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기슭에 펼쳐지는 오름은 산세가 우거져 산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더욱이 한라산 등성이를 타고 내려오는 '법정이 오름'은 '무오법정사'가 자리잡고 있어 사람의 마음을 깊고 심오하게 만든다.
제주시에서 99번 도로를 타고 가노라면 깊은 산 속의 매력에 도취되어 시간 가는 줄을 모른다. 그만큼 산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역경과 고난, 힘들고 멍들어 가는 가슴을 보듬어 주고 있다.
해발 760m의 법정이 오름에 터를 잡은 '무오법정사.' 무오법정사 입구에 놓여 있는 큰 돌 2개는 마치 수호신처럼 중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늘 사찰을 방문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나는 무슨 죄를 많이 지었는지 고개가 저절로 숙여 진다. 그래서일까? 비록 외관상이라도 흐트러짐이 없게 하기 위해 다시 한번 옷차림을 가다듬고 마음을 정리하게 된다.그리고 또 하나, 현실에서 숨조차 제대로 쉴 사이 없이 뛰어다니다가도, 왠지 사찰에만 오면 느긋해지는 여유를 찾게 된다.
무오법정사 입구에 들어서자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법정이 오름의 허리를 감싸 안는다. 무오법정사를 지키는 신도 한분이 이제 막 부처님 전에 공양을 올리기 위해 불을 지피고 계셨다. 무오법정사의 산사는 너무나 조용해서 발자국을 옮길 때마다 "뚜벅뚜벅" 소리가 났다.
사찰을 방문했을 때 주지 스님을 뵙는 일은 아주 큰 행운이다. " 스님 계세요"라고 묻자 나이든 신도는 "감기로 병원에…"라며 머뭇거린다. 이처럼 깊은 산 속 산사에서 만나는 사람과의 인연은 반갑기고 하고 길이라도 물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보살님! 대웅전이 어디있습니까?"라고 묻자, 손가락으로 위치만 가리킨다. "예? 어디 마심?" 서투른 제주도 사투리라도 이곳에서는 써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서투른 사투리를 동원하여 다시 물어 본다. "저기, 마시!"
그러고 보니 계단 위에 자리잡고 있는 슬레이트 집의 지붕이 보였다. "저게 대웅전인가?" 혼자 푸념이라도 하듯 머뭇거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무오법정사는 항일 운동의 성지로, 일제하 항일 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이기에 후세들이 잘 정비되어 관리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굴뚝에서 피어 나는 연기만큼이나 가슴속에 와닿는 곳은 무오법정사 입구에 놓여 있는 이끼 낀 주춧돌이었다. 유일하게 흔적으로 남아있는 주춧돌. 그 주춧돌은 세월의 연륜을 말해 주는 듯, 파릇파릇 이끼 낀 상태로 망부석처럼 말이 없었다. 그 이끼 낀 주춧돌에서는 애국심이 묻어 있는 듯했다.
대웅전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한라산에서 떨어진 낙엽이 모두 모여 있는 것처럼, 해묵은 낙엽이 뒹굴고 있었다. 정말이지, 뚜벅뚜벅 계단을 따라 올라가니 한라산 산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산행의 기분이 들었다.
지붕을 온통 기와로 덮어씌운 대웅전을 생각하는 내가 세속의 때를 벗기지 못한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부처님께 삼배를 올렸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내가 가야할 깨달음의 경지는 어디인지 모르겠다.
부처님 옆에는 중생들의 소원을 담은 등불이 그나마 대웅전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법당 안에 놓여 있는 북을 보자, 언젠가 49제 때 들었던 회심곡의 가사가 생각이 났다.
"세상천지 만물 중에 사람에서 또 있는가. 이 보시오, 시주님네 이 내 말씀 들어보오. 이 세상 나온 사람 뉘 덕으로 나왔었나. 불보살님 은덕으로 아버님 전 뼈를 타고." '내세의 인과응보'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다.
무오법정사는 해발 760m의 법정이 오름에 터를 잡은 절로 법정사가 세워진 것은 1900년 이후이다. 이 법정사는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하여 수탈과 착취를 저지른 만행에 맞섰던 선각자들의 항일운동 중심지였다.
3·1운동 이전 일제에 항거한 전국 최대 규모의 단일 투쟁일 뿐만 아니라 제주도 최초·최대 거사라는 점에서 항일 운동사의 시발점으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무오법정사는 1918년 10월 김연일, 강창규, 방동화 등이 주축이 되어 400여명의 주민이 참여한 대규모 항일항쟁을 벌였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건물 흔적과 주춧돌이 당시 불교 신도들이 어떻게 일본의 수탈과 착취에 맞서 왔는지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흔적을 찾기에는 너무 아쉬움이 많았다.
대웅전 옆에 자리한 사찰의 종을 보며 그 여운을 느껴본다. 사찰의 종소리는 왜 그렇게 긴 여운으로 남게 되는지 모르겠다.
항상 대웅전보다 높게 자리잡고 있는 삼성각이다. 허름한 삼성각 안에는 촛불만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이 촛불은 당시 민족 해방을 염원했던 투쟁의 아픔을 알고 있는지.
이에 서귀포시에서는 이곳을 서귀포 70경 중의 한 곳으로 지정했으며, 법정사 일대는 항일항쟁의 성지로 조성될 예정이다. 이미 진입로 개설됐으나, 당시 항일운동의 성지로서의 흔적을 제대로 읽을 수 없어 그 복원에 대한 아쉬움이 빈자리로 남겨졌다. 그러나 서귀포시에서 앞으로 위패 봉안소와 상징탑을 조성한다 하니, 항일 운동의 성지로 역사적 의미가 있는 곳으로 알려졌으면 좋겠다.
대웅전 앞으로 이어진 계단을 따라 내려가니 법정악을 타고 내려오는 계곡의 운치에 잠시 넋을 잃었다. 조금은 추웠지만 잠시 계곡의 바위에 걸터앉아 있으니 세상 속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이 계곡에 앉아 있으니 왠지 애절한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그것은 당시 민족해방을 염원한 단일 투쟁의 의미가 곁들여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아픔이 배어 있는 곳. 이를 아는지, 여기저기 흩어진 동글동글한 돌들이 골짜기를 가득 채웠다. 무오법정사는 일제하 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된 곳으로서, 제주도 최초·최대 거사라는 역사적 의미가 있는 역사 유적 자원이다.
덧붙이는 글 | 무오법정사는 서귀포시가 지정한 서귀포 70경 중의 한 곳입니다.
찾아가는 길은 제주시-1100도로(99번 도로)- 어리목-영실-서귀포 자연휴양림-무오법정사로 약 1시간 정도가 소요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