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지리산을 열 번 올라본 사람은 이 산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백 번을 가 본 사람은 지리산에 대해 아는 게 없다"고 합니다.
나는 과연 이 산을 몇 번 올라봤을까?
1972년이 시작되던 그해는 엄청 많은 눈이 지리산에 내렸고 바로 그 겨울에 시작한 지리산 등산, 즉 까까머리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시작된 지리산 오르내림의 정확한 횟수를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출발지인 진주에서는 비가 추적 추적 내리던 2월 봄방학의 어느 날 오후에 중산리에는 이미 많은 눈이 내렸고 어둠이 시작되는데도 우리들에게는 교모를 쓴 채로 평상복 그대로 운동화 그대로 손에는 면장갑 한 짝도 없었답니다.
앞서 가던 대학생 형님의 배낭 위에서는 그 당시 유행했던 어느 여가수의 "지나간 여고시절"이 칼바위 골짜기를 메아리 쳤고 그 노래는 함께 가던 일행들의 행진가였습니다.
토요일 오후, 진주에서 막차를 타고 오면 언제나 야간 산행을 해야합니다. 칼바위에서 망바위에 이르는 가파른 산길은 손전등의 행렬로 장관을 이루곤 했지요. 어떤 때는 매주에 한 번씩, 또 어떤 때는 몇 년만에 한 번씩, 이렇다 보니 확실한 횟수는 헤아릴 길이 없지만 햇수로는 30년이 넘었고 어림잡아 한 해에 두세 번씩은 이곳에 오른 것 같습니다.
오늘 지리산을 오르면서 '이런 좋은 날씨는 처음이다'라는 옆 사람들의 감탄사에 별다른 흥감도 없고 오로지 한 발 한 발 힘겨운 걸음을 계속하면서 스스로를 부정해 봅니다. 이건 간밤의 숙취 때문이거니 하고 말입니다.
소싯적의 산행실력을(?) 옆 동료에게 뇌까림은 차라리 핑계인 것 같습니다. 법계사의 옆 마당에 쳤던 무거운 군용 텐트를 새벽 4시경에 걷고 라면 한 그릇을 에너지원으로 하여 한 시간도 채 안되어 지리산 상봉 천왕봉에서 일출을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는 건 지금의 내겐 거짓말 같습니다.
장터목을 지나 세석평전으로 대성동계곡으로 또 신흥으로 해서 쌍계사 주차장까지 거의 뛰다시피 했던 그 시절, 버스에 내려 집에 도착하면 아직도 해가 하늘에 떠 있었던 기억은 지금의 내겐 차라리 고통입니다.
옛날엔 없던 대피소 역할은 법계사 입구의 두 칸짜리 허름한 객사가 했습니다. 방 하나의 정원이 4∼5명쯤 되는데 겨울엔 바깥에 잘 수 없으니 도착하는 인원대로 정원이 됩니다. 마치 요즘의 대피소처럼 말입니다. 인터넷으로 예약을 하라고 목놓아 외치지만 어디 인정이 그렇습니까? 100명 정원의 대피소에 비 예약 등산객이 100명이 더 있다고 하면 이 사람들을 어찌 내칠 수 있단 말입니까? 모로 자는 칼잠, 앉아 자는 앉잠, 등등 예약자와 비예약자의 처지는 매우 평등하지요. 등산객 스스로가 자제하여 돌발산행을 중단하지 않는 한은 말입니다.
산은 말이 없어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오더라도 우선은 받아 주지만 끝내는 그렇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른 때도 그렇지만 특히 해빙기에 오르내리는 산길은 한사람 한사람의 등산화 밑에 그 살점이 많이 묻어 내려옵니다. 길이 미끄러우니 어떤 이는 아이젠을 덧대어 더 많은 살점이 떨어져 내립니다. 밑으로 밑으로.
미끄럽다 보니 지정 등산로를 피해 풀섶이나 나무뿌리를 밟고 오르내리기도 합니다. 산길은 점점 넓어지고 나무뿌리는 사람들의 발 밑에서 제 기능을 상실하니 한 그루 두 그루 고사하고 또 어떤 놈들은 패인 땅에 몸을 지탱할 수가 없어서 작은 바람에도 넘어져 생명을 다하기도 하지요.
이런 걸 방지한다고 만들어 놓은 각종의 계단들은 또 어떻습니까? 일반 건물의 계단도 사람들이 회피하는 것이 보통인데 산에서의 계단들은 차라리 고문 도구에 가깝습니다. 옆으로 내려오는 사람, 뒤로 내려오는 사람, 아예 이 계단을 피해 새로이 등산로를 만들어 내려오는 사람.
지리산의 추억을 이야기하면서 이런 소리를 지껄이다 보니 지난날의 부끄러운 행각들이 생각나 이 자리에서 한가지 고백을 하고자 합니다. 그땐 언제 어디에서나 야영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등산을 할 땐 텐트가 필수장비이니까요.
생각해 보면 세석평전의 철쭉 밭은 아마도 우리들이 다 훼손한 듯싶습니다. 6월 초순쯤에 열리는 <세석철쭉제>에 참가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세석으로 세석으로 진군을 하다 보니 아무리 넓은 세석평전도 그 많던 사람들을 다 받아 줄 수가 있었겠습니까? 한두 해 동안은 괜찮았을지 모르지만 그 많은 세월동안 텐트 한 동의 공간을 내어주기 위해 훼손된 철쭉들이 지금은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세석철쭉이 되고 만 것입니다.
푸르디 푸른 지리산의 아침 하늘 밑에서 산 안개가 이리 저리 휘몰려 다니는 가운데서 철쭉꽃이 온통 세석평전을 뒤덮고 있던 그 장관은 앞으로 영원히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철쭉이 한 그루 없어진 자리에 텐트가 한 동 늘어나고 다음해엔 또 그런 상황이 기하급수적으로 반복되니 오늘에 이르러 처음 세석을 올라 본 사람들은 "저게 뭐 지리산 10경 중의 하나인가?"라는 볼멘 소리를 하곤 하는데 세석의 철쭉을 훼손한 주범이 바로 나를 비롯한 텐트 야영 세대가 아닌가 하여 지친 산행 길에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불평 불만을 늘어놓는 저 사람들을 보며 그 때를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240여명을 수용하는 세석대피소에 느닷없이 비예약 탐방객이 100명이 더 왔습니다. 이 사람들은 "설마 우리를 바깥에 재우겠냐?"는 배짱조 돌발 등산인들 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바깥은 눈보라가 치고 날은 어두워지는데 예약을 못했다 해서 이들을 내칠 수가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지리산의 8개 대피소에서 이런 일이 똑같이 일어나고 햇수를 거듭하여 반복된다면 우리의 지리산은 서서히 그 진가를 잃고 우리를 더 이상 품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