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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우

명동성당 앞을 지날 때면 나는 가끔 걸음을 멈추곤 한다. 하늘을 향해 높이 뻗어있는 첨답 끝의 십자가를 보면 왠지 모르게 숙연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까. 나는 천주교 신자도 아닌 주제에 가끔 신부님 앞에서 고해성사를 하는 상상을 한다.

상상 속에서 나는 나의 나약함과 나태함을 고백하고, 신부님은 “네 죄를 사하노라” 말씀해주시고, 내게 보속을 주신다.

"일주일에 5번은 착한 일을 해라."
"네 주위에 있는 사람 5명 이상을 웃게 만들어라."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3번 이상 솔선수범해라."

자애로운 신 앞에서 용서를 구할 때조차 그에 상응하는 행동이 필요하다.

어떤 종교이건 간에 가장 큰 매력 중의 하나는 죄를 사하여준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누구나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함으로 자유함을 얻는다. 그래서 고해성사를 '치유성사'라고도 한다.

하지만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용서를 비는 것은 상대적으로 쉽다.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용서를 비는 것에 비하면.

고등학교 시절, 좋아했던 수학 선생님이 있었다. 수학이라면 치를 떨며 싫어했지만, 그 수학선생님만은 무척 좋아했다. 선생님은 늘 단호하게 말씀하셨고, 명쾌한 입담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주곤 했다. 별명이 ‘탱크’였던 선생님은 어찌나 열정적으로 수업을 하셨는지, 판서를 할 때면 분필이 사정없이 산산이 조각나곤 했다.

그날도 선생님은 문제를 열정적으로 푸셨다. 문제를 다 푼 선생님이 진도를 나가려고 하는데 공부를 잘 하는 친구가 선생님의 오답을 단호하게 지적했다. 선생님은 몹시 기분이 상하셔서 그 문제를 다시 풀었다. 선생님의 답은 오답이었다.

이번엔 제대로 된 답이 나왔다. 친구는 의기양양해졌고, 선생님은 얼굴이 붉어졌다. 선생님은 겉옷을 벗고, 다시 문제를 풀었고, 역시 처음의 오답과는 다른 정답이 나왔다. 선생님은 또 다시 문제를 풀었다. 한 시간 내내 수업 진도는 나가지 못했고, 선생님은 10번 정도 그 문제를 풀었다. 교실 분위기는 급속도로 냉랭해졌고, 의기양양했던 친구는 곤혹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랐다.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자 선생님은 입을 열었다.

“내일까지 풀어와서 정확하게 알려주마.”

다음 수학시간. 나는 선생님께서 수업의 말미에 반드시 지난 수업의 실수에 대해 이야기하실 거라고 믿고 기다렸다. 하지만 수업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리는 그 순간까지도 선생님은 ‘오답 사건’에 대해 침묵했다.

나는 실망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는데… 늘 그러셨던 것처럼 명쾌한 입담으로 잘못에 대해 한 마디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마음은 이미 선생님의 편이었지만, 선생님의 침묵은 선생님을 좋아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누구나 잘못을 시인하지는 않는다. 잘못을 시인하는 일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고,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거절당하면 어쩌나 두렵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곧 능력의 부족함을 시인하는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래서 잘못을 저지르고도 종종 권위와 지위를 내세워서 은근 슬쩍 넘어가거나, 오히려 잘못을 한 사람이 주객이 전도되어 화를 내기도 한다.

차떼기로 수백억원을 받고도 뻔뻔스럽게 구는 정치인들을 볼 때면 환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언제 반성의 눈물을 흘렸던가. 그들이 언제 그들의 잘못에 대해 애통해 했던가. 그들이 언제 그들의 부조리한 관행에 온 몸으로 맞섰던가.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들은 이제 국민의 목소리마저 자신들이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고 하고 있다. 여론조사를 통해 나타난 대의마저 “시간이 지나면 바뀔 거다”, “여론이 지지한다고 해서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어리석은 백성이 몰라줘도 끝까지 이 길을 가자”라는 오만함마저 보이고 있다.

잘못은 누구나 저지를 수 있다. 중요한 건 반성과 회개의 태도이다. 그 잘못이 크건 작건 간에 어떻게 반성하고, 어떻게 회개하느냐, 어떤 방식으로 그 잘못을 시인하느냐가 중요하다.

ⓒ 김태우

신부님이 내려주시는 보속을 충실히 수행하는 신도처럼 진실한 반성이 지속적인 행동으로 보여진다면 이 세상에 용서하지 못할 잘못 같은 것은 없다. 하지만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행동만은 용서 받기 어려울 것이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훌륭하다. 하지만 잘못을 시인하는 사람은 더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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