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밤 11시경 종로 부근 거리는 한산하다. 특히 여성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줄었다. 평소 택시 잡기가 힘든 시간이지만 거리 곳곳에 빈 택시가 줄줄이 서 있다.
회식을 마치고 귀갓길에 나선 박수연(28·회사원)씨는 “요즘 끔찍한 범죄가 많이 일어나 일찍 귀가하는 편”이라면서 “택시를 탈 때도 나이 드신 기사가 모는 개인택시만 골라 탄다”고 말했다.
11일 정오 무렵 서울 강남의 S초등학교 앞이 부산하다. 수십 명의 학부모들이 오전 수업을 마치고 나온 자녀들을 서둘러 승용차에 태웠다. 초등학교 3학년 딸을 마중 나온 학부모 김모(35)씨는 “학교와 집이 가까워도 안심이 되지 않아 계속 마중을 나오고 있다”면서 “학원을 오갈 때도 함께 다녀야하고 불안해서 살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구멍 난 ‘치안’ 비웃는 ‘치한’
이렇듯 민심이 흉흉하다. 여성·어린이 대상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부천 초등학생 2명 피살, 포천 여중생 실종된 후 살해, 40대 여성 보험설계사 실종, 울산 여대생 변사체 발견 등 ‘갈 때까지 가버린’ 범죄가 줄줄이 이어지고 있다.
뒤늦은 치안대책에 부산한 경찰을 비웃듯 강력범죄는 마침표가 없다. 12일 서울 강동구의 한 산부인과를 턴 강도는 간호사들의 나체사진까지 찍는 범죄를 저질렀다.
13일에는 20대 여성이 혼자 사는 집만을 골라 강도짓을 벌인 이모(31)씨가 붙잡혔다. 신촌, 봉천동 일대에서 여론조사도우미로 가장해 강도, 강간을 일삼던 10대 일당도 붙잡혔다.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강력범죄와 연루된 가출·실종사건은 235건이다. 그 중에 38건은 현재까지 미제로 남아 있다. 또한 3206명의 8세 이하 어린이가 실종됐다. 하지만 9세 이상의 실종자 수는 파악조차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토록 여성·어린이 대상 강력범죄가 줄지 않고 있는가. 여성단체 관계자들은 여성에 대한 의식 자체가 낙후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낙후된 의식은 성범죄 관련 특별법이나 가중처벌법 제정을 막는 등 의식과 정책의 입법화 과정을 더디게 만드는 데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것. 법 제도의 보안과 수정 과정에 집중하지 않고 선정적인 보도에 열을 올리는 방송·언론 매체의 태도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높다.
실효성 없는 대책·뒷북 수사 ‘씁쓸’
정부 부처와 경찰의 ‘뒷북행정’도 흔들리는 민심을 붙잡지 못하고 있다. 교육부 학교정책과는 유해업소 밀집지역 출입금지 등의 예방법이 담긴 생활지도 지침을 학교에 내려 보냈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대책의 실효성에 대해 학부모들은 쓴웃음을 짓고 있다.
경찰도 ‘구멍 난 치안’을 메우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지난 9일 경찰청은 서울경찰청의 미아찾기 센터를 경찰청 관할로 옮기고, 센터장을 임명하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경찰서에 미아와 가출신고 수사 강화를 지시하고 형사과에 수사전담반을 지정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러한 대책은 미봉책에 불과할 가능성이 크다. 현행 법령상 8세 이하 미아 외에는 실종자 신고를 해도 즉각 수색에 돌입하기 힘들다. 법령이 그러하니 실종자 처리 전담부서가 있을 리 만무하다.
실종자에 대한 수사가 형식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의 모순을 안고 있는 것이다.
흉악범죄에 떨고 있는 국민들은 경찰을 불신하고 있다. 더 이상 경찰에게 안전을 맡길 수 없다면서 자구책을 마련하기 바쁘다. 보안카메라, 전기충격기 등의 호신용품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으며 TV홈쇼핑에서는 보디가드 상품까지 등장했다.
차분한 인권교육 절실
국민의 개별적인 대비책 외에 국가의 조직적인 대책은 없을까.
익명을 요청한 경찰청 관계자는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현재 경찰인력은 치안 수요에 절대적으로 못 미친다”면서 “인력 증편과 함께 우범지역 폐쇄회로TV를 증설하기 위한 예산을 마련해 사회안전시스템을 확충하고, 만약에 대비한 여성들의 방범 의식도 키워야 한다”고 밝혔다.
이덕화 한국성폭력상담소 간사는 “성범죄에 관한 정책을 조율하고 입법화하는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인식이 현저히 떨어지는 단체와 개인이 여전히 많다”면서 “모든 문제의 대안은 교육에 있다는 점을 깨닫고 인권의 가치를 되새기는 성교육부터 차근차근 펼쳐나가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