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차 유엔인권위원회는 한국 등 53개 이사국들이 참가한 가운데 지난 19일 캐나다와 영국 등 34개국이 공동으로 제안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하고, 각국이 이를 반영해 관련 법률과 관행을 재검토할 것을 촉구했다.
이는 종전 결의안이 채택되었던 지난 2002년보다 공동제안국이 20개국이나 늘어난 것이다.
결의안은 "모든 사람은 사상과 양심, 종교의 자유, 차별 받지 않을 권리, 생명과 자유, 개인의 안전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음이 세계인권선언과 시민적,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에 인정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과 관련된 자국의 현행 법률과 관행들을 재검토할 것 △양심을 이유로 병역을 거부했던 사람들에게 사면, 복권 등을 제공하고 그러한 조치가 법률과 관행에 있어 실질적으로 이행될 수 있도록 할 것 등을 촉구했다.
특히 이 가운데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아르메니아 등 내전의 상처를 입은 국가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는 남북 분단 대치상황을 이유로 그간 양심적 병역거부 및 대체복무제 도입에 대한 논의조차 본격화하지 않은 한국사회에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다.
한국은 현재 매년 700여명의 젊은이들이 병역거부로 실형을 언도 받고 있으며, 올 2월 현재 521명의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전국 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것으로 나타나 이에 따른 대책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개선을 위한 연대회의’가 최근 밝힌 자료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인 1939년 최초의 처벌 기록이 보고된 이래 지금까지 1만여명의 청년들이 병역거부로 처벌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단연 세계 최고 수준이다.
물론 이중 대부분이 ‘여호와의 증인’ 등 특정 종교신자들이긴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개인적, 정치적 동기에 의해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때문에 이제라도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공동의 실질적 노력과 해결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논의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이러한 가운데 지난 2001년 12월 여호와의 증인 신자를 제외하고는 최초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를 공개 선언했던 오태양(29)씨를 만나보았다.
불교신자이자 평화운동가인 오씨는 병역거부 선언 이후 희망학교, 자비의 집 등에서 우리 사회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쳐왔다. 또 국제 평화·인권·난민지원센터 ‘좋은 벗들’에서 통일사업 담당 실무자로 일하며 이라크전 반대운동 등을 전개해 왔다.
오씨는 “이전보다 많은 국가들이 결의안에 찬성했다는 것은 그만큼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것이 세계적 대세라는 것을 의미한다”며 이번 결의문 채택이 “그간 병역거부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한국 정부에 어느 정도 압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또 오씨는 국내적으로는 당 차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했던 민주노동당이 국회에 진출하면서 입법화 논의가 본격화 될 것으로 기대했으며, 국제적으로는 이와 관련한 연대활동이 강화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그는 특히 스페인에 이어 온두라스도 이라크에서의 철군을 검토중인 것과 관련, “국익 차원이든, 미국과의 동맹관계 차원이든, 이라크 민주화라는 명분을 가지고 가든, 이라크 민중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 군은 결국 점령군으로 파병되는 것”이라며 “파병은 다시 논의되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7일 1심 2차 공판을 마치고 오는 5월 3차 공판을 기다리고 있는 그는 “법적, 제도적 도입은 현실적으로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며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젊은이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있는 만큼, 정부나 정치권 그리고 시민사회가 이 문제를 보다 발전적으로 바라보고 해결해 나가기를 바란다”고 희망했다.
| | "이제 '양심적 병역거부권'은 세계적 대세" | | | 양심적 병역거부자 오태양씨 “명분 없는 이라크 파병 반대” | | | |
| | | ▲ 양심적 병역거부 최초 공개선언자 오태양 씨 | | - 그간 어떻게 지내왔나?
“2001년 12월 양심적 병역거부를 공식 선언한 이후 경불련 산하 빈민 어린이집 ‘희망학교’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빈곤층 노인 지원기관인 ‘자비의 집’에서 어르신들을 보살피는 등 여러 복지시설에서 사회봉사활동을 펼쳐왔다. 또 병역거부자들의 모임인 ‘전쟁없는 세상’에서 이라크전 반대운동, 병역거부를 알리는 관련 활동을 전개했다.
2002년 연말부터는 국제 평화·인권·난민지원센터 ‘좋은 벗들’에서 통일사업 담당 실무간사로 일하고 있다. 대학 재학시절부터 해온 북한동포돕기운동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매년 부처님의 가르침과 나의 삶을 점검하며 마음을 닦는 수련 프로그램인 ‘8일출가 열반정진’ 수행을 얼마 전 마치기도 했다.”
- 사회봉사활동을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아직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들의 삶이 어렵고 힘들다. 그에 반해 사회, 혹은 국가적 차원에서 약자나 소수자들에 대한 구제방안, 제도적 보호망들은 미비한 실정이다. 그들을 바라보는 일반의 인식이나 제도적, 재정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분에서 어려운 형편이다. 특히, 인적자원의 인프라 구축이 가장 시급하다.
이러한 봉사활동을 하면서 우리 사회에 대체복무제가 도입된다면 어떤 면에서는 이 제도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것은 국가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제60차 유엔인권위에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에 관한 결의안이 채택됐는데, 이번 결의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국제사회나 각국이 병역거부 문제에 대한 제도적, 법적, 사회적 보호장치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를 두고 ‘가이드라인’을 설정한 것이 지난 1988년 회의였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이번에 많이 보완되고, 보다 많은 국가들이 참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고 본다.
재작년 우리나라 대표들이 파견되어 한국에서의 병역거부 현황에 대해 국제사회에 알렸고, 당시 세계적으로 파장이 컸다. 통계 수치상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병역거부자들이 처벌을 받은 나라가 우리나라다. 현재도 수감자가 가장 많은 실정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병역거부권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또한번 유엔 차원의 결의안이 채택됐는데, 이전보다 많은 34개국이 결의안에 찬성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것이 세계적 대세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본다.”
- 여호와 증인을 제외한 국내 최초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이번 결의안 채택을 바라보는 개인적 의미도 클 것 같은데?
“이러한 국제회의에 병역거부자들이 직접 참석해 자신들의 입장을 표명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고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나라에서도 몇몇 병역거부자들이 이번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준비했었지만, 병역거부자로 기소된 사람들은 출국이 제한되는 관계로 참석하지 못하게 되어 아쉽다. 유엔의 이번 결의문 채택이 그간 병역거부 문제에 소극적이었던 한국 정부에 어느 정도 압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 이번 결의안 채택과 관련, 앞으로 국내 정치권이나 사회에서의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움직임은 어떻게 흘러갈 것이라고 전망하나?
“이 문제를 어떻게 ‘운동’으로 만드느냐가 관건이다. 실질적인 영향력을 얼마나 미칠 수 있을 것인가는 미지수인 것 같다.
국내적으로 본다면 국회 차원에서 그간 입법발의가 몇 차례 시도가 되었다가 좌초되었으나, 병역거부운동의 초기 과정부터 함께 힘을 모았던 임종인 변호사가 이번 총선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당 차원에서 양심적 병역거부를 지지하고, 대체복무제 도입을 찬성했던 민주노동당이 의회에 진출하면서 입법화 논의가 본격화될 것으로 본다.
사회적으로도 국제사회의 기준이나 자료들이 많이 제시될 수 있을 것 같다. 국가 인권위원회 차원에서도 이러한 문제를 이제는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이다.
국제적으로는 유엔 결의안이 채택됨으로써 여전히 병역거부 문제가 심각한 남미나 북유럽 국가권, 이스라엘 터키 등지에서도 이슈화 되면서 병역거부와 관련한 국제연대활동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강화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이라크 파병을 바라보는 시각은?
“물론 반대 입장이다. 국익 차원이든, 미국과의 동맹관계 차원이든, 이라크의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가지고 가든, 이라크 민중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 군은 결국 점령군으로 파병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라크 민중의 독립의지를 꺾는 점령군으로 기억되는 게 아닌가 우려된다.
실제로 대한민국 국익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명분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도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설령 우리가 미국과 동맹관계라 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전쟁에 동맹관계로 참가하는 것이 과연 정당하고 정의로운 것인가 하는 문제를 따져봐야 한다. 결코 찬성할 수 없다. 파병은 다시 논의되어야 한다.”
- 그간 병역거부의 정당성을 알리는 일에 힘쓸 것이라고 했는데, 병역거부의 정당성은 어떻게 설명될 수 있나?
“그들이 진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양심과 사상에 진실성을 가지고 이같은 행동을 취하는 것이다. 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자기 진정성과 양심에 기초하여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다.
이들이 병역거부의 대가로 이 사회에 부과되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책임을 기피하고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평화적이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보다 다른 형태로 국가안보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젊은 인력들이 우리 사회의 소외되어 있는 소수자와 약자들을 위해 일정 기간 봉사한다는 것 또한 의미 있는 일 아니겠는가? 우리 주변을 좀더 평화적이고 인간적인 사회로 만들고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 총선이 끝나고 곧 17대 국회가 시작된다. 특히 제3당으로 급부상한 민주노동당은 지난 2001년 당 산하 인권위원회를 통해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고, 군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라'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했는데, 양심적 병역거부자로서 17대 국회에 바라는 점과 기대하는 바는?
“서로 대립각을 세우며 싸우기 보다는 상생의 정치를 펼쳐갔음 좋겠다. 각 정당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되, 같은 것들을 찾아보려는 노력을 하기 바란다.
병역거부 문제가 헌법재판소에 계류된 지 2년이 넘는 상황인데도 아직까지 심의조차 이뤄지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는 현실이 하루속히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민감한 사안이기에 헌재가 결정하기 어렵더라도 그 사이에 여전히 수많은 젊은이들이 병역거부자로서 전과자가 되고 있다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헌재에서도 법의 형평성에 맞는 심의가 조속히 이루어졌으면 한다.
결국 병역법을 개정하고, 대체복무 입법을 하는 것은 국회의 몫이다. 이 문제에 대해 국회의원들이 힘을 모아서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양심을 지키면서도 우리 사회에 폭넓게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으면 좋겠다.
지금 상황에서는 입법 발의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는가 하고 전망한다.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진전이라고 본다. 잘 풀려갈 것으로 기대한다.”
- 앞으로의 법적 절차는?
“영장이 기각돼 불구속 재판을 받고 있는 상태다. 병역거부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이 받아들여지면서 2002년 6월을 마지막으로 중단됐던 재판이 지난 4월 7일 재개되어 1심 2차 공판을 마쳤다. 5월 24일 3차 공판이 잡혀있는데, 이때는 병역거부 재판에는 한번도 없었던 최초의 증인신문이 있을 예정이다. 이르면 6월경 선거공판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늘었는데?
“그간 11명의 병역거부자들이 생겼다. 이 가운데는 반전운동가도 있고, 생태주의자 농부도 있다. 그들과 ‘전쟁없는 세상’이라는 별도의 모임을 가지면서 서로의 고민도 나누고, 발전방안도 생각한다. 대체복무와 관련된 대국민 홍보캠페인, 대외집회 등 병역거부의 정당성에 대해 국민들에게 알려나가고, 그 대안을 실천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모임을 갖고 있다.”
- 국민들에게 하고픈 말은?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병역거부자는 수백년 전부터 지구촌 곳곳에서 있어왔다. 이를 통해 본다면 병역거부는 시대적, 지역적 조건을 뛰어넘어 인간이라면 가질 수 있는 인간 행동양심 발로의 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러한 이해와 기초 위에서 병역거부자들은 국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의무를 단순히 회피하는 것이 아닌, 좀더 다른 형태로 자신의 신념과 양심이 지켜지는 선에서 국가적 의무를 다하고자 하는 것이다.
병역거부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 쉽게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다. 나름대로 자기 진정성을 가지고 진지한 자기 인생의 고민을 두고 내린 결정이다. 대체복무제 도입이 인간의 기본권으로 인정되는 국제적 흐름 속에서 이제는 우리 사회도 이 문제에 관해 관용을 베풀 때가 된 것 같다.
법적, 제도적 도입은 현실적으로 그다지 어려운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그러함에도 지금도 여전히 많은 젊은이들을 범법자로 만들고 있다. 정부, 정치권 그리고 시민사회가 이 문제를 보다 발전적으로 바라보고 해결해 나가기를 바란다.” / 김범태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