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신 노짱’으로 불리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민주노동당 노회찬 당선자는 “지금까지 인생에서 최고의 성공은 아내를 만난 것”이라고 말한다.
노동운동가로 마음껏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아내 김지선씨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운동을 하고 있는 김씨는 “함께 노동운동을 하며 만남을 유지해왔기 때문에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컸다”고 말한다.
노 당선자는 “모든 일은 각자 상황이 되는 사람이 하면 된다. 집안일 역시 집에 먼저 들어와 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라며 평등부부임을 한껏 과시했다.
‘한 판에서 계속 삼겹살을 구워 먹어서 판이 새까맣게 탔다’며 정치 판갈이를 주장했던 노회찬(48) 당선자. 국민을 대변하는 속시원한 말들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노 당선자지만 정작 본인은 ‘지금까지 인생에서 최고의 성공은 아내를 만난 것’이라고 말한다. 노 당선자와 여성운동을 하고 있는 아내 김지선(49·여성의전화연합 조직위원)씨를 만나 삶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노동운동 현장서 꽃핀 사랑
“아내를 보면 고양되는 느낌을 받아요. 좀더 나아지는 사람이 되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노회찬 당선자는 “아내를 만나 질적으로 향상된 인생을 살았으니 더 이상의 성공은 없다”고 말한다. 아내 김지선씨 역시 ‘맞는 말’이라며 고개를 끄덕인다. 16년 간 결혼생활 동안 돈 벌어오라는 잔소리 한마디 안하고 하는 일마다 믿고 존중해 줬으니 자기 만한 여자가 없다는 것이다.
“자유롭게 해줬어요. 하고 싶은 온갖 운동 마음대로 다 하도록 말이에요. 우리는 서로 노동운동을 하며 동지 관계로 만남을 시작했기 때문에 서로 이해할 수 있는 폭이 컸죠.”
이들 부부는 지난 1987년 인천의 노동운동 현장에서 만났다. 당시 노 당선자는 인천에서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었고, 김씨는 인천해고노동자협의회 간부로 활동하고 있었다. 김씨는 삼원섬유, 대성목재, 동일방직 등에서 노조 간부를 지내며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현장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었던 인물. 노 당선자는 그때 우연히 아내를 보았고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한다.
“친한 선배 한 분이 자꾸 이 사람을 만나보라는 거예요. 거절도 한두 번이죠. 계속 재촉하니까 하는 수 없이 남편을 소개받는 자리에 나가게 됐어요.”
동지 관계로 만나 수배 중 초라한 결혼식
노 당선자는 집요하게 구애를 하기 시작했지만 노동운동에 여념이 없었던 김씨는 번번이 만남을 거절했다. 여성에게 결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노동현장에서 몸으로 체험했던 그였기에 결혼에 대한 거부감과 두려움이 내재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선배가 국회의원에 출마하자 선거를 돕기 시작했고, 이후 점차 각별한 관계로 발전해 나갔다. 그리고 이듬해 결혼식을 올렸다.
노 당선자는 당시 수배중인 상태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식구들만 모인 자리에서 조촐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어떤 삶이 펼쳐질지 충분히 예상하고 한 결혼이었기에 특별히 달라질 것도 없었다. 서로 번갈아 감옥에 들락거렸고, 남은 사람은 뒷바라지를 하는 노동운동 동지로서의 삶이 이어졌을 뿐.
그러나 이들 부부는 자신들이 힘들거나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이 가난했고 모든 노동운동가들이 고단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침에 딱 눈을 뜨면 듬직한 남편이 옆에서 자고 있고, 우리 집이라 부를 수 있는 집도 있고, 장롱도 있고… 참 좋았어요. 매일 도망 다니면서 아는 사람 집에 얹혀 사느라 변변한 내 것이 없었거든요.”
부부 함께 할 시간없어 아쉬워
특별한 수입은 없었지만 매달 노 당선자는 고정적으로 생활비를 마련해 왔다.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정기적으로 생활비를 마련할 것’을 아내에게 요구받았기 때문이다. 노 당선자는 신혼 초 7만원을 생활비로 보탰는데 요즘에도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10여 년이 넘은 지금도 70만~80만원을 생활비에 보탤 뿐이다.
김씨 역시 한국여성의전화 등 여성계에서 활동하며 70만원 가량 보수를 받아 생활에 보태고 있다. 적은 수입이지만 생활이 어렵지는 않다. 아이가 없기 때문이다.
정작 어려운 문제는 같이 할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었다. 대의를 위해 힘겹게 활동하는 상대방을 토닥거려줄 시간조차 넉넉지 않았던 것이다.
김씨는 “한참 상대의 일을 존중하며 달려왔는데 어느 순간 외로움이 밀려왔다”고 고백한다. 부부는 늘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또 따로’ 생활하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50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남편과 함께 하고 싶은 욕심이 많이 생겼다는 것.
“여자들은 관계를 굉장히 중요시하는 성향이 있잖아요. 작은 것에 감동하고 기뻐하는 것 말이죠. 남편이 상황이 안 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함께 할 시간이 적다는 사실이 서운하고 속상하고… 그랬어요.”
고민도 많았다. 여성운동을 하는 여성으로 남편에 대한 의존도를 버리고 일에 더욱 몰두할 것인가, 아니면 ‘나를 좀 봐 달라’고 설득을 할 것인가를 두고. 그는 결국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더욱 몰입했고 몇 년이 지난 지금 그 선택이 옳았다고 확신한다. 꼭 일심동체가 아니더라도 같은 곳을 바라보는 동반자가 되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부부가 될 수 있음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중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이들 부부는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일년에 한두 번 동해나 제주도로 여행을 떠난다. 그동안 쌓인 회포도 풀고 서로 애정도 확인하는 차원에서 부부가 계획한 것이다. 노 당선자는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투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아내를 배려하는 일도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집에 남은 사람이 집안일 하죠”
무언가를 특별히 요구하기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며 사는 것에 익숙해진 부부인 까닭에 10년이 훨씬 넘는 결혼생활 동안 제대로 싸워 본 적도 없다. 아내가 2박 3일 집을 비워도, 집안일을 미뤄놓고 있어도, 전혀 싸움거리가 안 된다.
“모든 일은 각자 상황이 되는 사람이 하는 거예요. 집에 있는 사람이 집안일을 하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노 당선자는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서로 영역에 충실하다 보면 집안일은 뒤로 밀리기 일쑤니 그것은 필요한 사람이, 형편 되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아내는 자신이 많이 양보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은 사람은 자신이니 가사일도 더 많이 했고, 내조도 더 많이 했다는 것이다.
김씨는 여성운동을 한다고 해서 ‘모든 것을 꼭 반반으로 해야 한다’는 식의 강경한 태도는 취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자신이 편한 대로 자신이 현명하다고 판단하는 대로 실천에 옮기면 된다고 말한다. 그런 스타일 때문에 시부모님도 여성운동을 하며 집안일에 소홀한 며느리에게 핀잔 한번 주지 않으셨다고.
두터운 존중과 신뢰. 이것이 이들 부부의 모토다. 부부이기 이전에 동지로서 인간으로서 배려하고 이해한다면 평등부부라는 거창한 타이틀을 걸지 않아도 절로 평등한 부부관계가 성립된다는 것을 일찍이 몸으로 터득한 덕이다.
인터뷰를 마친 뒤 서로 바라보며 웃는 이들 부부에게서 민주노동당이 외치는 ‘평등한 세상’과 이들 부부의 삶이 무척이나 닮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