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층=정치 무관심'이라는 통상적인 등식을 일거에 날려버릴 정도였다. 젊은 네티즌들은 인터넷만 달군게 아니라 컴퓨터 밖 오프라인 세상 속으로 뛰어나와 "투표 참여"를 외쳤고, '투표 번개'를 즉석에서 조직해냈다. 이들은 또 개표방송을 함께 시청하면서 선거축제의 분위기를 이어갔다.
이같은 젊은 네티즌들의 모습을 보고 민경배 전 사이버문화연구소 소장은 이렇게 평가했다.
"정치인들의 신파조 멜로드라마는 흥행 실패로 막을 내렸고, 반면 네티즌들의 톡톡 튀는 시트콤은 흥행 대박을 터뜨렸다."
총선이 끝난 15일 저녁 서울 곳곳에서 네티즌들의 '투표번개'가 열렸다. 이들은 광화문 거리에서, 호프집에서 개표방송을 함께 보며 환호했고, 술잔을 기울이며 앞으로의 정국을 전망하기도 했다.
이들은 대부분 열린우리당과 민주노동당을 지지하고 있어 긍정적인 방송사 출구조사 결과에 밝은 분위기였지만, 실제 개표결과 예상보다 떨어지는 의석 수에 조금은 실망하는 분위기였다.
'디시인사이드' 회원들은 서대문 근처 대형호프집을 통채로 빌려 저녁 6시부터 프로젝트 화면으로 개표방송을 시청했다. 호프집 안에는 마스코트인 '개죽이' 플래카드와 지난 10일 투표참여 캠페인에 사용된 '투표참여' 핸드프린팅 플래카드가 걸려있고, 호프집이 있는 건물 바깥까지 방송 소리와 사람들의 함성이 들렸다.
모자를 쓴 회원 30여명은 개표방송에 따라 후보 이름을 연호하거나 "우~"하는 야유를 던지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중간중간 "우리는 승리합니다! 전진하고 있습니다!", "OO당이 침몰했다!"는 함성이 들렸다. 싫어하는 후보의 득세에는 "이게 말이 되냐"고 외치기도 했다. 이 술집에서는 '물은 셀프'다.
같은 시간 광화문 근처 호프집에서는 여성 포털사이트 '마이클럽' 회원들이 번개를 하고 있었다. 플래카드나 피켓은 없었지만 회원들의 열기는 '디시인사이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자 회원들은 함성을 질렀다. 취재를 간 기자에게도 "기분이 좋다"며 맥주를 한 잔 건넸다. 이들은 이날 내내 투표율을 높이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투표 참여하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냈다고 한다.
연예인 이니셜 맞히던 네티즌, 정치에 눈을 돌리다
17대 총선은 어느 때보다 '햏자'들의 움직임이 바쁘던 선거였다. 인터넷 게시판을 떠돌던 정치 패러디물이 투표참여 활동으로 이어지고 오프라인으로 터져나왔다. 이들의 활동에 불을 붙인 것은 역시 국회에서의 탄핵안 가결이다.
애초 '마이클럽' 사이트에는 정치 게시판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탄핵안 가결 이후, 원래 'A양' 'J양' 등 스캔들의 주인공인 연예인 이니셜이 주요 주제였던 '종알종알 연예계' 게시판에 정치 관련 글이 쇄도했다. 결국 사이트 운영자 측은 며칠 후 '탄핵을 말한다'는 게시판을 신설했다고 한다.
이 사이트 회원들은 게시판을 통해 탄핵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가 "나도 광화문에 나갔다", "난 내일도 갈 것"이라며 행사 참여후기를 밝혔고, 자연스럽게 촛불행사에도 함께 참여하게 됐다. 총선 날에는 아예 개표방송 번개까지 열었다.
이번 총선에서 활약상이 가장 뛰어났던 것은 누가 뭐래도 '디시인사이드' 회원들. 이들은 '정치갤러리'나 '시사합성갤러리' 등을 통해 정치인들의 발언을 관련 동영상이나 사진화면으로 정리해 유포시켰고, 이를 비꼬는 패러디물도 만들었다. "물은 셀프"라는 유행어도 인터넷에서 탄생했다.
급기야 이 사이트의 회원인 '하얀쪽배'는 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아 전문시사작가와 아마추어 네티즌의 차이, 네티즌의 표현의 자유의 한계 등 여러가지 논란을 불러일으키도 했다. 해당 사이트는 물론 포털사이트 다음의 까페에서도 '하얀쪽배 구속반대운동'이 펼쳐졌다.
회원들은 여러차례 '개죽이'가 그려진 깃발을 들고 촛불행사에 나섰으며, 지난 10일에는 '무적의 투표부대' 캠페인을 벌이며 투표참여운동에 열을 올렸다.
네티즌들은 투표가 가까워오면서 메신저와 핸드폰 메시지, 전화통화 등을 통해 주변 사람들의 투표참여를 독려했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하루에 30명에게 전화를 했다", "5명을 설득했다" 등의 활동보고가 이어졌다.
@ADTOP@
자발적 네티즌의 흥행 대박... '알바'등 악성 의견 해결해야
네티즌들도 17대 총선에 대한 자신의 역할에 대해 자부심을 나타냈다.
'디시인사이드'의 ID '울트라' 네티즌은 "정치는 엄숙한 게 아니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것"이라며 "국민들이 열린우리당 지지를 통해 민의를 저버린 한나라당, 민주당, 자민련을 벌준 것인데 열린우리당이 오해하면 안 된다"고 말했다.
'마이클럽' 사이트의 ID '에어리얼' 네티즌은 "여성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은 선입견이다,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는다, 우리나라가 냄비가 아닌 뚝배기라는 자부심이 생긴다"며 "17대 국회의원들은 책임감을 갖고 일해야 한다, 국민들의 감시와 관심이 쉽게 사그러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탄핵정국과 총선을 거쳐 활성화된 온라인광장이 이후 얼마나 자유로운 토론의 장으로 나아갈지는 미지수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인신공격성의 글을 꾸준히 올리는 소위 '알바'의 활동도 활발하다. 다른 당을 지지하는 사람에 대해 욕설을 퍼붓거나 지나치게 감정적인 대응, 색깔론 등으로 토론의 본질을 흐리는 경우도 많다.
ID '통키' 네티즌은 "탄핵안 가결 이후 엉뚱한 글이나 욕설을 올리면서 의사소통을 방해하는 사람이 늘었다, 논리도 없으면서 집요하게 똑같은 글을 올린다"며 "고의성이 보여서 보상을 받으면서 개입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소위 '알바'를 의심했다.
민경배 전 소장은 네티즌들의 '정치 참여'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한국의 네티즌들은 이미 인터넷을 통해 스스로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의사를 표출하며,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충분히 단련되고 다양한 경험을 축적한 역전의 용사들이다. 그들은 시나리오에 따라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엑스트라가 아니라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느끼는 대로 거침없이 표출하는 록 콘서트장의 군중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