, 변하지 않았다"
- 조선이 지난해 출소한 단병호 전 위원장을 직접 인터뷰해서 논란이 된 적이 있는데?
"조선에 대한 취재거부 방침은 변함이 없다. 그러나 간혹 적용하기 어려운 때도 있다. 지난해 단 전 위원장이 출소해 과천 노동부 기자실을 방문했을 경우가 그렇다. 기자들이 찾아온 게 아니라 우리가 방문을 한 것인데, 조선 기자만 나가라고 할 수 없었다. 다같이 점심을 먹으며 나눈 얘기인데 조선이 인터뷰로 내보냈다."
- 한겨레 등 진보적인 매체에도 아쉬움이 있을 텐데.
"그래도 한겨레다. 노동기사를 발굴해서 보도하려는 노력이 엿보인다. 물론 상설화됐던 노동면이 사라지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다루는 태도라든가 2명의 노동전담 기자가 사실상 1명으로 줄어든 점 등은 안타깝다. 최근 <경향신문>과 <서울신문> <한국일보> 등의 중립적 보도도 눈에 띈다."
- <오마이뉴스> 등 인터넷언론의 노동보도는 어떠한가.
"오마이뉴스 등 인터넷언론의 주요 독자층은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상당히 진보적이지만 노동자에 대한 시각은 엄격하고 때로는 부정적이기까지 하다. 지난해 배달호·김주익·이해남 열사 등 노동자들이 잇따라 자살할 때 그 이유를 생각해봤다. 생계문제, 열악한 처지, 노동운동에 대한 책임감도 있겠지만 그분들은 노동자의 정신세계를 고민하다 결단을 내렸다고 본다.
80년대 김세진·이재호 열사가 사상과 학문의 자유, 민주주의 가치에 대한 신념을 지키려 몸을 던진 이유와 같다. 청춘을 바쳐 노동운동을 했던 그들에게 '노동3권과 노조사수'는 목숨만큼 소중한 신념이다. 하지만 기자 등 지식인들은 노동자 문제에 소홀했고 인터넷언론 역시 그렇다. 생산직 노동자는 인터넷의 정보유통과 공유 과정에서도 소외되고 있다."
- 언론의 노동관련 보도 중 잊을 수 없는 사건을 꼽는다면?
"2002년 12월 <매일경제>가 11번에 걸쳐 내보낸 '한국은 노조공화국' 제하 시리즈와 그 아류격인 이듬해 5월 <중앙일보>의 '지금은 노조시대' 제하 시리즈를 들 수 있다. 악의적인 의도 아래 치밀하게 계획된 두 시리즈는 대표적인 반노동자적 보도이다. 또 지난해 여름 현대자동차 파업 당시 보수언론은 현대차 조합원들이 세계 최고수준의 휴가일수에 5000∼8000만원대 고액연봉을 받는다고 대거 오보를 냈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자존심이 있어서 그런지 틀려도 잘 고쳐주지 않고 책임있게 정정하지 않는다."
- 그동안 경험을 살려 노동전문 기자로 뛰어볼 생각은 없는가(웃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가치에 맞는 일을 하는 게 맞다. 지금 심정으로는 먹고도 살고 노동운동도 계속 하고 이랬으면 좋겠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동안은 단 전 위원장이 감옥에 있고 하니까 도망도 못 가고 자리를 지켰지만, 생계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 노동자의 정치세력화가 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
"한나라당·민주당·열린우리당 등은 같은 점도 있지만 차이도 분명하다. 우리는 현재 정당만으로 정치개혁을 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걸 경험했다. 따라서 가보지 않은 세계이지만 새로운 진보정치 세력을 키우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렇다고 이번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제1당이 되자는 게 아니다. 열린우리당으로만 개혁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는 유권자들은 그 염원만큼 투자하길 바란다. '당신이 한 표를 투자하지 않으면 변화는 오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개혁세력과 진보세력이 앞다퉈 성장해야 우리 시대의 희망이 보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