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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안에 틀어놓은 가습기를 바라본다. 하얀 가습기에서 조그만 물방울들이 뽀얗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조그맣고 하얀 입자들이 가습기의 입구 언저리를 뽀얗게 물들이고 있다. 그리고 서서히 멀어져 가면서 그 하얀 줄기의 모양들이 사라져간다. 하나 둘씩 흩어져서 방안 구석구석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그래서 건조한 이 방에다 습기를 더하게 되는 것이다.

요즘은 가습기가 뿜어내는 물방울 입자의 크기를 중요시한다. 더욱 작은 입자를 뿜어내는 가습기일수록 사람의 폐의 깊은 곳까지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론상으로는 입자의 크기가 0.5μ 이하가 되어야만 모세 기관지에 도달되어 효과를 본다고 한다. 0.5μ 이하라면 1mm의 200분의 1의 직경이 되어야 한다. 얼마나 작은 크기인가.

그렇게 수없이 많은 작은 것들이 보이지 않게 내 주변에 흩어져 있으면서 나를 보호해 주고 있다. 나는 단지 가습기의 단추를 누르고 그 입구에서 뿜어 나오는 하얀 김의 줄기를 바라볼 뿐인데 말이다.

그러나 가습기 안에 있는 물이 그렇게 작은 입자가 되어서 흩어져 간다. 또 반대로 그렇게 작은 입자들이 모이고 또 모여서 증기를 만들고 구름이 된다. 그래서 우리의 머리 위에 빗방울을 떨어뜨리고, 때로는 세상을 삼키는 홍수를 만들기도 한다. 그것이 엄연한 자연의 법칙이다.

저 작은 입자 하나에 이 방은 과연 얼마나 큰 세상일까. 키 180인 내가 망망대해를, 혹은 컴컴한 우주를 헤치고 떠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크기의 어마어마한 규모의 세상이 아닐까. 과연 저 작은 입자들이 얼마나 많이 모이고 또 모여야 구름을 만들고 비를 내리게 될까. 가습기에서 뿜어 나오는 자그만 물방울에서 시작된 나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는 이 방안에서 세상을 생각한다. 세상에는 약 60억 명. 혹은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각자 저마다 고통과 저마다 즐거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고통과 즐거움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다. 세상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좁아져가고 있고, 60억이라는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겪는 삶의 모양도 갈수록 비슷해지고 있다. 여러 곳에 다른 모습으로 흩어진 사람들이 서로 같은 이유의 고통과 같은 이유의 즐거움을 함께 공유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의 세상이다.

저 조그마한 입자들이 모여서 비를 만들고 세상을 시원하게 씻어 내린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수증기들이 모여야 세상을 시원하게 씻어 내릴만한 비를 만들 수가 있을까. 한갓 조그만 미물에 불과한 사람들이지만 서로 조금씩 힘을 합치고 노력하면 세상을 바꿀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야 세상을 지배하는 이 거대한 힘에 맞서서 세상을 깨끗하게 씻어 내릴 수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창밖으로 하늘을 쳐다본다. 그리고 푸른 하늘에 흘러가는 하얀 구름을 바라본다. 저 구름의 모양은 과연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늘에 구름 한점 없이 티 없이 맑기 만한 하늘을 쳐다보는 것보다는 한점의 구름이 있는 하늘을 바라보는 재미가 훨씬 낫지 않은가? 망망한 대해를 바라보는 것처럼 며칠씩 끝없이 푸른 바다만 바라본다면 그 느낌이 과연 어떨까. 어쩌면 나는 지겨워서 아예 그 하늘은 바라보지도 않게 될 것이다.

어쩌면 몇몇 사람들이 모여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단 한 방울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물방울 입자들이 모이고 또 모여야만 할 것이다. 하물며 세상을 깨끗하게 씻어 내리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물방울이 필요할까.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의식과 힘을 합쳐야만 가능할 것인가.

세상은 항상 시끄럽고 출렁이고 있다. 그러나 그 소리들을 들어보면 대부분 서로 합칠 수 없는 잡음들로 가득 차 있을 뿐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처지에서만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거대한 비구름을 만들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죽이고 상대 의견을 존중해 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래서 이 세상을 시원한 물줄기로 씻어줄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가습기 곁에서 그런 생각들을 이어나간다. ‘정말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야’ 생떽쥐베리의 어린왕자에서 이런 글을 읽은 것 같다. 감추어진 것, 자그마한 것, 그래서 평소 눈에 띄지 않는 것, 내 곁에 있으면서도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 어쩌면 그런 것이 눈물나게 소중한 것인지 모른다. 나의 하루의 삶. 어제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은 오늘의 삶이 어쩌면 눈물나게 소중한 삶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60억 명이라는 거대한 사람들 중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아무 것도 아닌 것은 아니다. 나는 둘도 없이 소중하고 귀중한 존재다. 나의 존재 방식이 나에게뿐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그렇게 느껴질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들은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는 없는 것일까. 겨울의 막바지, 가습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입자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스스로 위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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