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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2월 15일 금요일 오후 1시 30분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드디어 가는구나, 미국으로. 그것도 유학생의 신분으로 이 비행기를 타게 된 거다. 마흔이 훌쩍 넘어버린 나이에 유학생이라는 이름은 남들에게는 스산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정말 오랫동안 계획하고 갈망하던 길이다.

기내에 들어와서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눈을 감았다. 그동안 유학을 결심하고, 계획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지난 시간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1989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120시간 일정연수를 받을 때였다. 지금은 그 교수님의 이름이나 강좌명도 기억나지 않지만 교수님께서 EFL/ESL,TEFL/TESL의 텀(term) 정도의 차이점을 설명하셨던 것 같다.

교수님은 한국의 영어교육에 제대로 된 이론적 배경이나 연구가 부족한 것을 언급하면서 "이쪽 방면은 황무지와 같으니 현장에서 영어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여러분들이 문제의식을 갖고 도전해야 한다"는 격려와 충고까지 덧붙이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후 그것은 언젠가는 꼭 제출해야 하는 과제물처럼 교사 생활 내내 나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고 동시에 기대감으로 다가왔다.

굳이 5차, 6차, 7차 교육과정이 바뀔 때가 아니더라도 영어 교사들은 한시도 마음 편한 적이 없을 것이다. 영어로 수업하는 교육은 줄기차게 늘 강조되어왔고, 기존의 문법 번역위주의 주입식 교육 방법은 엄청난 비난을 받아왔다. 그 한 가운데 영어 교사들은 한국의 피폐된 영어 교육의 책임자로 늘 죄인처럼 서 있어야 했다.

나이가 지긋하신 선생님들께서는 묘한 패배감으로 뒷짐을 지어야 했고 토익 세대·해외 연수 세대인 젊은 선생님들은 현장에서 부딪치는 괴리감 속에서 고민을 해야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가. 그 양쪽 어느 그룹에도 속할 수 없는 어정쩡한 세대였다.

새로 무엇을 시도하기에는 벅찼고 숨이 가빴다. 집으로 돌아가면 아이들의 가사일로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지만 일단 학교로 돌아가면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은 싫다는 내부의 절규가 마음을 짓눌러왔다.

3년 프로젝트

1997년도에 그동안 근무하던 학교에서 현재의 학교(부평여고)로 전근을 오게 되었고 이 학교에서 첫 월급을 타자마자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은행에 가서 내 이름으로 3년 만기 적금을 붓기 시작했다. 내 프로젝트의 첫 단추를 꿴 것이다. 구체적인 프로젝트는 서 있지 않았지만 어쨌든 무엇을 시도하려면 돈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스스로에 대한 결단의 한 증거물이기도 했다. 그렇지 않은가. 가정을 갖고 있는 여자의 입장에서 목돈을 자기 개인의 용도로 쓴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 해 뉴욕 출신의 원어민 교사가 에픽(EPIK: English Program in Korea) 일환으로 우리 학교에 배치되었고 그와 관련된 업무를 내가 맡게 되었다. 그 원어민 교사의 이름은 '메기'였는데 이름이 우리나라 민물고기 메기하고 발음이 비슷해서 우리 선생님들이 재미있어 했던 기억이 난다.

네 사람이 쓰는 작은 사무실에서 나를 포함한 한국인 교사 세 명과 메기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메기는 뉴욕주립대에서 TESOL을 전공한 전형적인 깍쟁이 뉴요커였는데 초반에는 열정적으로 깔끔하게 수업을 진행해 나갔다.

그의 수업을 참관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나의 부러움의 대상이자 자극제가 되었다. 공문에 의하면 코 티칭(Co-teaching) 형식, 즉 한국인 교사가 주로 수업을 진행하고 원어민 교사가 보조교사로 수업을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계획조차도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업무지침이었다. 코 티칭이 제대로 되려면 영어 교사들의 영어 구사력이 거의 원어민 수준 정도는 되어야 함은 물론이고 엄청난 시간투자를 해야했다. 그래야 1시간분의 수업이 겨우 완성될 수 있다.

게다가 메기는 1학년, 2학년을 격주로 들어가야 했고 그러다보니 한번 들어갔던 반 학생들을 다시 만나려면 보름 정도의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적어도 학생들의 이름 정도는 숙지하면서 개인성(individual)을 중요하게 여겼던 메기는 연속성 없는 이런 식의 수업 방법을 가장 싫어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의사소통 중심의 영어교육 특히, 말하기 능력 향상 배양과 현 입시제도의 경향과 교육과정에서 제시하고 있는 영어교육 목표 사이의 갭이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더운 여름이 지나고 선선한 바람이 불 무렵 한국은 불행하게도 IMF라는 경제난국에 빠지게 되었다. 점점 원어민들이 받는 월급의 액수가 환율 폭등으로 계약 당시의 절반가량 정도의 가치밖에 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메기는 수업을 소홀히 하고 쉬는 시간만 되면 학교를 제 마음대로 벗어나곤 했다.

원어민 교사 '메기' 선생님

그런 그녀에게 학교의 규칙과 계약서를 충분히 이행할 것을 말했지만 나의 언어 전달 능력 부족과 상황을 바라보는 입장차, 문화의 차이가 서로의 관계를 악화시켰고 나는 스스로의 열등감에 괴로워했다.

"You are supposed to stay at school until 5 o'clock"(메기는 5시까지 학교에 있기로 돼 있어요) 라고 내가 말하자 메기는 이렇게 답변했다.

"'Be supposed to' means I don't have to stay at school until 5 o'clock, Right?(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것이 꼭 5시까지 학교에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메기는 말의 미묘한 차이를 이용하면서 냉소적으로 이렇게 말장난을 하곤 했다. 순발력 있게 받아칠 수 있는 언어 전달 능력 (Oral Proficiency) 부족과 IMF라는 외적인 최악의 요소는 나로 하여금 메기에게 좋은 동료도, 이해자도, 통역자도 되지 못하게 했다.

1998년 1월 말이었던가. 007작전이 무색할 정도로 그녀는 한국을 말 한마디 없이 떠나버렸다. 엄밀하게 말하면 계약을 위반하고 야반도주한 셈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이해타산이 맞지 않으면 미련 없이 떠나버리는 철새와도 같은 사람들이다.

한국의 영어 교육은 우리들 자신, 우리 영어 교사들이 주도적으로 고민하면서 열정적으로 부딪칠 때 희망이 있다고 본다. 원어민 교사 메기를 비난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나에게 어쩌면 확고한 유학의 동기부여를 안기고 떠났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EBS 영어회화 프로그램을 보고 있는데 '조나단'이라는 외국인이 숙명여대 TESOL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장면이 나왔다. 순간 쾌재를 불렀고 서둘러 정보를 얻어서 그 과정에 등록을 하였다 1999년, 6개월 집중적으로 하는 단기코스(Intensive Course)에 등록했다. 인천에서 서울로 공부하러 올라가는 수요일과 토요일은 비록 몸은 고단했어도 힘든 것을 모르고 수업을 받았었다.

경기도 저 끝, 심지어 충청도에서 기차나 비행기를 타고 와서 수업을 수강하는 선생님들도 있었고, S사대 부속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나이 지긋한 선생님은 종종 수업 시간에 코를 골면서 졸았기 때문에 옆에서 보기에 민망한 적이 많았지만 그런 모습조차도 영어 교사들의 애환과 열정인 듯 싶어 마음이 짠했다.

이 과정이 끝나갈 무렵 내 마음에는 미국에 가서 공부하고 싶다는 걷잡을 수 없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흠뻑 영어에 노출되고 싶다. 잘 가르치고 싶다.'

어느 시인의 시 제목처럼 차라리 타는 목마름이었다.

본격적인 유학준비 계획을 세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동안 남편에게는 충분히 세뇌교육을 시켰다고 생각했는데도 막상 아이들을 남편한테 맡기고 미국에 2~3년 정도 혼자 공부하러 나갔다 오겠다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3학년 담임을 한해 더 해달라는 교감 선생님의 강권이 이어졌다. 그동안 생각했던 계획을 말씀드리면서 고사했지만 12월에 유학 떠나는 것을 이해해준다는 범위 내에서 고3진학 지도와 나의 유학준비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물밑에서 생각으로만 머물던 때와 그것을 입밖으로 끌어내서 누군가에게 공표하는 것은 그 무게가 본질적으로 달랐다. 필사적인 생각이 들었다. 9월로 접어들면서 정신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토플시험, 학교선정, 입학 허가서를 받기 위한 준비 등등 뭐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

아이들과 함께 유학가다

그러던 중 6개월 전에 미국에 나가서 공부하고 있다는 영어선생님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 선생님과 여러 가지를 전화로 상의하게 되었다. 그 선생님은 아이들(그 당시 딸아이는 중학교 1학년, 둘째는 초등학교 3학년)을 미국에 데리고 갈 계획이 없다는 말에 상당히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 선생님은 "조기 해외유학이니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아이들을 해외로 내보내려는 상황"이라며 "합법적으로 미국에서 머물면서 거의 무료인 공립학교에서 아이들을 공부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권유했다.

부모가 유학생인 경우(F1비자)와 주재원(J1비자)인 경우 직계자녀(각각 F2비자/J2비자)는 부모의 비자가 유효한 기간 내에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었다. 추석이 지나서야 남편과 의논한 끝에 아이들도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친정 부모님들은 내가 공부하러 미국에 간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했지만 남편 다음으로 가장 큰 힘이 되어주셨다. 미국으로 가는 준비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는데도 교육청으로부터 정식 유학허가가 나오지 않아서 12월 초까지 무진장 애를 태웠다.

비행기 티켓 날짜는 12월 15일이었는데 교육청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 그로부터 4일 뒤였으니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정처리였다.

게다가 떠나기 바로 전날까지도 학생들과 대학입학 상담을 하느라 늦은 시간까지 학교에 있어야 했다. 대학 입학 결과며 졸업식 마무리를 못하고 가는 빚진 내 마음의 작은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여러 사람들이 스쳤다. 걱정과 자랑스러움이 엇갈린 친정 부모님의 얼굴 표정, 마지막 짐을 마무리해서 부치는 순간까지도 스산한 본인의 마음을 열어 보일 여유가 없었던 남편, 부러움을 아끼지 않고 드러내 보이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던 새언니들, 현관까지 나와서 배웅해주던 동료 선생님들, 찬바람이 일 정도로 야멸치게 말씀을 아끼시던 교장 선생님.

내게 우호적이었던 사람들이든 아니든 어쨌든 그들의 곁을 잠시나마 떠나서 이제서부터 모든 것을 나 혼자 결정하고 해결해야 한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1996년도 시교육청에서 영어교육을 위한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진행한 7주일간의 배낭여행에 따라가 본 게 전부였다. 그런 미지의 세계에서 내가 책임져야 할 두 아이를 생각하니 두려움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슬며시 눈을 떠보니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김포공항 로비에서(지금은 국제공항이 인천 영종도로 이전되었지만 그 당시만 해도 국제선, 국내선이 다 김포공항에 있었다) 아빠만을 한국에 혼자 남겨두고 간다는 사실 때문에 고개도 들지 못하고 소리 없이 울던 아들 현근이는 무엇이 즐거운지 누나에게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사십이 넘은 늦깎이 유학생의 첫걸음을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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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교육현장에서 일하고 있음 좀 더 따뜻한 세상을 꿈꾸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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