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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5일은 <조선일보> 생일이다. 적어도 자기 생일만큼은 거짓을 읊조리지 않고 조신하게 넘어갈 수는 없을까? 잔칫날까지 궂은소리를 하는 게 동양의 미덕은 아니기에 부질없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생일날 사설 ‘포위된 독립言論(언론)과 대의민주주의의 위기’는 참으로 가관이다. ‘언론’으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주제에 ‘독립언론’이라기에 하는 말이다.
이 사설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이들이 지적을 했으므로 주목하지 않은 한 가지만 짚기로 한다. 노무현 정부를 공격하는 데 흔히 등장하는 ‘포퓰리즘’에 대한 것이다. 포퓰리즘(Populism)의 사전적 의미는 다양하다.
미국 역사에서의 인민당의 주의(정책), 러시아 역사에서의 러시아 인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 만인 평등주의, 대중의 주장이나 찬양 등등. 부정적인 의미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를 오독하면서 조선이 사용하는 의미는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행태’로서 매우 부정적으로 읽힌다. 인민 대중의 뜻에 따르는 정책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사설의 관련부분을 보자.
“그 결과 지난 1년의 국정 운영은 경제·사회·교육 정책은 말할 것도 없고 외교·안보 정책까지 포퓰리즘에 오염돼 있다. 지금 이 나라의 현실은 무대 위의 소수 기획자(企劃者)와 무대 아래의 군중이 결합한 포퓰리즘의 결말이 무엇인가를 다시 확인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국민 대중의 의식 수준을 무시하는 오만한 발상이다. 나는 오히려 노무현 정부가 진정한 포퓰리즘을 확실하게 실천해주기를 고대한다. 포퓰리즘에 오염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렇지 못한 점에 대해서는 불만이 많다.
대중의 주장에 역행했던 네이스(NEIS) 사태나 부안 핵 폐기장 사태, 이라크 파병, 대미 정책 등을 돌이켜볼 때 포퓰리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객관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노무현 정부의 모든 정책을 무조건 포퓰리즘으로 몰아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추방해야 할 못된 포퓰리즘이다.
비슷한 현상에 대해서도 다른 대상에 대해서는 포퓰리즘이라 하지 않고 ‘여론정치’로 추켜세운다. 이게 바로 <조선일보>의 진면목이다. 조선은 ‘中華帝國(중화제국)’을 기획특집 시리즈로 연재하고 있는데, 2월 12일자 제목이 <중국의 새로운 파워는 ‘여론정치’서 나온다>였다. 여론정치라는 게 다름 아닌 포퓰리즘이다. 왜 노무현 정부는 포퓰리즘이며, 중국 정부는 여론정치인가? 이중 잣대가 아닐 수 없다.
중간제목을 보자. ‘국민에 군림하는 1인 통치시대 끝나 / 연예계 스타처럼 친밀한 지도자가 인기 / 장쩌민, 네티즌 반대로 국가행사 불참도’. 지난해 10월 장쩌민 중앙군사위 주석진영은, 장 주석이 우주선 발사 행사에 참석할 것이라는 소문을 흘렸다가 네티즌들의 반대 여론이 심상치 않자 조용히 취소했다고 한다. 여론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왜 대한민국 네티즌들의 의견은 “군중(群衆)들의 돌팔매”요, 포퓰리즘인 반면에, 중국 네티즌들의 의견은 여론이고 여론정치일까?
이 기사는 중국의 왕창장 정당연구센터 주임의 인터뷰를 곁들였다. 그는 ‘친민(親民)정책은 과거 정책과 무슨 차이가 있나?’라는 질문에 “친민정책은 사회변화에 적응하기 위한 인민 우선 정책이다. 최근 민주와 참여에 대한 인민들의 요구가 급속히 증가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구소련과 일본, 대만의 집권당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이들은 경제상황이 나빠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공산당의 존립 의미를 고심한 결과 결국 인민을 위해 정치하고 인민에게 더 많은 관심을 쏟아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대답했다.
아마 노무현 대통령이 이처럼 말했다면 조선은 바로 포퓰리즘이라고 공격했을 것이다. 포퓰리즘과 친민정책이 다른 게 아니다. 왕 주임이 설명한 중국의 사회변화도 지금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국민들의 참여 욕구가 고조돼 있으며, 권위주의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노무현 정부는 이러한 사회변화에 부응한다는 의미에서 참여정부라 명명했다. 지금 국민들은 조선일보식의 포퓰리즘에 대한 우려가 아니라 보다 철저한 포퓰리즘의 실천을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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