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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전쟁 중 이른 봄, 여덟 살 먹은 까까머리 소년이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을 17년 다닌 후, 2년 4개월의 군복무를 마치자마자 다시 학교에 교사로 부임하여 오늘까지 32년 8개월에 이르렀습니다.
제 지난 생애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이제 온실과 같은 학교라는 사회를 떠납니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인생이지만, 저는 곧 서울을 떠나 강원도 안흥 산골에서 텃밭을 가꾸고, 뒷산에 가서 나무를 해서 군불을 지피는 나무꾼이 되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저를 위한 이런 퇴임예배 없이 조용히 이 학교를 떠나고자 했습니다. 여러분 대부분은 저를 모르고, 저 또한 여러분을 잘 알지도 못하는데 퇴임사라 하여, 미사여구나 잔뜩 늘어놓고 떠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학교에서 베풀어주는 이런 자리를 굳이 피하는 것도 예의가 아닐 것 같아서 뒤늦게 오늘 이 자리에 섰습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죽을 때는 선한 말을 남긴다고 합니다. 저를 잘 모르는 학생 여러분이 내가 다니는 학교의 한 선생님이 떠나면서 마지막 남긴 말로, 앞으로 여러 분 삶에 한 안내자가 된다면 오늘 이 자리가 조금은 의의가 있을 듯합니다.
고교시절은 인생의 가장 황금기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생각한 대로 여러분 앞날 인생은 대체로 결정됩니다. 물론 그에 다른 끊임없는 노력이 뒤따라야 합니다.
저는 고교시절 꼭 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33년 간 교사로 살았습니다.
저는 고교 시절 선생님들이나 친구들로부터 ‘작가’, ‘시인’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길은 험난해서 아주 늦깎이로 문단에 얼굴을 내밀고 지금까지 10권의 책을 펴냈습니다.
저는 고교시절, 학생기자로 활동하기도 집안이 기울어서 신문배달도 하였습니다. 그때 나는 지금은 신문배달을 하지만 언젠가는 기자나 사장이 되겠다는 당찬 꿈도 꾸었습니다.
그 꿈 탓인 양, 정말 천만 뜻밖에도 기자가 되어 지난 1월 31일부터 3월 17일까지 미국 워싱턴에 가서 경비가 삼엄한 백악관 앞에서 “미국이여, 이제 두 동강난 내 조국 한반도를 통일시켜 달라”는 겁 없는 기사도 썼습니다. 이 모두가 고교 시절에 품었던 꿈이었습니다.
꿈을 지낸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제가 정년을 5년 남기고 이 교단을 떠나는 것은 여러 이유도 있지만, 내 마지막 꿈을 이루고자 함입니다. 시골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감동과 용기, 그리고 새로운 길을 찾게 하는 작품을 쓰고자 저는 밤낮을 가리지 않을 겁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진흙 밭에서 개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 이 겨레를 잘 이끌어가겠다는 입씨름이 아니라, 서로 누가 상대 얼굴이 검느냐고 싸우고 있습니다.
사실은 두 편 다 검은 데도 말입니다. 저도 한때는 내 얼굴이 검은지도 모른 채 그들을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 얼굴도 그들 못지않게 검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대부분 많이 배우고, 이른 바 좋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우리 교육자들이 가르친 학생이었습니다. 정말 부정부패로 얼룩진 이 나라는 우리 모두가 참회하고 나부터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한 구제 불능입니다.
제가 이 학교에 처음 왔을 때는 한 학년이 네 학급으로 작고도 아담한 한 가족과 같은 학교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들은 학생들을 모두 알았고 학생 역시 선생님을 다 알았습니다.
지난해 가을 중간고사 때 어느 교실에 시험 감독 교사로 들어가자 한 학생이 “선생님도 이 학교에 계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공장에서 제품이 쏟아지듯 학생을 길러내는 곳에서는 참다운 사람의 교육을 할 수 없습니다.
이제 교단을 떠나면서 이 학교가 더 작아지고, 학생들의 인격을 더 존중하고, 그들의 개성을 더 발휘할 수 있는, 진정으로 사람을 키워주는 민주적인 학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학교가 민주화되어야 사회도 나라도 민주화됩니다.
제가 이 학교에 올 때 20년만 버티자고 결심했는데, 27년을 지내고 떠납니다. 이 점에서 이화학당에 감사합니다. 지난 학기에 퇴직하려 했는데, 그때 소매를 잡아준 김규한 교장 선생님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교사는 학생을 보고 사는 거다”라고 끝까지 교단에 남기를 바랐던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돌아가신 아버님과 무능한 남편을 묵묵히 지켜준 아내에게 감사드립니다.
이대부고에 재직하는 27년 동안 저 개인적으로 변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집도 그대로고 제 재산은 한 푼도 불어나지 않았습니다. 엊그제 퇴직금이 입금되어 아내가 결혼한 후 처음으로 통장에 많은 돈이 들어왔다고 웃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졸업생과 학생 여러분에게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저의 무능과 게으름으로 잘못 가르치고, 용렬함으로 때로는 화내고 회초리를 들어서 여러분의 마음을 상하게 한 점 두고두고 반성하겠습니다.
학생 여러분은 이 나라 이 겨레의 희망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자라 이 나라의 큰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열심히 사십시오. 열심히 사는 사람은 다시 만나면 반갑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다시 만나면 반갑습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다시 만나면 반갑습니다.
이 말은 제가 제자들에게 늘 들려주는 말로, 지난 일요일(3월 14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샌타모니카 바닷가에서 졸업 후 20여 년 만에 감동적으로 만난 제자들에게도 들려준 말입니다.
열심히 사는 사람은 다시 만나면 반갑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4. 3. 20.
박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