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충남 태안군 태안읍 남산리에 소재하는 태안천주교회 공동묘지에는 내 선친의 묘도 있다. 태안천주교회 최초 신자에다가 초창기 최고 공로자이지만, 순서 원칙에 따라 맨 위로부터 두 번째 줄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선친 묘의 한 옆에는 약간의 공간이 있는데, 그곳은 내 어머니께서 묻히실 자리다. 선친의 유해를 모실 때 미리 어머니의 묘 자리를 예약해 놓았던 것이다.

선친의 유해를 선산에다 모시지 않고 교회 공동묘지에 모신 것은 아버님의 유언에 의해서다. 증조와 조부모, 그리고 백부모님들의 묘가 있는 선산을 피하고 교회 공동묘지에 아버님을 모시는 데는 사촌 형님들과의 약간의 갈등도 있었다. 아버님의 유언을 지키려는 내 고집에 양보를 해준 사촌 형님들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한다.

교회 공동묘지에 가서 아버님의 묘소를 뵐 때마다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다. 내 아버님은 평생 동안 한 평의 땅도 가져보지 못하고 사신 분이다. 유산으로 많은 땅을 가질 수도 있는 조건을 안고 태어나신 분이었건만….

내 조부님 때까지만 해도 땅을 많이 가진 부농이었다고 한다. 내 증조부께서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제법 많은 돈을 바치고 통정대부라는 작호를 받으셨다고 하니, 내 아버님은 어느 정도 조상 덕도 부모 덕도 안고 태어나신 분이었다.

하지만 조실부모를 한 탓에 가산이 빠르게 모두 유실되고, 내 선친은 소년 시절부터 부모 잃은 설움에다가 남의 집 머슴살이까지 하는 가난의 설움을 온몸으로 겪어야 했다.

내 선친이 이승의 삶을 마감하신 집은 태안읍 남문리 485번지 옴팡집이었다. 선친 사후에 등기부등본을 떼어보니 등기도 되어 있지 않은 집이었다. 지적도 상에만 올라 있는 땅도 고작 15평이었다. 물론 그 15평도 아버지의 땅이 아니었던 셈이다.

평생을 땅 한 평 가져보지 못하고 사신 내 아버님이 이승을 떠나 유해로 남아 누워 있는 두 평 남짓한 땅도 아버님의 땅이 아니다. 당신이 생전에 지니고 있던 땅이 아닌, 교회 공동묘지에 속한 땅인 것이다.

그런 아버님을 본받자고 해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 역시 단 한 평의 땅도 갖고 있지 못하다. 이 중년 세월에 이르도록 내 땅을 가져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잠시도 없다. 지금 살고 있는 23평 연립주택이 유일한 부동산인데, 이 연립주택에 딸려 있는 땅도 공동 소유이지 내 개인 땅이 아니다. (내년쯤 평수를 넓혀 이사가게 될 새 집도 아파트다.)

나도 아버님처럼 한 평의 땅도 가져보지 않고 살다가 이승을 하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모호한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땅을 갖지 않은 것이 어쩌면 하느님 앞에서 중요한 가난의 증표가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가난의 증표야말로 하느님 앞에서는 중요한 보따리가 될지도 모르는데, 굶주리지도 헐벗지도 않은 내가 무엇으로 가난의 증표를 보여 드리나…. 한 번도 땅을 가져보지 않은 것으로 가난의 표징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내가 설혹 많은 돈을 얻는다 하더라도 결코 땅을 장만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집을 짓고, 그 집에 딸린 최소한의 땅은 소유한다고 하더라도, 가외 땅은 절대로 소유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가외 땅을, 그리고 자신이 직접 농사짓지도 않을 농지를 소유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다른 것들은 몰라도, 땅만큼은 하느님의 소유로 남겨놓아야지, 자연 자체이고 일부인 땅마저도 금을 긋고 갈라서 인간의 소유로 삼는다는 것은 분명 신에 대한 불경이요 죄가 되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내가 한 평의 땅도 갖지 않고 이승을 살았으니 죽어서도(내 유해마저도) 땅을 차지하지 않은 상태를 만드는 것도 좋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평생 한 평의 땅도 가져보지 못하고 이승을 사신 내 아버님은 유해가 되어서는 두 평 남짓한 땅을 차지하고 누워 계시지만, 나는 그것조차 기피하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는 내가 난마 같은 곡절 속에서 참으로 힘든 시련을 겪던 시절이었다. 남의 사업에 이름을 빌려주고 돈을 얻어주고 보증을 서주고 집을 담보제공까지 해준 탓에 매월 200만원씩 빚잔치를 하는 것도 부족해서 이런저런 수만 가지 곤경을 감내해야 했다.

이러다가 내가 쓰러져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하곤 했다. 만약 지금 죽는다면 하느님께 무엇을 가지고 가나. 실은 그것이 가장 큰 두려움이었다. 그 두려움 속에서도 별빛처럼 떠오르는 생각들이 있었다. 성서 안에서 만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사랑'에 관한 가르침들이었다.

비록 이승에서 벗이나 이웃을 위해 목숨까지 바치는 것은 아니더라도, 죽은 후에라도 남들을 위해 내 몸을 내주는 것도 하느님 앞에 가지고 갈 만한 선행 목록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어찌 보면 남들을 위한 순수한 사랑의 실천이 아니고 죽은 다음의 내 영혼을 미리 챙기기 위한 일종의 '이기심'의 발로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마침내 1995년 '안구 기증'과 '장기 기증'에 이어 '시신 기증'까지 실행하여 등록증들을 교부받았다. 이 세 가지 실행에는 아내도 기꺼이 동참을 해주었다.

그러니까 우리 부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죽어서 묻힐 땅마저도 전혀 필요가 없게 된 상태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한 평의 땅도 갖지 않은 상태를 이룰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지난 8일 주일 성당에서 연령회 총회를 마치고 한 음식점으로 이동하여 점심 식사를 할 때 나는 노인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는 회원들께 내 시신 기증 사실을 공개하고,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장으로부터 발급 받은 '시신기증등록증'을 보여 주었다.

일면 자랑으로 보여질 수도 있겠지만, 묘지에 의한 국토잠식 문제를 깊이 우려해야 하는 현 상황에서는, 그리고 시신 기증 역시 '사랑'의 범주에 들 수 있는 것이고 교우들에게 장려를 해도 좋은 것이라면, 자랑처럼 공개를 해도 나쁘지는 않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