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월 11일 저녁에는 태안초등학교 제47회 동창들의 소공동체인 '신우회'의 정기 모임에 참석합니다.
과거 무절제한 과음으로 벌을 받은 상태가 되어 지금은 술을 마시지 못하지만(그래서 무슨 재미로 모임에 가나하고 처음엔 걱정도 하고 심드렁한 마음이기도 했지만), 술을 마시지 않고서도 재미를 많이 느낍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즐겁고 행복한 마음을 갖습니다.
지난 2월 11일 모임은 여자 동창이 운영하는 부석면 취평리의 한 음식점에서 가졌습니다. 그리고 태안으로 돌아와서는 근흥면 두야리에서 사는 두 친구를 내 차로 태워다주었습니다.
그런 연유로 좋은 생각을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매월 모임 때마다 모임에 참석한 친구들을 내 차로 태워다주자고. 근흥면 두야리부터 먼저 갔다가 태안읍 반곡리를 돌면서 모두 '택배'를 해주자는 생각이었지요.
나는 술을 못 마심으로, 즉 음주단속 걱정 없이 운전을 할 수 있기에 다른 친구들로 하여금 차를 놓고 모임에 와서 마음껏 자리를 즐기게 하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지난 11일 모임에서는 그런 내 뜻을 모든 동창들에게 공표를 했지요. 다음달 모임부터는 아무도 차를 갖고 오지 말라고….
그리고 그 날도 두야리에 사는 두 친구를 내 차에 태워다 주었습니다.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모두들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두야리 친구들은 마을의 중요한 모임이 있다면서 빨리 돌아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서둘러 내 차로 태워다주었는데, 처음엔 무슨 모임인지를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두야리의 한 음식점 마당에 두 친구를 내려주고 넓은 마당에 꽉 찬 차량들을 보고서야 나는 무슨 모임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참으로 중요한 주민 모임이 거기에서 열리고 있었던 거지요.
두 친구의 권유도 있고 해서 나는 그 음식점 안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모임에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최기중 사무국장의 사회로 '퇴뫼산 살리기 대책위원회' 모임이 심각하고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대책위원회 위원장이신 최기성 선생님을 비롯하여 노인층과 청년층 고루 20여명이 참석했더군요.
모임에 참석하신 두야리 주민들 모두 하나같이 강건한 표정이었습니다. 태안군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에 끝까지 맞서서 마을의 산천을 반드시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눈빛들이 참으로 결연하였습니다.
'밀실행정, 졸속행정, 배짱행정'이라는 용어들과 무분별한 자연훼손, 환경파괴라는 표현들이 분노 속에서 표출되었습니다. 모임은 '퇴뫼산 살리기 대책위원회'의 활동 경과 보고, 현재의 진행 상황, 향후 대책 논의 등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나는 A4용지 두 장에 컴퓨터로 정리 기록된 '퇴뫼산 살리기 대책위원회 경과'라는 이름의 '일지' 문서를 보았습니다. 그 곳에 기록된 사항만으로도 두야리 주민들의 총의, 일치단결, 역동적인 활발한 움직임 등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야리 출향인들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현재 두야리를 지키며 살고 있는 주민들과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수많은 출향인들이 '두야리·퇴뫼산'이라는 그 이름 하나로 뭉친, 놀라운 단합의 실체와 힘을 발견하면서 야릇한 희열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고향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더군요. 고향이란 단순히 어떤 마을, 어떤 공간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 공간을 구성하는 모든 산천을 의미하는 것이로되, 눈에 보이는 그 자연상태만을 의미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 공간, 그 자연상태 속에 어려 있는 개인의 추억, 마을의 고유한 분위기와 정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마을의 역사, 무수한 조상의 얼 등이 어우러져 고향의 실체와 개념이 성립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고향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향에 대한 애착과 끈끈한 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의 각별하고도 아름다운 고유 정서입니다. 고향을 지키고 사는 사람이나 고향을 떠나 사는 사람이나 고향에 대한 사랑과 의무는 마찬가지입니다.
고향의 갖가지 자연 사물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산입니다. 특히 대개의 경우 한국인에게 고향의 산은 바로 고향 자체이고 고향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마을의 중심 축이었던 산이 크게 훼손을 당하거나 없어지게 되면 마을은 엄청난 상실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전과 같지 않은 마을의 기형적인 모습은 주민 자신들이 장애인이 된 것만 같은 질감으로도 연결되고, 모든 주민들과 출향인들의 가슴에 그대로 똑같은 상처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지요.
마을의 중심 축인 산은 눈에 보이는 자연 사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 한국인에게는 신령적인 존재이기도 합니다. 산신령, 산신제 등이 갖는 의미는 매우 고귀합니다. 거기에 더하여 정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산을 끼고 형성된 마을, 산과 더불어 수백년, 수천년을 이어온 마을에서 산의 정기를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산에서 발산하는 정기로 말미암아 마을의 역사와 숨결이 유지될 수 있었고, 마을의 고유 정서와 분위기가 형성되어 이어져올 수 있었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입니다.
그런 산을, 태안군 근흥면 두야리의 중심이요 상징이며 마을 자체인 산을 주민들의 동의를 구하는 아무런 절차도 없이(물론 무슨 절차가 있었다 하더라도 도저히 동의해 줄 수 없는 것이지만) 일방적으로 훼손하려는 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20리 밖의 골프장 건설을 위해 그 산의 허리를 자르려는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아무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 자연훼손, 환경파괴와 관련하여 태안군의 행정 태도를 일컬어 밀실, 졸속, 배짱, 위법, 탈법, 만행, 폭거, 범죄적 등등의 용어들이 쏟아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나는 어제 11일 밤 근흥면 두야리 주민들의 모임 자리에서 그런 용어들이 퇴뫼산 벌목과 관련하여 이미 주민들의 가슴에 자리한 상처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것임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야리 주민들에 대한 신뢰를 내 가슴속에 깊이 아로새길 수가 있었습니다.
'퇴뫼산살리기대책위원회' 최기성 위원장님의 소개와 최기중 사무국장의 권유로 주민 여러분께 외람 되게 격려사라는 이름의 말씀을 짧게 드릴 수 있었지만, 오히려 나 자신이 한아름 격려를 받은 느낌이었습니다.
오래 전부터 한국 땅에서 한국을 그리워하고, 고향 땅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나로서는 내 조상님들이 선대까지 250년 동안 뼈를 묻고 살아온 근흥면 두야리의 중심이고 상징인 퇴뫼산만큼은 잃지 않을 수도 있으리라는 어떤 희망 같은 것을 그날 밤 두야리 주민들로부터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던 거지요.
차를 놓고 동창 모임에 참석했던 두야리 친구들을 내 차로 태워다주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절로 들더군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