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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노보> 6일자에 실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싶었다"라는 제목의 글.
<조선노보> 6일자에 실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싶었다"라는 제목의 글. ⓒ 조선노보 PDF

<조선일보>에 '변화의 봄'은 올 것인가. 조선일보 스스로의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내부에서 잇따라 나오고 있다.

특히 일선 기자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토론의 물꼬를 트고 있어 주목된다. 기자들은 긴 침묵을 깬 것 만큼이나 조선일보 과거사는 물론 지금 처한 현실과 문제점, 진로 등에 대해 매우 솔직한 생각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때론 내부를 향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고 내놓았다. 내부 자성을 촉구할 때는 '안티조선' 만큼이나 격렬하다.

또 이같은 움직임과 맞물려 방상훈 사장의 다소 이례적인 언행 역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간 외부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던 것과 달리 최근 외부 매체와 인터뷰를 갖는가 하면, 예민한 주제에 대한 입장도 분명히 밝히고 나섰다.

방 사장은 5일 창간 84주년 기념사에서 이념의 중재자로서 '열린 신문', 유연성을 갖춘 신문, 상명하복을 벗어난 수평적인 문화를 가진 조직으로의 탈바꿈을 주문했다. 현장기자들에게는 변화를 적극 수용하고, 사회집단의 작은 목소리에 겸허하게 귀기울일 것을 강조하기도 했다.

방 사장은 이보다 앞서 지난 3일 <기자협회보>와의 인터뷰에서 과거사 청산과 관련, "지나가는 과거에 집착하면 발전이 없다"면서 "친일행적이 있다면 검증을 거쳐 공개하겠다"고 언급해 상당히 전향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런 과정에서 입사 7년차의 젊은 기자가 "'나라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선언은 과잉"이라며 9년차 선배인 이선민 기자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방 사장이 "조선일보는 시끌벅적한 신문사가 돼야 한다, 어떤 조직이건 '노'라고 말하는 사람이 적어도 20%는 있어야 건강하다"고 선언한지 하루 만의 일이다.

한편, 이선민 기자는 지난달 27일자 노보에 "조선일보는 다시 사회와 민족을 이끄는 역할을 되찾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새로운 보수'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요지의 기고를 실었다

"눈이 있다면 우리안의 '수술부위'를 찾아야"

국제부 소속인 전병근 기자는 6일자 노보에서 "진작부터 '임금님은 벌거숭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싶었다"며 입사 뒤 느꼈던 소회와 함께 실망스러웠던 사례를 지적하고 이 기자 주장에 대해 진지한 반론을 펼쳤다.

전 기자는 "입사 당시만 해도 주필과 후배 기자의 공방이 노보를 통해 지상중계되고, '최장집 교수 사건'으로 술렁일 때 사장이 막내 기수를 불러 의견도 물어보고, '조선일보 이의 있다' 시리즈 필진에 한겨레신문 사장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그는 "나이테와 함께 반경을 넓혀가는 거목인 줄 알았던 조선일보란 고목은 지금 링 구석에 몰려 쏟아지는 잽에 머리를 파묻고 더킹만 하다가 롱훅을 휘두르는 공룡 한 마리"라고 비유했다. 이어 보수진영의 지리멸렬을 참다못해 정당 일에 나선 이문열씨가 스스로 '잠수함 속 토끼'라 토로한 것과 같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보수이념 생산과 중심찾기론'을 제기한 이선민 기자의 주장과 관련, 그 취지는 동의하지만 해법은 구태를 답습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새 보수이념을 만들고 전파하고' '민족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표현부터 '정당발기문 같은 호소'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따라서 신문이 '이념을 만들고, 나라와 민족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선언은 '과잉'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그 이유를 "조선일보 지면에 비전과 이념과 의욕이 넘쳐나는데도 왜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했는가"라는 질문으로 대신했다. 그는 "작금의 영향력 실추가 적대적인 권력과 조직적인 안티 공세 때문이라는 주장은 과거 영향력이 군부정권과 타협 때문이었다는 주장만큼이나 일면적"이라며 "우리 안의 '수술부위'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의 지성 위에 매니저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는 이를 위해 저널리즘 원칙에 더 충실하면서 "기본부터 분명히 하자"고 제안했다. 의견란과 기사보도간 구분을 하자는 뜻이다. 사설·칼럼에서 신문의 정체성과 할 말을 추상같이 쏟아놓을수록 일반 지면은 공평무사한 사실로 채워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또 사실보도에 앙금이 될 수 있는 '과잉의욕'을 경계할 것을 주문했다. 오피니어란도 '의견의 정쟁'을 통해 사회적 진리가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사회의 다양한 뜻과 문제의식을 모셔와야 한다"며 필진확보 문제를 언급했다. 그리고 "독자 위에 계몽군주연하며 군림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우리 사회의 지성 위에 매니저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것"을 권했다.

그는 조선일보의 과거사와 관련, (이 기자가) 혹을 떼는 방안에는 입을 닫은 채 "또다른 혹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 대목에 깊은 아쉬움을 나타냈다. 따라서 "성역없는 비판을 소명으로 하는 정론지라면, 스스를 나라를 대표하는 '할 말은 한다'는 신문이라면, 자신에게 더 엄정해야 한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조선일보 시끌벅적해질까
9년차 선-후배간 치열한 논쟁

"의견차이가 있을 때는 치열하게 논쟁하고 결과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이는 문화야말로 조선일보를 새롭게 태어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방상훈 조선일보 사장이 5일 창간84주년 기념사에서 한 말이다.이선민 기자와 전병근 기자의 이번 논쟁을 계기로 방 사장 염원대로 조선일보가 시끌벅적해질 수 있을까.

솔직하면서도 진지한 두 사람의 논쟁은 조선일보 사내 의사소통 문화를 바꾸는데 일조할 것은 분명하다. 그동안 '안티조선' 등 외부 비판이든 정체성 논쟁이든 일선 기자들 스스로 이렇게 뚜렷한 목소리를 낸 적이 드물기 때문이다.

입사 16년차인 중견급 기자와 7년차의 젊은 기자인 두 사람의 논쟁은 편집국의 중추를 이루는 '시니어-주니어' 그룹을 대표하고 있기도 하다. 이선민 기자는 60년생으로 88년 입사했고, 전병근 기자는 69년생으로 지난 97년 조선일보에 들어왔다.

조선일보 내부에서는 수년간 사내 의사소통 단절의 문제점, 언로의 동맥경화에 대한 문제제기가 반복돼 왔다. 노동조합은 지난해 11월 7일 노보에 <"말 못하고, 막히고…미치겠다">라며 의사소통 문제의 개선을 촉구했다.

또 2003년 7월 노조는 "업무환경 개선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대화의 물꼬를 트는 것"이라고 심각함을 호소했고, 지난해 입사한 신입기자들 역시 "평등한 의사소통이 없다"고 비판했다.

방 사장은 이같은 분위기를 반영하듯 "후배들은 주저없이 자신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하고, 선배들은 후배들의 이야기에 충분히 귀기울인 다음에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수평적인 문화가 자리잡아야 한다"고 5일 강조했다.

조선일보 일선 기자로부터 시작된 변화의 바람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관련
기사
<조선> 기자들 "말 못하고, 막히고... 미치겠다"


다음은 전병근 기자가 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싶었다"라는 제목의 반론 전문이다.

입사 7년차의 안타까움

입사 후 신선한 충격에 기뻐했던 적이 몇 번 있다. 97년 말 굴러다니던 노보를 집어든 때였다. 주필과 한 ‘후배’ 기자간의 ‘공방’이 지상중계되고 있었다. 그 중 ‘후배’의 글 한 대목 : 내가 물러나야 할 때가 되면 조용히 다가와 이제 그만 두라고 말해주는 후배가 있었으면 한다. ‘이런 진솔한 대화와 각오가 지금의 조선일보를 있게 했구나’. 맘속으로, 조선일보가 엄청난 무게로 다가왔다.

그 다음 해. ‘최장집 교수 사건’으로 술렁일 때였다. 사장께서 ‘가장 최근까지 대학에 있었던’ 막내 기수인 우리를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 무렵 지면엔 ‘조선일보 이의 있다’ 시리즈가 연재됐고, 필진에 한겨레신문 사장도 있었다. 조선일보란 고목은 나이테와 함께 반경을 넓혀 가는 거목인 줄 알았다.

지금. 링 구석에 몰려 쏟아지는 잽에 머리를 파묻고 더킹만 하다가 롱훅을 휘두르는 공룡 한 마리를 본다. 일전 보수진영의 지리멸렬을 참다못해 정당 일에 나선 이문열씨가 스스로 ‘잠수함 속 토끼’라 토로한 적이 있지만, 지금 자판을 마주한 나 역시 비슷한 심정이다.

진작부터 “임금님은 벌거숭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말하고 싶었다. 침몰하는 어느 당 얘기도 아니고, 거창한 보수위기론도 아니다. 내 젊은 꿈이 터잡은 곳의 이야기다. 이렇게나마 비장한 어투로 말문 열게 한 것은 그나마 선배가 터준 물꼬 덕분이다.

'보수이념 생산과 중심찾기론’의 문제점

이 선배는 “보수이념을 만들고 전파해야 할 보수 지식인과 언론이 제 역할을 못하고,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갈 비전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이제 그 역할을 ‘되찾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중심에서 밀린 이유가 “사회적 변화에 둔감”했기 때문이라며 “올바른 방향 설정을 위해서는 이런 흐름을 정확히 알고 거기에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새로운 시대가 이미 시작됐는데도 우리의 의식과 행동은 여전히 지난날의 그것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도 개탄했다. 여기까지는 동의한다. 그러나 선배의 글은 스스로 내세운 진단의 날을 비껴가지 못하고 있다. 중심에서 밀리고 있다는 진단은 옳게 내리면서 해법은 구태를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새 보수이념을 만들고, 전파하고’, ‘민족의 중심에 서야’ 한다는 정당발기문 같은 호소부터 보자. 과거 외세에 주권을 빼앗겼던 시절 민족지가 정부를 대신한 때가 있었다. 독재 치하에서 민권이 유린당하던 시절엔 언론이 자유수호의 기치를 들었다. 신문은 무지몽매를 타파하기도 했고 산업화와 (초기) 정보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도 ‘태극기 휘날리며’류의 패러다임이 주효할까. 굳이 ‘현대 미디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신문이 ‘이념을 만들고’, ‘나라와 민족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선언은 과잉이다.

선배가 말하는 우리사회의 ‘좌편향’에 대한 우려는 나 역시 떨칠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신문이 ‘보수이념’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고, ‘비전’을 제시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다. 중심에 서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던 것은 더더욱 아니다.

지면에는 비전과 이념과 의욕이 넘쳐 났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폭넓은 공감을 얻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다매체 시대의 도래라는 환경 탓도 있다. 음모론도 끌어올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영향력 실추가 적대적인 권력과 조직적인 안티 공세 때문이라는 주장은 과거의 영향력이 군부정권과 타협 때문이었다는 주장만큼이나 일면적이다. 눈이 있다면 우리 안의 ‘수술 부위’를 찾아야 한다.

사실보도와 의견논평의 구분

기본부터 분명히 하자. 저널리즘의 원칙에 더 충실해야 한다. 사설·칼럼이 실리는 의견란과 기사보도 지면간의 구분 말이다. 신문의 정체성이나 할 말을 포기하자는 게 아니다. 사설이나 칼럼에서 추상같이 쏟아놓으면 된다. 그럴수록 일반 지면은 공평무사한 사실로 채워져야 한다.

언젠가부터 조선일보는 제목만 보면 무슨 내용인지 안다는 비아냥이 일반화됐다. 더 심한 경우엔 뭘 어떻게 쓸지 안 봐도 안다고 장담한다. 이럴진대 1단 기사의 팩트 하나에 밤을 새는 후배기자들의 수고와 보람은 무슨 소용인가.

사실-가치의 불가분성에 대한 철학적 논쟁은 접자. 둘 사이의 경계는 양식있는 독자가 더 잘 안다. 나부터도 여러 신문을 봐야‘전모’가 들어온다. 보수지의 품격은 보수이념을 그득 담는다고 돋보이는 게 아니다. 경박한 ‘진보’가 따라올 수 없는 냉철함과 치밀함에 있다고 믿는다. 앞서 ‘과잉 의욕’을 경계했던 것도 순금 같아야 할 사실보도에 치명적인 앙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피니언란도 입맛에 맞는 것들을 취사선택해 담고는 덮어버리는 뚜껑이 아니라 싱싱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넉넉한 그릇이 되어야 한다. 편집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 과정에서 ‘의견의 경쟁’을 통해 우리가 믿는 사회적 진리(정론)가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것이야말로 존 밀턴 이후 언론자유론의 첫 번째 신조가 아닌가.

하나의 고압적인 목소리나 듣기 편한 단일화음이 아니라 소란스런 논쟁이 불을 뿜어야 한다. 우리가 교문 앞의 선도반장마냥 팔짱끼고 있는 동안 재능 있는 적잖은 필진들이 다른 멍석을 찾아 나섰다. 영향력은 중심에 서서 발을 굴린다고 나오지 않는다. 정련된 여론의 흐름을 제대로 담아내는 가운데 그 사회의 다양한 뜻과 문제의식들을 모셔와야 한다. 그리하여 안티도 조선의 지면만큼은 들춰보도록 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보수이념을 만들고 전파해야겠다는 의욕과 비전을 제시해야겠다는 집착이 반감을 자초한 면이 있다. 연초 임지현 교수도 ‘정론 콤플렉스’를 지적하지 않았던가. 그의 ‘정론’ 무용론에 동의할 수 없지만, 적어도 독자 위에 계몽군주연하며 군림하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는 지적은 버릴 게 없다. 독자들의 의식이나 사회 각 분야는 우리 생각 이상으로 성숙돼 있다. 우리가 오히려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을 뿐이다.

조선일보의 84년 역사에 빛나는 부분은 과거 사주들이 당대의 지식인과 인재를 중히 여겼다는 전통이다. 그 미덕은 어디로 갔는가. 어느새 우리는 우리 사회의 지성 위에 매니저로 군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 세간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선일보용 논객’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불순한 ‘낙인찍기’ 혐의도 있지만, 우리 스스로 그만큼 포용력을 발휘하지 못한 결과이기도 하다.

미래로 나가기 위한 과거 성찰

안티 세력의 ‘전면부정’이 ‘비역사적’이라는 선배의 지적에 동의한다. 그러나 지금의 여론이 안티의 선동 때문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우리의 시선은 그들 뒤편으로 팔짱을 낀 채 침묵하고 있는 다수의 관객들에게 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이른바 反안티(혹은 보수)-非조선층 말이다.

보수지라는 점에서 다를 바 없는 경쟁지가 비집고 들어오는 틈도 바로 이 지점이다. 선배는 조선일보의 과거 문제에 대해 “가장 오래 살아오면서 본의 아니게 여러 개의 혹을 달게 됐다”고 표현했다. 그 중에는 “시대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도 있고, 터무니없고 억울한 것도 있다”고 했다. 충분히 짐작은 간다.

그러나 “거추장스런 혹들을 하나씩 떼어버려야 하는” 시점이라고 하면서, 혹을 떼는 방안에 대해서는 입을 닫은 채, “또 다른 혹을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만 했다. 광풍처럼 불어대는 작금의 ‘친일·반민주 처단’ 몰이에 대해서는 나도 반대다. 다만 묻고 싶다. 성역 없는 비판을 소명으로 삼는 정론지라면, 스스로 나라를 대표하는 ‘할말은 한다’는 신문이라면, 자신에게 더 엄정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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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언론운동협의회(현 민언련) 사무차장, 미디어오늘 차장, 오마이뉴스 사회부장 역임. 참여정부 청와대 홍보수석실 행정관을 거쳐 현재 노무현재단 홍보출판부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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