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년도 훨씬 지난 다음에 옛사랑을 다시 만나는 일은 달콤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도 아니고, 추억이 중단된 지점에서부터 못다 한 감정을 이어보기 위해서도 아니고, 희미한 배신의 그림자를 되갚아주는 심정으로 그의 근황을 확인하기 위해서도 아니라는 것을. 그것은 다만 환상 때문이었다.
가장 마지막에 받아 안는 것이 비록 냉소와 환멸뿐이라 해도 환상 따위에 속고 있는 것보다는 그 실체를 직면하는 일이 더 낫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 연희가 전화를 걸었을 때 세중은 덤덤한 목소리로 받았지만 전화를 건 사람이 연희라는 사실을 확인한 순간 잠시 말이 없었다.
그 짧은 침묵의 시간에 대해 길고 다양하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침묵으로 전해지던 저쪽의 떨림, 저쪽의 떨림이 이쪽의 전율과 섞이며 같은 파장으로 진동하던 현상, 몇 초 사이에 영원을 체험한 듯하던 순간적인 몰입…. 그러나 그것들 역시 본질적으로 연희의 내면에 있는 환상에 가까울 것이다.
세중이 '예전 거기' 라고 약속장소를 말했을 때는 그런 기호로 존재하는 기억이 또 다른 환상을 불러일으킬 듯해 예전 거기가 지금도 있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아쉽고 허망하고 박탈당한 것들' 몇 토막)
환상, 환상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에는 '현실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있는 것처럼 상상하는 일' 혹은 '종잡을 수 없는 생각', 곧 공상이나 망상 같은 것이 환상라고 정의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정말 환상은 사람들 생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도저히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그 무엇일까.
아니, 어쩌면 현실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그 무엇이 환상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늘 환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 속 연희의 말처럼 설령 그 환상이 예전의 달콤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함도 아니고, 추억을 이어가기 위함도 아니고, 그 어떤 배신의 감정을 확인하기 위함이 아닌 것이라고 하더라도.
실은… 오래도록 한 사람을 가슴에 담고 있었어. 그동안 결혼하고 아이 낳고 그 아이가 학교에 다니는 시간들이 흘렀지만 마음 가장 은밀한 곳에는 늘 그 사람이 자리잡고 있었어. 그 사람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그리움으로 일상을 버텨온 게 아닌가 싶어. 그 사람이 온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을 때는 내가 누구와 결혼했는지조차 혼돈스러웠어. (아쉽고 허망하고 박탈당한 것들)
환상은 단지 환상일 뿐일 것이다. 환상은 나에게 주어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함이 아니라 가슴 깊숙이 늘 품고 있는 유토피아 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삶이 고달프고 힘겨울 때마다 문득 문득 꺼내보는 그리움, 그 아름다운 그리움을 통해 다시 한번 현실의 나를 비추어보는 거울 같은 그런 게 환상이 아니겠는가.
지난 2001년 11월, 두 권짜리 장편소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을 펴낸 작가 김형경(44)이 다섯 번째 장편소설 <성에>(푸른숲)를 펴냈다.
400페이지 남짓한 이번 소설집은 '아쉽고 허망하고 박탈당한 것들', '보이지 않는 존재와 관련된 일', '마음은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았다', '겨울산에 서 있는 참나무의 생각', '거칠고 광포하고 휘몰아치는 것들', '사랑은 인생에 한 번이면 충분하다'를 포함 모두 14부에 사랑과 성,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치 추리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 이 소설은 40대에 접어든 가정주부 연희가 신문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세중의 사진과 칼럼을 본 뒤 세중을 만나 과거의 기억을 더듬는 장면에서 출발한다. 연희와 세중은 12년 전 성탄절 전날에 여행을 함께 떠났던 그런 사이다.
"너는 그런 사랑이란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겠지. 나도 알아. 환상 때문에 현실의 삶을 망치지도 않았고... 그렇지만 가족이 잠든 시간에 혼자 깨어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있어. 남편과 사랑을 나누다가 서늘하게 도취가 식어내리는 지점, 가족과 식사하다가 바람 부는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는 때가 있어, 내 힘으로 통제되지 않는 그 지점들에 늘 그 사람이 있었어." (아쉽고 허망하고 박탈당한 것들)
12년 전, 연희는 세중과 함께 여행을 떠났다가 폭설로 차도가 막혀 영동고속도로에 있는 어느 휴게실에 갇히게 된다. 그때 둘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이 휴게실 근처에 있는 산속을 헤집다가 외딴 귀틀집을 발견하게 된다. 그 귀틀집의 방 안에는 누군가에 의해 살해된 한 '남자'의 주검과 공책이 놓여져 있다.
그 '남자'의 노트에는 "내 고향은 함북 길주군 목성면 달리리 가는 골이다. 산이 달리다가 가느다란 골짜기 마을을 낳았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라고 씌어져 있다. 그리고 그 '남자'는 세계일주의 꿈을 안고 북한에서 남으로 귀순한 사람이며, 8년째 귀틀집에서 환상의 날개를 펴며 살았던 인물이다.
| | | 작가 김형경은 누구인가? | | | 제1회 <국민일보 문학상> 당선 | | | | "이 소설에 완전히 집중해 있는 지난 이 년 동안 거의 매일 산에 올랐습니다. 조그마한 동네 뒷산이지만, 문학적 과장을 조금 섞는다면, 그 산도 우주를 품고 있었습니다."
작가 김형경은 1960년 강릉에서 태어나 1983년 <문예중앙> 시가, 1985년에는 <문학사상>에 중편소설 '죽음 잔치'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전2권)로 제1회 '국민일보 문학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로는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전2권) <세월>(전3권) <피리새는 피리가 없다>(전2권)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전2권)이 있으며, 소설집으로는 <단종은 키가 작다><푸른 나무의 기억>이 있다. 시집 <모든 절망은 다르다>. | | | | |
또한 그 '남자'의 주검을 옮겨다 놓은 마당에는 눈 속에 묻힌 또 다른 주검 두 구, '사내'와 '여자'로 불리는 시체 두 구가 연희와 세중을 기다리고 있다. 그때부터 연희와 세중은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광기에 가까운 섹스를 하면서 시체 3구의 죽음에 얽힌 비밀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참나무는 만약 그 여자가 산속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저 집의 남자가 죽지 않았을 거라 믿는 모양이지만 박새는 생각이 좀 달랐다. 박새가 참나무보다 한가지 더 아는 게 있다면 동물들의 짝짓기에 관한 것이었다.
동물 수컷의 입장에서는 때로 짝짓기가 죽음으로 가는 직선도로처럼 여겨지는 때가 있었다.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칠 듯 행동할 때도 그렇고, 기어이 암컷을 붙잡아 정신없이 올라탈 때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정액을 방사하는 순간의 탈진과 무위의 상태가 특히 그러했다.
모든 짝짓기에는 이제 죽어도 괜찮겠구나 싶은 순간이 있고, 저 집에 살던 남자도 그러했을 거라는 점이었다. 박새가 짐작하는 것은 저 남자의 죽음은 그의 짝짓기 행위만큼이나 자발적이고 항거할 수 없는 강력한 욕망에서 비롯되었을 거라는 점이고, 그러므로 저들 인간들의 죽음을 누구 탓으로 돌린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는 생각이었다.
('박새가 알고 있는 몇 가지 사실' 몇 토막)
이들 셋의 이야기는 연희와 세중의 기괴하고도 섬뜩한 일주일 동안의 생활과 맞물리며 전개된다. 어찌 보면 이들 셋의 죽음은 연희와 세중의 광기에 찬 섹스로 인해 일어나는 죽음의 욕망과 비슷하다. 또한 시체 3구의 사연을 참나무, 박새, 청설모, 바람이 목격담을 이야기하는 우회적인 형식을 취한다.
"<성에>는 오늘날 거의 절멸 상태에 빠져 있는 유토피아적 사유가 왜 아직도 필요한가에 대한 고집스럽고 장엄한 탐구일 뿐만 아니라, 소설을 포함한 예술이 어떻게 그 절멸 상태의 유토피아를 되불러 와야 하는가를 역설하는 예술가 소설이기도 하다."( 김형중, 문학평론가)
작가 김형경의 다섯 번째 장편소설 <성에>는 사랑과 성, 죽음에 얽힌 거미줄 같은 이야기들을 환상이라는 독특한 매개를 통해 잔잔하게 풀어낸 그런 소설이다. 작가는 이 소설을 통해 환상이란 무엇이며, 환상과 현실이 어떻게 다르며, 환상과 현실은 또한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인가를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환상을 다루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산속에서 살던 그 남자처럼 하는 것인 듯했다. 일상은 치밀하고 안정되게 운용하면서 한편으로는 가장 허황하고 실현 불가능한 일을 꿈으로 설정해두고 그 앞에서 죽을 때까지 청맹과니 흉내를 내는 것이었다." (빛나고 충만하며 서러운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