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을 시샘하는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는 가운데, 20일 암스테르담의 명물 담 광장에는 3000여명의 시민들이 모여 이라크 전쟁 반대, 점령 반대를 외쳤다.
네덜란드 북부에 사는 나는 40여명의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대절 버스를 타고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버스 안에서 한 참가자는 이날 아침 런던의 상징 빅벤(시계탑) 위로 두 명의 시위자가 벽을 타고 올라가 ‘Time for truth(진실을 밝힐 때가 왔다)”라는 플래카드를 펼쳐 보였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 소식은 유럽에서 시위에 나서는 사람들의 사기를 높여준 선도적인 투쟁 구실을 하였다.
시위가 시작된 오후 1시,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 탓인지 생각보다 사람들이 적게 모여 약간 실망이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시위 인파는 광장을 거의 채웠다. 날씨를 생각하면 그런 대로 많이 모인 편이다.
네덜란드 시위에서 특색 있는 것은 시위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참 다양하다는 것이다. 이라크 사람은 물론이고, 팔레스타인, 필리핀, 터키, 이태리, 미국, 일본, 중국 등 이날 만나 잠시 얘기를 나눈 사람들의 국적만 해도 열 개는 족히 넘는다.
더 놀라운 것은 앞을 못 보는 맹인도 시위에 나선 것이다. 집회에 여러 번 가봐도 맹인이 참여한 것은 처음보는 것이라 놀라웠다. 버스로 3시간을 달려 시위에 참여한 그는 ‘앞을 못 보지만 남들은 자신을 볼 수 있다’고 하며 시위에 참여했다.
혹시 한국 사람은 없을까 궁금해 두리번 거리다 보니 몇 명이 눈에 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가가 물어보았다.
“어느나라 사람이세요?”
“중국이요”
“홍콩이요”
“일본이요”
한국사람은 못 만났다. 그래도 이날 만난 두 명의 일본 사람과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먼저 만난 사람은 20년째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중년의 켄 히라노이었다. 그는 혼자 시위에 참여하고 있지만, 전 세계의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기 위한 서명을 받고 있었다.
내년이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이 투하된 지 60년 되는 해이다.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핵폭탄으로 희생된 일본인들과 재일동포들의 상처와 후유증은 지워지지 않고 있다.
미국과 소련의 핵무기 경쟁은 끝났지만, 인류는 아직도 핵무기의 공포 속에서 살고 있다. 핵무기 보유국들은 핵무기로 다른 나라들 위협해서는 안되며, 핵무기 실험과 개발을 중단할 뿐만 아니라 결국은 보유한 핵무기를 모두 폐기해야 한다. 전 세계 모든 나라들은 핵무기 개발을 중단하고, 지구상의 핵무기를 모두 폐기하기 위한 국제 협약을 체결해야 한다. 이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일본의 반핵위원회의 반핵 서명 운동의 취지에 공감해서 이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북의 핵개발 의혹이 제기 되어 핵에 대한 공포가 아주 커지고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 한번 피해를 입어봤기 때문에 그 공포는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훨씬 크다고 했다.
그는 북미간의 핵 시비가 평화적으로 해결되고, 그런 노력이 확대되어 전세계의 핵무기가 사라지는 것으로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 한 사람은 오따 아스씨였다. 그는 라이든 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다. 그는 작년 같은 날 전쟁이 발발했을 때도 암스테르담 반전시위에 참여했었다고 한다. 그가 시위에 나온 것은 이라크 전쟁이 부당함을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시위 내내 휘몰아치는 돌풍을 맞으면서도 들고 있는 피켓을 굳게 부여 잡고 앞으로 한발 한발 옮기는 그의 모습에서 평화를 향한 그의 의지를 볼 수 있었다.
그는 일본 정부가 이라크에 자위대를 보내는 것에 분노를 느낀다고 했다. 미국의 파병 요청을 받고 이를 수락하기는 한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여서 서로 마음이 통하는 느낌이 들었다. 같이 사진을 찍고 사진을 보내주겠다고 했더니 그는 아주 기뻐하며 흔쾌히 이메일 주소를 전해주었다.
오늘 시위에서 가장 시선을 많이 끈 건 부시 대통령과 네덜란드 발컨엔드 수상 분장을 한 듀엣이었다. 폭탄을 한 다발 들고 앞장서서 걷는 부시 대통령과 개 밧줄에 묶여 개 걸음으로 그 뒤를 쫓는 발컨엔드 수상, 뒤쫓는 발컨엔드 수상이 낑낑 대며 주인을 부르면 부시 대통령은 가던 길을 멈추고 뒤로 돌아 개의 손을 쓰다듬어 주었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에 이어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미국 편을 들고 있는 네덜란드 수상을 풍자한 두 사람의 연기에 사람들은 잠시 잔뜩 찌푸린 날씨를 잊고 배꼽을 잡았고, 그 장면을 사진에 담기에 바빴다.
미국이 이라크 침략을 추진했을 때, 유럽은 둘로 나눠었다. 전쟁을 반대하던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의 나라들과 전쟁을 찬성하던 영국, 네덜란드, 덴마크, 스페인, 이탈리아와 동유럽 나라들로 갈라진 것이다. 이러한 입장차이는 그 나라의 정부가 좌파냐 우파냐와는 별 관계가 없었다. 우파인 프랑스의 시락 정부가 미국에 반대한 반면에, 좌파인 영국의 노동당 정부는 미국과 한편이 되었다.
영국은 전통적으로 미국과 유럽 대륙 나라들 중간에 서 있었고, 중동 지역의 석유패권을 지키기 위해 미국과 보조를 같이 해왔다. 네덜란드 역시 유럽 대륙에서 경제모델이 미국에 가장 가깝고, 미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높으며, 세계적인 석유회사 ‘쉘’의 나라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실리를 많이 고려해 미국 편에 선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 여왕 어머니의 죽음
이날 비바람은 걷는 사람이 바람에 휩쓸려 갈 만큼 강했다. 날씨는 해석하기 나름이라지만 이날 비바람은 이라크 전쟁의 희생자들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었지만 네덜란드의 여왕의 어머니의 죽음을 슬퍼했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네덜란드는 입헌 군주국이다. 왕가는 비록 통치권력은 없지만, 내각제 정부 하에서 연립 정부 구성에 관여하고, 매년 예산안을 발표하는 등 상징적 위치 이상의 지위를 누리고 있다. 이날 세상을 떠난 전 여왕 율리아나는 94세(1910~2004)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1946년 어머니 빌헬미나 여왕으로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24년간 왕위에 있다가 1980년에 왕위를 장녀인 베아트릭스에게 넘겨주었다.
그의 생애는 인도네시아, 수리남, 안틸른 등의 식민지를 거느렸던 유럽 제국의 하나였던 네덜란드의 현대사의 영욕을 거쳐왔다. 1차 대전에서 중립을 지킴으로써, 주요 참전국인 독일, 프랑스, 영국에 인접해 있으면서도 전쟁의 참화에서 비껴갔던 네덜란드는 전쟁 직후인 1918년 독일 혁명이 발발했을 때, 독일처럼 왕조가 붕괴할 위기를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는 독일군의 침략에 단 3일만에 정복당하고, 왕가를 비롯한 정부가 영국으로 가 피신해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독일에 맞서 싸웠다.
유태인들이 유난히 많았던 네덜란드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안네의 일기를 쓴 안네 프랑크의 나라이다.
독일의 점령기간 중에 총 14만명의 유대인 중 11만명이 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당했다. 당시 기승을 부렸던 인종주의의 망령에 사로 잡혀 많은 네덜란드인들이 유태인들을 수용소로 보내는데 협력했다. 그 때문에 네덜란드 역시 20세기 역사 최대의 비극이었던 유태인 집단 학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식민지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이 불붙었을 때 네덜란드는 이를 막기 위해 군대를 보내 진압했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의 독립의지를 꺾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율리아나는 여왕으로서 1948년 인도네시아 자주독립에 서명했다. 그리고 1975년에는 중남미의 식민지 수리남의 독립 또한 승인하게 되었다.
시위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잡아 타기 위해 기다리는 중 벽에 부시의 얼굴이 새겨진 게 눈에 띄었다. 판을 대고 스프레이로 그린 것이다. 체 게바라의 그림은 여러 번 봤지만, 부시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뼈다귀가 엑스 자로 쳐져서 보는 재미가 한층 더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2 주 후에 열릴 집회에 대한 홍보가 있었다. 약 2만 6천명에 이르는 난민 신청자들이 난민 지위를 받지 못하고, 네덜란드에서 쫓겨나게 생겨 이것을 막기 위한 집회가 열리는 것이다. 흔히 네덜란드는 똘레랑스(관용)이 가장 많은 나라로 알려져 있지만, 근래 들어 인종주의가 정치판을 휩쓸며 네덜란드는 유럽에서 가장 무자비한 난민 억제 정책을 채택해 유럽을 놀라게 하고 있다.
중동, 아프리카에서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전쟁, 누가 전쟁을 치르든 그 무기는 서방의 것이다. 전쟁은 난민을 낳고, 난민들은 서방으로 밀려든다. 이런 순환고리로 급증한 난민 문제를 해결하려고, 유럽은 그 주위에 벽을 높이 쌓고, 난민들을 돌려보내고 있다.
전쟁과 난민,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 문제인가? 민주주의와 인권의 수호자 행세를 하면서 제 3세계 갈등과 전쟁의 뒤에서 보이지 않게 잇속을 챙기는 서방의 두 얼굴이 점점 또렷해 보이는 것은 나 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