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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서 안흥으로 내려온 지 이제 한 달이 지났다. 나무도 어릴 때 옮겨 심어야 뿌리를 잘 내리는데 곧 아궁이에 땔감으로 쓰일 즈음의 나무를 멀리다가 옮겨 심어서야 어디 착근(着根)이 잘 되겠는가.
일단 이곳으로 내려온 이상 나는 하루 빨리 시골생활에 적응코자 애쓰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버려야할 것은 도시적인 생활습관이요 자세, 그리고 사고방식이다. 하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다. 40여년의 도시적인 생활을 하루아침에 버리기란.
며칠 전, 서울의 한 모임에서 '쫑파티'를 한다고 회원인 나에게 참석 여부를 타진해 왔다. 원거리를 핑계로 불참을 통보했으나 모임 전날 담당 직원이 전화를 직접 걸면서, 나의 참석 여부 확인보다 이런저런 인사를 하고는 “그럼 선생님, 내일 사무실에서 뵙겠습니다”하고 통화를 끊어버렸다. 내가 다시 그에게 전화를 걸어서 불참 통보를 하기에는 너무 몰인정한 사람 같아서 웃어 넘겼다.
여태 운전면허증이 없는 나는 혼자 움직이려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 안흥과 서울은 교통이 불편하다. 동서울터미널로 바로 가는 직행 버스는 하루에 다섯 차례뿐이다. 그걸 이용치 않으려면 횡성 가는 버스를 타고 새말휴게소나 횡성터미널에 가서 서울 가는 버스로 바꿔 타야 한다.
그래서 이곳에서 서울 한번 나들이하려면 차타는 시간만 왕복 대여섯 시간에다 준비하고 기다리는 시간까지 셈하면 하루가 그냥 지나게 마련이다.
이튿날, 일부러 다른 일거리를 하나 더 만든 후 서울로 가서 '쫑파티'에 참석하고, 서울 집에서 잠을 잔 뒤 다음날 용무를 마치고 동서울터미널로 갔더니 몇 분 차이로 그만 오후 1시 5분 버스를 놓쳐버렸다.
다음 버스는 오후 5시 45분으로 무려 네 시간은 더 기다려야 한다. 몇 번 이용했던 편법으로, 새말휴게소에서 쉬는 강릉행 버스 기사에게 부탁하여 그 버스에 승차했다.
승객은 나까지 다섯 명으로 버스는 텅 비었다. 더욱이 평일인데다가 낮 시간이라 고속도로도 시원하게 뚫려서, 버스 회사에게는 미안했지만 한편으로는 기분 좋게 달렸다.
산과 들의 나무와 풀들이 봄을 맞아 초록의 풍성한 잔치를 한바탕 걸쩍지근하게 베풀고 있었다. 달리는 버스 차창 밖으로 그 다채롭고 미묘한 초록의 빛깔을 마냥 즐기는데 차는 어느 새 새말휴게소에 닿았다.
기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말을 남기고 건너편 간이 시내버스 정류장으로 갔다. 안흥 ~ 횡성 ~ 원주 간을 오가는 시내버스는 하루에 10여 차례 운행하는 바, 한 시간에 한 차례 꼴로 운행하고 있다.
국도 갓길에 간이 버스 정류장은 예쁘게 잘 지어놓았는데 정류장 안에는 아무리 살펴도 버스 운행시간표가 없다. 한 30분 기다리면 탈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최악의 경우 한 시간 기다릴 셈으로, 간이 버스 정류장에서 맥없이 버스를 기다렸다.
승용차 한 대가 나에게로 다가와서 젊은이가 치악산 길을 물었다. 내가 지난해 여름 한번 가본 적이 있는 치악산 강림 부곡지구 태종대를 떠올리면서 그곳을 가르쳐 주자, 가는 길이면 동승하자고 해서 승용차에 올랐다. 곧 도로 이정 표지판에서 치악산 구룡사가 나오자 그는 갑자기 그곳에 간다고 하기에 나는 거기에서 내렸다.
그곳은 버스 정류장이 아니라서 안흥 쪽 국도를 터들 터들 걸어서 오원리 간이 정류장에 이르렀다. 거기서 다시 안흥행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그곳에도 버스 시간표가 없었다.
족히 30분은 더 기다렸는데도 그때까지 버스가 오지 않았다. 마침 가방 속에 지난 번 미국 취재노트가 있어서 첫 장부터 끝 장까지 다 훑으면서 아직 쓰지 못한 얘기를 머리에 다 그려도 버스가 오지 않았다.
정류장 의자에 앉아 한 눈을 팔다가 버스를 놓칠세라 바깥에 나와서 버스가 오는 쪽을 바라보며 국도 갓길에서 기다렸다(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오전에는 배차시간이 촘촘하고 특히 오후 4시 전후는 배차 시간이 한 시간이 훨씬 넘었다).
한 시간은 더 기다렸다. 나는 그때부터 국도에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을 들었다. 어쩌면 차들은 모두 하나같이 나를 못 본 척 외면하면서 씽씽 달렸다.
앞으로 내가 운전면허증을 딴 후 승용차를 운전한다면 시골길을 달리다가 손을 들고 있는 이를 가능한 태워드려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10여분 그러다가 손드는 일도 지치고, 한편으로는 창피스러워 손을 내리려고 하는데 하얀 승용차(매그너스)가 멎으면서 앞좌석의 물건들을 뒷좌석으로 옮긴 후 차 문을 열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안흥까지 갑니다.”
“타십시오.”
“감사합니다.”
고마운 마음에 내 신분을 밝히자 그도 명함을 주면서 속내를 얘기했다. 그(고 아무개·39)는 안양의 한 중등학교의 교사로 재직하다가 20일 전에 퇴직했다고 했다. 나도 한 달여 전에 퇴직했다고 했더니 같은 처지라고 함께 웃었다. 그런데 그가 이제 39세로 한창 나이에 퇴직한 사연이 궁금했다.
“아내의 요양을 위해서….”
“네?!”
뜻밖에 대답에 나는 놀라면서 침묵했다. 그새 차는 매화산 전재(안흥면과 우천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름)를 매끄럽게 넘었다.
“어디 가는 길입니까?”
“강림면 월현리에 집을 짓고 있는데 거기 가는 길입니다.”
그는 초면인 나에게 쉽게 마음의 문을 열고 병중에 있는 아내 얘기를 했다.
그는 KT(옛 한국통신)에 다니는 아내 이 아무개씨와 세 아이를 둔 가장으로 단란하게 살던 중, 지난해 아내가 쉬엄쉬엄 앓다가 뇌암으로 판명되어 병원에 입원 수술을 받은 후 하는 수 없이 퇴사하여 지금은 항암치료 중이라고 했다.
오늘도 아내를 서울 아산병원에 데리고 가서 MRI(자기공명 영상) 촬영을 마친 후, 다시 아내를 집에 데려다 주고 곧장 오는 길이라고 했다.
곧 내 집 동네에 다다랐다. 국도에서 내려서 걸으려고 하다가 그에게 제의했다.
“바쁘지 않다면 내 집에 가서 차 한 잔 드시고 가시지요?”
그는 나를 끝까지 데려다 줄 양인지 쉽게 수락했다.
내 집 찻상에서 아내와 셋이 앉아서 차를 나누면서 그의 이야기를 마저 들었다. 그의 아내는 뇌암 수술을 하였지만, 뇌는 워낙 미세한 부분이라 종양을 모두 제거하지 못했다고 하면서 공기 좋은 곳에서 무공해 자연식과 아울러 항암치료를 하고자 이곳에 오기로 결단을 내렸다고 했다.
아직 아이들도 어리고 앞으로는 일정한 수입도 없기에 새 집에 민박을 하면서 생계를 해결코자 한다면서 아내에게는 황토 방을 꾸며주고, 천연염색을 배워서 그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히고 싶다고 했다. 그의 곁에서 듣고 있던 나의 아내가 천연염색은 자기가 가르쳐주겠다면서 그의 마음 씀에 매우 감격해 했다.
찻잔을 비우고 그는 떠났다. 나는 고마움의 표시로 내 책 두 권을 서명해 주자 그는 정중히 받으며 아내와 함께 꼭 한번 들리겠다는 인사말을 남긴 채 승용차를 타고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후 아내는 한 마디했다.
“그 젊은 사람의 아내사랑을 좀 배우세요.”
가슴을 다친 멧새 한 마리가 훌쩍 날아간 양, 그가 떠난 후 내내 내 마음이 애틋하게 아프다. 머잖아 그의 아내가 건강해져서 네 사람이 내 집 찻상에서 웃으며 차를 마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