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제정된 건강가족기본법(이하 건강가족법)이 다시 도마 위에 올랐다.
‘건강가족법은 시대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가부장적 가족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담고 있는 구시대적 법’이라는 게 여성계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지난 3월 16일 ‘건강가정 있다, 없다’라는 주제로 건강가족기본법 긴급진단 토론회를 갖고 “가족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법은 현재 진행되고 있는 가정의 위기를 해결하는 대안이 될 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결혼, 출산 개인 선택 아닌 의무” 잘못
특히 “건강가족법 제8조 1항(모든 국민은 혼인과 출산의 사회적 중요성을 인식하여야 한다)은 이성간의 결혼과 여성의 출산을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고 있다”며 “결혼과 출산이 개인의 선택이 아닌 의무로 해석되는 법 조항”이라고 지적했다.
이재경 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는 발제를 통해 “8조 1항의 법조문은 출산을 하지 않거나 자녀를 하나만 낳는 행위, 이혼하는 행위, 동거, 독신 동성과 함께 사는 행위는 잘못되었으며, 이는 사회적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면서 “이런 법조문은 다양한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가족에 준하는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근거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교수는 또 “가족법에 건강이라는 특정개념을 부여하는 것은 평등과 다양성을 담지 못하는 폐쇄적인 개념의 가족형태를 양산하는 것”이라며 “열린 가족의 개념으로 법이 제정돼야만 양성평등과 다양성은 존중되고 실현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은희 여성개발원 연구위원도 건강가족법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발제에서 “혼인과 출산은 개인의 선택”이라며 “모든 국민에게 혼인과 출산의 중요성을 가치기준으로 설정해 규범화시키는 것은 헌법이 보장한 자유권을 침해한다”고 주장했다.
조 위원은 또 “법 4조 2항에서 국민에게 가정의 복지의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가정의 복지향상은 국가의 책무이지, 국민의 의무로 규정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여성계 “현실 외면한 구태” 한목소리
토론자로 나선 이박혜경 인천발전연구원 연구위원은 “건강가족법은 가족중심주의를 중심으로 핵가족을 특권화하고 있어 사회통합을 저해한다”면서 “현실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살고 있으면서 양육과 돌봄을 나누는 관계들을 포괄할 수 있도록 개정돼야한다”고 주장했다.
한혜규 군포여성민우회 가족과성상담소 소장은 “현재 저소득 가정이나 한부모 가정의 6세 미만 아동양육비 한달 지원금 1만7000원은 가족복지의 열악한 현주소를 말해준다”며 “이혼율 증가에 따른 한부모 가정 등에 대한 지원대책을 논의해야하는 상황에서 이혼 등으로 인한 가정 해체를 막는 방안이 중심이 된 건강가족법은 현실의 문제를 외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사업학과 교수도 “이혼율, 저출산 증가 등은 가족해체를 촉진하는 위기 현상이 아니라 변화일 뿐”이라며 “변화 양상을 위기로 규정하고 이전 삶의 양식으로 되돌리려는 시도 자체가 오히려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현재 시행령 작업이 진행 중인 건강가족기본법은 내년 2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