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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른 아침부터 전화기가 난리입니다. 평소 아침 전화는 잘 걸려오지 않는 터라 저로서는 잘못 걸려온 전화이겠거니 싶었습니다. 행여 하는 마음에 전화를 받아 보니, 택배회사 직원의 숨가쁜 목소리가 흘러나옵니다. 오후쯤에 <오마이뉴스>에서 보낸 쌀을 가져다 주겠다는 것입니다.

팔불출이 될 각오를 하고 마음짱으로 아내를 추천했던 것이 쌀 선물까지 안겨주었습니다. 또 아내에게 예쁜 꽃도 배달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쌀로 꽃으로, 가장 노릇에 남편 노릇까지 한 것 같아서 뿌듯하기 짝이 없습니다.

쌀을 배달 받아 보기는 10년 만에 처음입니다. 오늘은 택배회사 직원이 보내 주었지만, 10년 전에는 아버지께서 직접 10kg 정도의 쌀포대를 들고 오신 적이 있습니다. 쌀 배달을 받으면서 문득 그때 생각으로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었습니다.

우리 형제들은 유난히 아버지를 무서워했습니다. 아버지의 엄한 성품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에게 단 한차례 맞았던 기억 때문에, 평생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살았습니다. 동생들도 나름대로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각각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아버지에게 정감 있는 말이나 농담 한마디 제대로 못하고 살았습니다. 살아 있는 카리스마의 화신이었죠.

맏이인 저 역시 아버지와 가까울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습니다.
특히 공부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이셨던 아버지는 저에 대한 기대가 상당히 컸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등학교 입학 시험에 떨어지면서 아버지의 기대도 한풀 꺾였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의 대화는 실제로 거의 단절되었고, 아버지는 영원히 무서움의 대상으로 남을 것 같았습니다. 한 번씩 대화가 오가다가도 아버지의 힐책성 말 한 마디에 오금이 저려져서 그 다음부터는 말 붙이기도 힘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우리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은 그냥 '관념적'으로 믿을 뿐, '경험'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태는 꽤 오래 지속되었습니다만, 깨어지는 것은 참으로 순간적이었습니다. 바로 쌀 배달 때문이었습니다.

군 제대 후, 어려운 가사살림으로 인해 바로 복학하지 못하고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우연히 집에 전화를 했는데 어머니는 계시지 않고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셨습니다. 그냥 안부를 묻고 끊으려는데, 시골 어른들이 으레 그렇듯 "쌀은 있냐?"라고 물으십니다. 지나가는 말로 '사야 된다'고 말씀을 드리자, 아버지께서는 '맛있는 쌀'을 놔두고 왜 사서 먹냐고 하시더군요.

지금도 아버지는 고향인 상주에서 살고 계시는데, 그곳은 쌀로 유명한 고장입니다. 쌀에 곶감과 누에고치를 합쳐서 '삼백(三白)'의 도시라고 불리죠. 누에 산업이 사양화되면서 누에고치 생산은 거의 없어졌지만, 지금도 상주의 쌀과 곶감은 전국적인 명품으로 팔리고 있습니다.

전화를 끊은 그 다음날 오후쯤이었습니다. 식사를 마친 후 잠시 나른함을 즐기고 있을 무렵 주유소로 낯익은 차 한 대가 들어 왔습니다. 사무실 문을 박차고 나오는데 차에서 내리신 분은 다름 아닌 아버지셨습니다. 손에 10kg 정도 되는 작은 쌀포대를 들고 웃으면서 저를 보고 계시더군요.

잠시 멍했습니다. 어떻게 된 상황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손에 들려 있는 것이 쌀포대라는 사실을 아는 데에도 한참 걸렸습니다. 대구에 일이 있으신 것도 아닌데, 여기까지 웬일인가 싶었습니다. 상주에서 대구까지는 지금도 1시간 30분은 족히 걸립니다. 마음먹지 않으면 오기 쉽지 않은 거리이죠.

어쩐 일이냐는 물음에 '쌀 가져다 주러 왔다'고 하십니다. 많이나 가져 왔으면 그러려니 싶겠지만, 10kg짜리 한 포대 가져다 주시려고 그 먼길을 왔다는 사실이 선뜻 믿겨지지 않았습니다. 재차 다그쳐 묻자, 그제서야 어색한 말투로 "네가 집에 자주 안 오니 나라도 와서 보고 가야지"라고 하십니다.

그러고는 "쌀 여기에 둔다"고 하시고 대답을 할 겨를도 없이 차에 오르십니다. '차라도 한 잔 하고 가시라'는 저의 말에 손사래를 치면서 "봤으면 됐지, 차는 무슨 차…"라며 차를 몰고 훌쩍 떠나셨습니다.

멍한 충격에 한참 동안 떠나가는 차를 보고 있었습니다. 1시간 30분을 달려와서 불과 2분 보고는 또 바쁜 일이 있으신 것처럼 상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 2분도 참으로 어색해 하면서 쌀만 전해주고 가셨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작은 쌀포대 하나만이 아니었습니다. 알 수 없는 감정에 한참을 뿌듯해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또 다른 감정이 순식간에 가슴 전체에 자리잡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는 이미 이러한 모습들을 우리들에게 참으로 많이 보여 오셨던 것 같습니다. 다만 어색해 하는 그 표정 뒤에 감추어져 있는 사랑을 읽어낼 만큼 제가 성숙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옛날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오는 말 한마디에서 새로운 보물들을 건져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컴퓨터 메신저로 "우리 큰아들 뭐하니?"라며 안부를 전해 오시기까지 합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가깝게 존재해 계십니다.

마음 착한 아내 덕분에 오늘 쌀을 배달 받았습니다. 저에게 '쌀'은 이처럼 따뜻함과 사랑을 전해주는 메신저인 것 같습니다. 오늘 저녁은 잡곡밥을 잠시 멀리하고, 이것으로 뽀얀 쌀밥을 지어 보렵니다. 10년 전에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을 먹었던 것처럼, 오늘은 착한 아내의 마음을 먹을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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