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안 와 가물어서인지 기암교 아래 계곡 물은 그리 풍부하지 않았지만 기암과 꽃들이 어울린 경치는 그만이었다. 양말 벗고 계곡으로 들어가고픈 충동이 불끈 일어났지만 아직 때가 이른지라 참고 지나가려 하는데 나보다 더 성질 급한 한가족이 벌써 계곡가 바위에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순도순 이야기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매우 정겨워 보였다.
군청 안내판에 의하면 이 지역부터 주방천 계곡을 따라 수달래 군락지라고 하는데 5월 초에 피는 꽃이라 아직 철이 일러서인지 수달래는 보이지 않아 아쉬웠다. 수달래, 수단화, 정식명칭으로 산철쭉이라고 불린다는 이 꽃의 빛깔은 진달래와 비슷하고 생김새는 철쭉과 비슷하다. 진달래보다 늦은 5월에 피며 색깔이 좀더 진하고, 특이하게 꽃잎에 20여 개의 검붉은 반점이 있어 색깔이 더 농염하다고 한다.
이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는 이 꽃은 일설에는 마 장군의 철퇴를 맞아 최후를 맞이한 주왕의 넋이 서려있다고 한다. 주왕의 안타까운 최후, 주왕이 숨을 거두며 흘린 피가 이곳 주방천을 붉게 물들인 그 이듬해부터 물가 곳곳에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꽃이 계곡과 주방천을 따라 피기 시작한 것을 보고 사람들은 주왕의 피가 꽃이 되어 핀 것이라 해서 수단화(壽斷花)라 이름지었다고 한다니 매우 극적이고 아름다운 최후가 아닐 수 없다.
비록 그 농염하다는 수달래는 보지 못하지만 그 대신 내 허전한 아쉬움은 물가에 핀 다른 꽃들이 채워주었고 가끔 갑자기 눈앞에 보였다가 놀란 듯 재빠르게 사라지는 청설모인지 다람쥐인지 구별안 될 정도로 작고 빠른 조그만 동물은 평탄한 산길을 걸어가는 객의 지루함을 달래 주었다.
학과 같은 기상을 지닌 절, 주왕암
얼마를 지났을까, 법구경 녹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보니 주왕암이 멀지 않아 보였다. 계단만 오르면 바로 주왕암이라는 말에 잠시 쉴 겸 계단에 앉아 녹음소리를 들으며 물을 마시니 마시는 물도 달고, 마음이 절로 편해진다.
주왕굴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주왕암은 통일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것을 주왕의 아들 대전도군이 부친을 기리는 의미에서 암자명을 주왕암이라고 했다고도 하고, 신라말 낭공대사가 지었다고도 하나 모두 정확하지는 않고 아래의 대전사보다 먼저 지어진 절이라는 것만 유추해낼 뿐이다.
아버지 주왕의 명복을 불보살님께 기원하는 아들 대전도군의 정성이 하늘에 다해서였을까? 암자 입구에서부터 암자를 둘러싸고 하늘을 향해 솟구쳐 오른 봉우리가 심상치 않아 보인다.
봉우리 속에 포근히 쌓여있는 문간 모습을 보며 암자에 다다르는 돌계단을 하나씩 오르려니 마치 내 묵은 악행의 때가 하나하나씩 벗겨지는 것같은 착각이 들었다.
가학루(駕鶴樓)라…. 문득 학을 타고 가는 듯한 모양의 누각이라는 뜻인지 학을 부릴만한 기운이 있는 누각이라는 뜻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중층누각으로 하늘을 나를 것같이 날렵하게 생긴 모습을 보면 꼭 금방이라도 학을 타고 올라갈 듯한 모습으로 보이다가도 솟구쳐 오른 봉우리의 경호를 받는 듯한 모습은 학을 부릴만한 모습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런 저런 의미 모두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 생각하며 나한전에 앉아 있으려니 문득 이 곳에 눌러 앉아 욕심없이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풍광이 아름다웠다.
법구경에서는 "모든 일은 마음이 근본이고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이루어진다. 나쁜 마음을 가지고 말하거나 행동하면 수레바퀴가 말이나 소의 발자국을 따르듯이 괴로움이 그를 따른다 "라고 했는데 이 곳에 있으면 나쁜 마음이 들일이 없으니 나쁘게 행동하는 일도 없을 것이요, 그에 따른 괴로움도 자연히 없어질 것 아닌가?
그곳에서 우연히 마주친 보살님(절의 일 봐주시는 분)에게 "이곳에 살고싶다"고 하니 그렇다면 며칠 쉬어가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을 보니 나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긴 많은가 보다. 하긴 이런 이유로 이 암자는 나옹화상, 도선국사, 무학대사 등 당대를 풍미하는 고승과 최치원, 서거정, 김종직 등 학자들의 수도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풍광에 반해 날 저무는 줄도 모르고 넋놓고 있으려니 한 스님이 다가와 몽롱하던 정신을 일깨워주었다.
"처사는 무슨 일을 하시길래 혼자 오셨습니까?"
"…(웃음)"
"음, 무슨 좋은 일을 하고 계시나 보군요?"
"아니오, 그냥 여행이 좋아서 이리 저리 다니고 있습니다만 어쩌나, 너무 늦었네요. 이곳에서 밤이 깊어지면 어떡하나…."
"저 폭포 쪽에도 인가가 있으니 그리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일정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겠네요. 스님, 성불하십시오."
스님 덕분에 내 주제를 깨닫고 다시 본연의 목적으로 돌아온 나는 여기서 멀지 않은 주왕굴을 향해 출발했다. 주왕굴 가는 길은 철제난간과 난간의 연속이었다. 지금 이 난간을 밟고 오르는 사람들은 편하지만 이 험한 곳에 이런 형태의 철제난간을 세우려면 꽤 힘이 들었으리라는 생각이 들 무렵 주왕굴과 만나게 된다.
주왕의 최후가 서린 주왕굴. 주왕이 세수하려 한 동굴벽의 폭포수는 지금 가뭄이라서 수량이 세지 않지만 끊임없이 물이 쏟아지고, 그 옆에는 폭포수를 받기 위해 긴 나무막대에 붙은 물컵이 색다르게 걸려있다. 동굴 속에는 누군가가 가져다놓은 정체불명의 조각과 촛불이 밝혀진 제단이 차려져 있었다.
주왕굴, 패자는 말이 없지만…
비교적 협소한 주왕굴을 보니 한사람도 발을 뻗고 쉬기 힘든 협소한 이 곳에서 숨어지냈다는 주왕의 신세가 애처롭기 그지없다. 동시에 한사람이 들어가기도 협소한 지하웅덩이에서 숨어 있다가 미군에게 잡힌 후세인의 넋나간 모습이 갑자기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 | | 여행정보 | | | |
다른 볼거리
주왕산은 산 모습에 비해 등산로는 평이해서 등산을 좋아하지 않는 분들에게도 부담이 없는 코스가 많습니다. 시간이 충분한 분은 이 외에도 주왕산 제 1폭포부터 제3폭포의 비경과 전기없는 마을 내원동까지 등산을 하신 후 달기 약수와 인근 주산지를 들르시는 것도 좋습니다.
주산지는 최근 김기덕 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의 촬영지로 사용되어 널리 알려져 지금 주차장 정비공사가 한창입니다. 주왕산 인근만 가볍게 여행하실 분이라면 근처 주왕산 온천욕으로 하루의 피로를 푸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먹을거리
이곳에는 달기 약수와 갖가지 약초를 넣어 끓인 닭백숙이 유명합니다. 어느 음식점을 가나 풍부한 나물 반찬과 달기약수로 푸르스름해진 밥을 맛보실 수 있습니다.
정보
5월 초 수달래 만개시기에 맞추어 청송군에서 개최하는 주왕산 수달래제가 매년 열립니다. / 김정은 | | | | |
패자의 최후는 어디에서나 비참했다. 당시 개개인의 시시비비를 따지기에 앞서 후세인에게 가하는 미군들의 예의없는 행동들을 보며 과연 미군이 점령군 내지 승자라는 이름으로 저렇게까지 인간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또 그 모습을 떳떳하게 전세계에 내보내는 속셈이 무엇일까 한참 생각한 적이 있었다.
마치 "우리에게 대들면 이꼴이 된다"는 식의 의식적인 위협으로도 보였고, 우리는 강하다는 식의 자만감의 표현일 수도 있는 그 장면을 바라보는 제3자도 이렇게 낯뜨거운데 하물며 직접 관련 있는 이라크 국민들의 심정은 오죽 했을까?
'구석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고 지금 격화되고 있는 이라크 사태 원인 또한 미국이 이라크 국민들의 자존심을 건드린 이유도 크다고 생각한다.
승자와 패자, 승자가 있으면 반드시 패자가 있기 마련이고 강한 것이 이기는 것이야말로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나 역사는 잊지 않고 또 한가지를 넌지시 일러주고 있다. 역사에서 영원한 승자란 존재하지 않으며 어제의 승자가 오늘의 패자가 된다는 것을….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지 마라.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마라.
미워하는 사람은 만나서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다
-법구경 중
어느덧 어두워진 청송, 시간에 쫓겨 울진으로 향하는 밤길은 멀고 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