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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서 있는 상라봉 전망대로 오르는 가파른 일주도로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가 서 있는 상라봉 전망대로 오르는 가파른 일주도로 ⓒ 오창석
어느 날 옹기를 가득 실은 배가 섬에 들어 왔다. 옹기 상인 무리 중에는 허드렛 일을 하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오랜 항해에 지친 외로운 소년은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 알지 못할 힘에 이끌려, 섬 사람들의 수호신인 '당각시'를 모신 당산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뭍의 냄새가 그리웠고 아직은 엄마의 가슴팍이 그리운 나이였다.

소년은 '당집' 옆 노송에 걸터 앉아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소년의 눈에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것은 개울가 물오른 가지를 꺾어 만든 버들피리의 소리였고, 집 뒤켠 대숲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였다. 애절한 곡조의 파편들이 주위를 흔들어 깨웠다. 당각시마저 소리에 몸을 뒤척였다. 그녀는 소년의 피리 소리에 반해 버렸다.

흑산도 진리 당산에 있는 진리당에는 '피리소년'의 화상이 놓여 있다.
흑산도 진리 당산에 있는 진리당에는 '피리소년'의 화상이 놓여 있다. ⓒ 오창석
그 뒤로 옹기배는 섬을 떠날 수 없었다. 떠나려고만 하면 당각시의 저주로 세찬 바람이 불었다. 상인들이 제를 올리고 물었다. 그녀는 "피리 소년을 놔두고 가라"고 했다. 상인들은 몰래 떠나 버렸고 버려진 소년은 몇날 며칠을 바다를 향해 울며 피리만 불다 죽었다.

천주교도들에 대한 박해 사건인 신유사옥(辛酉邪獄)에 연루된 손암 정약전은 1801년 흑산도로 유배를 왔다. 그리고 그로부터 16년이 지나 그가 죽을 때까지 당각시는 정약전을 보내 주지 않았다. 그가 기거하며 사람들을 가르쳤던 서당에 오르는 골목길은 아주 좁고 구불구불 했다. 어쩌면 그가 산 세월처럼 꿈틀거리며 역류하는 듯하다.

복원한 사촌서당은 정약전이 마을 아이들을 가르친 곳으로 동생 정약용이 보낸 현판이 걸려 있다.
복원한 사촌서당은 정약전이 마을 아이들을 가르친 곳으로 동생 정약용이 보낸 현판이 걸려 있다. ⓒ 오창석
동생 정약용이 또 다른 유배지에서 써서 보내준 현판 아래 앉아,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했을 것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박해하는 시대를 탓하며 울분과 격정이 뒤섞인 번민의 날을 보냈을 것이다. 기골이 장대한 데다 '말술'이었다고 전해지는 그는 동네 사람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어울렸다고 한다. 그런 친화의 결과, 그는 현지에 자생하는 155종의 수생 동식물을 조사한 <현산어보>라는 독창적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면암 최익현의 유허비
면암 최익현의 유허비 ⓒ 오창석
면암 최익현은 1876년 일본과의 강화도조약 체결에 반대했다가 이곳에서 3년여 귀양살이를 했으며,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유배'라는 형벌의 시간을 보냈다. 이곳이 귀양 온 이들에게 형벌의 공간이었듯이 여기에 살던 사람들에게도 그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았을 성싶다.

이곳은 신석기 시대 유적까지 발견되는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역사의 격변기마다 강제 이주와 입도(入島)가 반복되는 수난을 겪었다. 그런 고립과 단절의 역사는 많은 생채기를 남겼다.

80년대까지 조기를 중심으로 하는 '흑산도 파시'가 열렸을 때만 해도 이곳은 풍요로웠다고 한다. 많을 때는 2천여척의 배들이 예리항에 정박했다고 하니 '개들이 입에 돈을 물고 다닐' 정도로, 불야성의 항구에는 선원과 술집과 아가씨들로 넘쳐 났다. 영화 주제가였던 이미자의 '흑산도 아가씨'(1969년)는 고립과 절망의 심경을 잘 드러내고 있다. 사람들은 그 가사가 술집 여인들이 인생의 종착역으로 생각한, 절해고도의 섬에까지 흘러 온 서러운 삶을 노래했다고 믿었다.

조기와 고래파시로 융성했던 흑산도 예리항
조기와 고래파시로 융성했던 흑산도 예리항 ⓒ 오창석
남몰래 서러운 세월은 가고 물결은 천 번 만 번 밀려드는데
못 견디게 그리운 아득한 저 육지를 바라보다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한없이 외로운 달빛을 안고 흘러온 나그넨가 귀양살인가
애타도록 보고픈 머나먼 그 서울을 그리다가
검게 타버린 검게 타버린 흑산도 아가씨


해발 226m의 상라봉 전망대에서는 장도는 물론 멀리 홍도까지 보인다.
해발 226m의 상라봉 전망대에서는 장도는 물론 멀리 홍도까지 보인다. ⓒ 오창석
예전에는 돛배로 순풍을 받고서도 15시간이 걸리던 이곳이 지금은 쾌속선으로 2시간이 채 걸리지 않으니 시공간적 제약은 많이 벗어난 셈이다. 그러나 박정희 시절부터 대표적 '헛 공약'이었고, 지금도 20년째 진행중인 흑산도 일주도로 공사는 이곳이 아직까지도 고립과 유배의 땅임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듯싶다.

이곳은 '작은 대륙'이라 불릴 정도로 높은 산과 깊은 골이 이어진 빼어난 경치와 섬을 둘러 싼 기암괴석이 절경을 이루었다. 여기에 고인돌, 신석기시대 패총, 정약전과 최익현의 유적 등 유장하고도 신산한 역사의 흔적들을 두루 만나 볼 수 있다.

이 섬에 유배왔던 이들은 모두 당각시가 불러 들이고 떠나지 못하게 한 것은 아닐지 엉뚱한 상상을 해 보았다. 그런데 그만 상상은 현실이 되고 말았는데, 나는 다음날 폭풍이 불어 섬을 나가지 못하고 말았다.

흑산항의 야경
흑산항의 야경 ⓒ 오창석
지금도 당집 안의 당각시 옆에는 소년의 초상이 함께 걸려 있고, 그 곁의 한 서린 소년의 무덤에는 이상하게도 풀이 자라질 않는다. 가끔 이곳을 지나는 관광객들이 소년이 추울까 하여 덮어 준 마른 솔잎만이 무덤 위에 수북하다. 실은 큰 소나무 밑이라 그늘이 져서 풀이 자라질 못할 뿐인데도, 왠지 뒷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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