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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산읍 중도리 금산장에서 만난 할머니, 2002년
ⓒ 양해남
<풍경1>유치원에도 들어가기 전, 내게는 집 앞 골목 말고도 또 하나의 놀이터가 있었으니 바로 공설시장. 손수 농사를 짓던 할머니는 주말이면 당신이 직접 농작물을 시장에 갖고 나가 파셨는데, 그런 할머니를 따라 매번 시끌벅적 흥미진진했던 시장에 따라 나섰다.

손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다를 그치지 않던 아낙들과 거기에 끼어드는 손님. 역시 갖고 나온 농산물 파는 데는 관심이 없는지 저 한쪽에서 몇 순배인지 모를 막걸리를 돌리며 아주머니들 못지않은 수다꽃을 피우고 있는 아저씨들. 지금은 후미진 재래 시장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정겨웠던 장면들. 그때는 그것을 구경하는 것이 그렇게 재밌었다.

<풍경2>아버지 직장을 따라 이사 간 월악산 아래의 한 마을. 비포장 도로를 한참 달려야 갈 수 있는 그 곳은 어린이들에게는 정말 꿈만 같은 곳이었다. 여름이면 '개울에 목욕 가자'고 동네 아이들 예닐곱명이 '빤스' 한 장 걸치고 논두렁길을 활보하고, 겨울이면 비료 포대에 짚 넣어 엉덩이에 불이 날 때까지 눈썰매를 탈 수 있던 곳.

꼬마들은 물론 중학교 1~2학년까지는 거의 1년 내내 그렇게들 보냈다. 그리고 이장 아저씨나 공업사, 구멍가게 아저씨, 그리고 내 아버지 등 아저씨들은 일이 끝나면 동네 어귀에서 윷을 놀았고, 아주머니들은 그 옆 들마루에서 고추를 다듬으며 저녁 노을을 맞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풍경은 그저 기억 속의 한 장면인지도 모른다. 산간 마을임에도 불구하고 도시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면서 이미 옛 고향 집들은 붉은 벽돌 벽에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뀐 지 오래고, 집과 집 사이에는 높다란 담장이 가로놓여 버렸다.

서울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는다. 왁자지껄 수다가 멈추지 않던 재래 시장은 깔끔한 대형 할인마트에 밀려나고 있고, 그나마 남아있던 재래 시장들도 할인마트에 대항하기 위해 '불결하다'는 이유로, 또 '선진화'한다는 이유로 노점상들을 걷어내고 있다.

▲ "무슨 고민이 그렇게 많어. 한 해 만사형통이면 그만이지."
ⓒ 양해남
1965년 금산에서 태어나 줄곧 금산에서 살고 있는 사진가 양해남. 그의 사진집 <우리 동네 사람들>은 지금은 희미해진 시골 장터의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다.

지난 2000년부터 2003년까지 '이른 아침부터 숨찬 자리다툼과 입에 붙어버린 외침들로 시작되는' 금산장을 비롯, 아이들의 웃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려가 사진으로 기록해 온 양해남.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모습을 기억해 주고 있다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라며 "내가 찍은 사진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 나는 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도둑맞은 시간을 즐겁게 돌려주고자" 사진을 찍는다고 말했다.

실제 그의 뷰파인더는 금산 사람들의 가감 없는 삶의 모습을 향하고 있었다.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꼬마들의 살아있는 표정에 집중하느라 아웃 포커싱(사진에서 한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다른 부분은 흐릿하게 하는 것)을 과도하게 이용한 것은 사실이다. 이 때문에 자칫 사진을 보는 이로 하여금 지루함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반어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대상 하나하나의 표정에 더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진 것은 아닐까. 나아가 이 사진들은 표정 그 자체로서가 아닌, 그들 삶의 한 단편을 포착해 낸 것이기에 잔잔한 미소를 짓게 한다. '백 마디 말보다 한 장 사진의 힘이 크다'는 말은 이런 경우 해당되지 않을까.

▲ "고추가 참 좋네요?" "아따, 아주머니 아저씨 것만 하겠어요."
ⓒ 양해남
비록 금산에, 금산장에는 가보지 못했지만, 양해남의 사진 속 표정들을 보고 있으면 금산이라는 곳이 어떤 곳일지 어렴풋하게나마 감지할 수 있다. 난전에서의 거침없는 수다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큰 활력을 가져다주는지, 어째서 깻잎 머리 소녀는 소녀가 아닌 공주로 불려지길 원하는지, “참 좋은 세상이여”라는 말에 “날씨가 좋아서 그렇지, 뭐”하며 대꾸하는 엉뚱함 혹은 여유. 그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동네 사람들'에게 시선을 고정하면 그들과의 느릿하지만 잔잔한 대화를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재래시장을 헤매는 것보다는 근처 대형할인마트에 가서 장을 보는 것이 훨씬 수월한 지금. 그러나 알게 모르게 옛 시골 장터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흘러가는 시간의 양에 비해 커져 가는 너와 나의 벽이 없는 장터에의 그리움 때문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때는 사람들 표정 속에 이미지 컨설턴트가 교육한 미소가 아닌,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웃음들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권기봉 기자의 홈페이지는 (클릭)www.finlandian.com 입니다.


우리 동네 사람들 - 양해남 사진집

양해남 지음, 연장통(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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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기억 저편에 존재하는 근현대 문화유산을 찾아 발걸음을 떼고 있습니다. 저서로 <서울을 거닐며 사라져가는 역사를 만나다>(알마, 2008), <다시, 서울을 걷다>(알마, 2012), <권기봉의 도시산책>(알마, 2015)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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