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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김희수
‘물갈이’라는 단어가 다소 날카롭게 다가온다. 하지만 물갈이연대는 부드러운 포지티브 전략을 세웠다. 도덕성, 개혁성, 성실성 등의 자질과 정책 등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선출한 ‘국민후보’의 당선운동을 벌여 정치권을 긍정적으로 바꿔나가겠다는 것. 양길승 원장은 이 운동에서 우리 사회의 ‘미래’를 본다고 말한다.

“물갈이, ‘미래’위한 일”

“낙천·낙선운동의 핵심은 '과거'입니다. 하지만 물갈이연대의 당선운동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한 일입니다. 다양한 접근을 통해 여러 형식의 정치참여운동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역량이 분산되고 국민적 관심이 줄어든 감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다양한 정치참여 운동이 각각의 날개를 펼치고 갈 때 사회가 발전할 겁니다.”

양 원장의 활동에 기대를 거는 사람들이 많다. 그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서울의대 재학 중 ‘보리회’, ‘사회의료연구회’ 등을 결성해 학생운동을 펼친 그는 영등포 문래동 판자촌에서 무료진료활동을 하던 중 1974년 긴급조치 1, 2호 위반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또한 1975년 의대간첩단 사건과 시인 김지하의 양심선언문 배포사건과 관련돼 체포되기도 했다.

그 뒤로도 투쟁의 역사는 계속된다. 1980년 복학했지만 광주민주화운동 진상규명 시위 배후조종자로 지목당해 제적을 당했고, 보안사 남영동분실에서 고문을 받기도 했다. 그 후 김수환 추기경과 광주교구 윤공회 주교의 도움으로 아일랜드로 출국, 아일랜드 골웨이 의대에 편입해 의사 자격을 취득했다.

1985년 귀국 후, 양 원장은 한국의사시험에 합격했으며 6월 민주화항쟁의 열기를 모아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를 창설해 산재환자치료 등 의료보건운동을 펼치면서 ‘낮은 호흡’으로 사는 사람들을 끌어안았다. 그렇게 그는 민주주의와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삶을 걸어왔다. 옳은 길을 가로막는 걸림돌과 장애물에 걸려 넘어져도 결코 돌아가는 길을 택하지 않았다.

“운동 방식도 변화가 필요해요. 예전에는 무조건 ‘타도’였죠. 부수자는 건데, 그러면 ‘상처’가 남아요. 이제는 ‘녹이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이한열 열사 장례식 때 시청 앞에 백만이 모였어요. 그런데 월드컵 때는 수백만이 모였어요. 자발적으로요. 세상과 사람이 변하면, 접근방식도 변해야죠. ‘신명나는 자발적 참여’가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될 거예요.”

세상 변하듯 사회운동도 ‘타도’서 자발적 참여로

양길승 원장은 ‘당연히’ 의사도 정치·사회개혁을 위해 참여해야 한다고 말한다. 환자의 질병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사회현상을 빼놓고서는 질병을 말할 수가 없죠. 한 환자의 질병을 통해 그 사회를 읽을 수 있고, 그래야만 합니다. 환자를 제대로 치료하려면 그 개인이 처한 사회환경까지 치료해야 합니다. 의료의 새로운 역할은 질병치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선 환자와 함께 사회를 치료할 수밖에 없어요.”

그의 말과 행동, 그리고 걸어온 길은 “병만 고치는 것은 소의(小醫)요, 사람을 고치는 것은 중의(中醫)지만, 사회를 고치는 것은 대의(大醫)”라는 말을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문득 가정에서 그의 모습이 궁금하다. 병과 사람과 사회를 고치며 명의(名醫)가 되었지만, 정작 가정에서는 ‘돌팔이’인 것은 아닐까.

“설거지나 밥하기 등 가사 분담만으로 가정에서 양성평등을 실천한다고 남성들이 말하면 여성들이 너무 억울할 것 같아요. 가정에서 양성평등을 실천하는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육아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그걸 못했어요(웃음). 대학원, 중학교 다니는 딸 둘이 있는데, 예전에 못한 게 미안해서 지금 같이 하려고 하면 애들이 무시해요(웃음).”

그의 부인은 이혜경 여성문화예술기획 대표다. 그는 문화의 힘으로 여성운동을 이끌고 있는 부인이 “너무 부럽다”고 말한다. 그것도 우리 사회의 ‘미래’를 만드는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여성운동도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문화적인 힘을 응축시키고 승화시키는 여성운동이 되었으면 합니다. 처가 유명해져서 요즘은 ‘이혜경의 남편’으로 소개될 때가 많아요. 유쾌한 반전이죠(웃음).”

또한 그는 “무슨 일이든지 엄마와 상의하는 두 딸을 보면 ‘소수자의 비애’를 느낀다”며 크게 웃었다. 그리고 얼마 전 두 딸의 모습이 실렸다는 신문을 펼쳐봤다. 신문을 들여다보는 눈길이 맑았다.

그 눈길은 인터뷰 전 병원을 안내하면서 마주치는 환자와 직원들에게 건네던 손길과 닮아 있었다. 병과 사람과 사회를 고치는 명의(名醫)의 힘은 그 눈길과 손길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성종합신문 <우먼타임스>에서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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