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지금 나는 제주에서 살면서 계절마다 가슴속에 무지개를 띄우며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계절 속에 떠오르는 일곱 빛깔의 무지개는 제주의 산과 들녘에 떠 있다. 빨주노초파남보 원색의 색깔을 띤 봄꽃들이 무리를 이루며 익어 가는 계절. 제주의 봄은 벌써 한가운데 와 있다.
제주시 노형동 남조봉 서녘 기슭에 자리잡은 한라수목원. 그곳은 무지개처럼 아름다운 꽃동산이었다. 바람이 불어왔다. 무리를 이루고 피어 이는 봄꽃 아래에는 꽃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라수목원 산책로를 따라 발길을 옮기니 흉내도 낼 수 없는 새 소리가 오는 손님을 맞이했다. 잘 다듬어진 산책로를 따라 계단을 오르니 다홍빛을 한 진달래가 수줍은 듯 피어 있다. 가던 길을 멈추고 피어 있는 진달래꽃을 향해 다가갔다.
누구나 진달래꽃을 보면 김소월의 '진달래'를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나는 진달래꽃을 보는 순간 마야의 '진달래꽃'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요즘 체육관 에어로빅장에서 마야의 '진달래꽃' 리듬에 맞춰 땀을 흘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잠시 노랫말을 기억해 냈다.
날 떠나 행복한지
이젠 그대 아닌지
그댈 바라보며 살아온 내가
그녀 뒤에 가렸는지
사랑 그 아픔이 너무 커
숨을 쉴 수가 없어
그대 행복하게 빌어 줄 게요. 내 영혼을 빌어 줄 게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의 '진달래'와 마야의 '진달래꽃'을 마음속으로 부르며 다다른 곳은 들꽃이 피어 있는 한라수목원 산 언저리였다.
"아휴! 이놈들. 얼굴을 내밀었구나."
키 작은 야생화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내 키를 낮춰야 한다. 그래야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가 있다. 쪼그리고 앉아 있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은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다.
서로 같은 색깔끼리 무리를 이루며 피어 있는 야생화. 아직은 약한 이파리 속에서 얼굴을 묻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 깊었다.
'한라수목원'이라 적힌 돌 표지판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가'라는 네 가지 수칙이 새겨져 있었다. 그 수칙은 '진실한가. 모두에게 공평한가. 선의와 우정을 더하게 하는가. 모두에게 유익한가'였다.
항상 자연 앞에만 서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자연의 아름다움을 나 자신의 탐욕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는가? 잠시 고개를 숙이고 반성할 수 있는 기회의 순간이었다.
다시 발길을 옮기니 한라수목원에서 가장 진한 색깔을 띤 빨간 꽃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명자나무 가지에 주렁주렁 피어 있는 빨간 꽃. 그 꽃은 내 몸 속에 흐르고 있는 피처럼 선홍의 빛깔을 띠고 있었다. 주렁주렁 달린 꽃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금방이라도 꽃 속에서 무슨 이야기가 흘러나올 것만 같다.
그 뒤에는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멀리서 관광 온 아주머니들의 웃음소리가 한라수목원의 하늘에 울려 퍼졌다. 까르르 웃는 관광들의 웃음소리는 새소리와 조화를 이뤘다. 흐드러지게 핀 백목련과 벚꽃 앞에 줄을 지어 기다리는 모습이 마치 초등학생들 같았다. 저마다의 예쁜 모습을 담기 위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한다.
남조봉 기슭에 자리잡은 한라수목원은 자연학습장으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특히 한라수목원은 교목원, 관목원,약·식용원, 희귀특산수종원, 만목원, 화목원, 도외수종원, 죽림원, 초본원, 수생식물원 등 10개의 원과온실, 양묘전시포, 삼림욕장, 휴게실, 편익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난 전시실에는 시원한 미니 분수대가 물줄기를 품어댔다.
5만평에 달하는 삼림욕장은 1.7㎞의 산책코스로 거의 오름 정상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어 졌다. 한라수목원 정상에서 바라보는 한라산은 금방이라도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느껴진다.
아직 한라산 정상골짜기에는 희끗희끗 잔설이 묻어 있었다. 소나무 사이로 보이는 제주시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수목원의 산등성이를 한바퀴를 돌아보니 어느덧 옷에는 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산책로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꽃비를 내리게 했다. 백목련과 진달래, 살구꽃, 벚꽃, 철쭉 등 무지개처럼 영롱하고 고운 봄꽃을 바람은 사뿐사뿐 뿌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꽃잎을 사뿐히 즈려 밟고 떠나 사람은 님이 아니라,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꽃잎이 진 자리에는 다시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