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님, 강수영 형님이 총에 맞았어요."
44년 전 한 후배의 급작스러운 말이 아직도 그의 귓가에 맴돈다.
1960년 4월 19일 민주화혁명 당시 생생한 기억의 파편들이 김강현(62·부산 경남공고 교사)씨 머리 속을 스쳐갔다. 바로 오늘(19일)이 자신의 경남공고 12기 동기인 고 강수영 열사가 경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었던 날이기 때문이다.
4.19혁명 당시 부산 민주화 항쟁의 불을 붙였던 경남공고의 학생들 중 한 명이었던 김강현씨는 현재 자신의 후배들을 가르치는 모교의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세월은 흘렀지만 1960년 4월 19일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의 관련 자료와 사진들을 지금까지도 고이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강현씨는 다시 급박했던 44년 전의 기억을 되새기기 시작했다.
부산 경남공고 학생들, 민주화 수호를 위해 거리로 나서다
고 강수영열사.
고인은 독재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한 19살의 열혈 고교생이었다.
1960년 4월 19일, 부산의 각 고등학교 학생들이 주체가 된 시위행렬은 전포동에서 문현로타리, 자성대까지 어깨동무를 하고 거리행진에 나섰다. 그 뒤를 이어 시민들도 합세해 다함께 "부정선거 규탄하고 이승만 물러가라"를 목 터지게 외쳤다.
60여명의 완전무장한 경찰들과 자성대에서 대치하게 된 시위 행렬은 "학교로 돌아가라"는 경찰의 종용에도 굴하지 않고 대치했다. "우리는 절대 학교로 못 돌아가겠다"고 외친 시위행렬에 경찰은 허공에 대고 발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경찰이 쏜 38구경 권총 탄환은 고 강수영 열사의 복부를 관통했으며 바로 병원에 옮겼으나 다음날인 4월 20일 19살의 나이로 사망했다.
고 강수영 열사는 부산에서 고등학생으로는 최초의 사망자였던 것이다. 동기였던 김강현씨도 그때 경찰의 유혈진압에 도망가다 맨홀에 빠져 다리를 다쳤다고 한다.
김강현씨는 "오늘 4.19 혁명 44주년을 맞아 감회가 새롭다"며 "그 당시 학생들은 지금이랑 다르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나라를 진심으로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고 강수영 열사에 대해 "순수한 열정을 가슴 속 깊이 간직했었던 투사"라고 전했다.
또한 김씨는 "그 당시 부산시내 파출소 50여곳이 불에 타거나 파손되었으며 부산 데레사여고 여학생들도 경남공고가 데모를 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님들이 지키고 있던 교문을 강제로 열고 나와 시위대에 합류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김강현씨와 인터뷰를 마침 무렵, 그 당시의 19살 학생들이 60대가 되어 다시 경남공고에 돌아왔다. 바로 고 강수영 열사의 추모제에 참석하기 위해 달려온 것이었다. 동기들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의미가 담긴 진솔한 추모제를 통해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고 강수영 열사의 넋을 위로했다.
그리고 그들은 앞으로의 시간을 소중하게 보내자고 다짐하고 달라진 경남공고를 모습을 유심히 둘러본 후 교문을 나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