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예년 봄에는 개나리, 진달래, 목련이 순서를 정해놓고 피더니 금년에는 이상하게도 한꺼번에 핀다. 이제 벚꽃마저 어우러지면서 현란한 꽃 잔치를 벌이고 있다. 지구 온난화 탓인가. 이제 60을 지난 나이에 신기할 일도 별로 없으나 그래도 이런 자연의 섭리는 신기하기만 하다. 하지만 더욱 신기한 것은 이 화사한 꽃 잔치에 맞춰 만발하고 있는 현란한 정국의 화제다.

총선을 앞둔 정치 드라마의 막은 임기 말의 국회가 열었다. 4년 임기동안 법안 하나 진지하게 심의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국회가 핵폭탄의 파괴력을 가진 대통령 탄핵안을 처리함으로서 드디어 국회의원의 막강한 위력을 과시했다. 그 처리장면은 나른한 초봄의 오수를 한숨에 날리는 충격이었고 그 후 정국은 극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탄핵은 말도 안 되는 장난이라는, 어안이 벙벙한 외신의 논평을 보면서 수치감을 느꼈지만 그 후 불길처럼 타오른 국민의 정치참여 운동으로 다소 위안을 받기도 했다. 이를 계기로 오만 불손한 국회의원들에게 누가 진정 이 나라의 주인인가를 보여 준다면 그동안 우리의 발목을 잡았던 정치의 개혁과 민주적 체제의 확립은 몇 십 년을 앞당겨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 ‘빨리 빨리’를 외치며 경제에서 압축성장을 이룩한 국민답게 정치도 내친 김에 압축발전을 이룰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런 기대도 선거전이 본격화되면서 다시 실망으로 바뀌고 있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화제가 선거 이슈로 등장하면서 정치의 후진성을 여전히 보여주고 저질의 코미디 수준까지 전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탄핵이라든가, 노무현 정권에 대한 평가가 선거의 주요 이슈가 되는 것은 어차피 탄핵정국이라는 태풍 속에 들어왔고 대통령이 식물인간처럼 되어있는 마당에 피할 길이 없다. 정당이 정책대결의 준비가 안 돼있고 이 문제가 다른 모든 정책적 이슈를 압도한다면 차라리 이를 두고 유권자의 심판을 받을 일이다. 거대 여당에 대한 견제를 위해 표를 달라든지, 안정세력 구축을 위해 표를 달라는 말이 선거의 구호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당은 ‘대수의 법칙’에 따라 실수가 있을 수 없지만 개인은 인간이기 때문에 모두 실수를 한다. 그래서 실수를 했다면 개인적으로 참회하고 교정하면 될 일을 당의 대표 격인 사람들이 108배, 3보1배, 큰절의 고행을 하고 있다. 국민들이 그들에게 일하라고 했지 언제 절 받자고 했던가.

그동안 선거에서 단골 메뉴였던 지역감정 싸움은 아직 표면화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세대간 갈등은 여전히 주된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이미 지구상에선 좌우의 이념적 대결이 막을 내린지 오래건만 세계화를 부르짖은 지 10년이 지난 이 땅에서는 아직도 그 망령이 활개치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 지구상에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이념적 갈등은 지난 대선 때부터 세대간 불신과 갈등으로 번져 또 다른 사회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 한쪽에서는 젊은 세대가 축제처럼 즐기는 정치집회가 열리고 그 옆에서는 노년층이 주도해 태국기와 성조기를 흔드는 구국의 집회가 열리고 있다. 우리사회가 아직도 유교적 위계질서의 권위주의가 지배하고 끈끈한 가족이 중심인 사회로 알고 있었는데 어느새 가치관이 바뀐 모양이다. 그렇다면 이 사회의 새 가치관은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6070세대는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경험한 세대이다. 전쟁은 죽은 사람에게는 천명을 빼앗고 살아남은 사람에게는 증오를 심어 준다. 60대는 전장의 광기를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그 비극을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그들은 지금 아프리카의 극빈지역 아이들처럼 기아를 경험했고 미국이 보내준 분유를 먹으며 감격했다. 학창시절에는 북진통일을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고 미국대통령이 오면 거리에 나가 성조기를 흔들었다.

그들은 ‘헝그리’ 정신으로 경제개발에 참여했고 개발독재의 시기에 독재보다는 개발에 의미를 두고 성장을 이룩했다. 그중에는 상당한 부를 축적한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국민소득 1백 달러 시대에 비하면 세상은 좋아진 것이다. 그들은 60년간 이렇게 질주하듯 살아왔고 그들의 고정관념은 이런 현실변화에 대한 오랜 인식에 바탕을 두고 형성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최근의 한국사회는 이들의 인식변화보다 더 빠르게 변화하고 있어 인식과 현실과 괴리가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정보매체의 양극분화는 이러한 괴리를 악화시키고 있다.

우리 사회에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인터넷 매체가 출현한 것은 오래지 않다. 이들은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종이신문의 독과점 시장에 식상해 있던 디지털 세대에 급격히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그들만의 정보를 공유하는 2030광장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디지털 경계의 저편에 있던 6070세대는 아직도 대부분 ‘조중동’이 마련해 주는 6070광장에만 모이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들 미디어가 각기 자기 독자의 영역을 구획하고 그 구미에 맞춰 정보나 주장을 제공하고 있어 이들의 영향력에 포위된 두 세대간에 대화가 불가능해 진다는 것이다. 최근에 보여준 방송매체의 급격한 변화도 세대간 대화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토론광장을 마련하는데 실패함으로서 그 영향력을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나는 6070세대에 속하면서도 미디어 광장은 2030광장을 찾고 있다. 그러니 동료들과 만나도 정치 대화는 할 수가 없다. 요즘 같은 선거철에는 정치대화를 피할 길이 없으니 차라리 집에서 칩거하는 편이 낫다. 이제 6070세대도 상당수가 정보화 교육을 마쳤다. 이들이 2030광장에 찾아가고 2030세대가 6070광장에 들려볼 수 있도록 서로 상대방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대화의 광장이 마련될 것이 아닌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