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옮겨야 했고, 어머니의 꾸중이 너무 두려워 집에서 가출을 할 궁리까지 했다. 당시 우리집은 아파트 8층이었는데, 시험을 완전히 망쳐서 처음으로 60점대 점수를 받았던 날, 허공을 날아오른 내 몸이 아스팔트 위로 떨어져 산산이 깨어지는 공포에 떨기도 했다.
학창시절 내내 나를 압박했던 공부에 대한 공포와 낙담은 내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공부는 '재미있는 거'라는 사실을 배우기도 전에 공부는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중간고사에서 단 한 문제만을 틀리는 쾌거를 이룩해냈다. 비록 '올백'에는 실패했지만 ‘거의 올백이나 다름없는’ 성적을 만들어 낸 것이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나는 시험지를 펄럭이며 집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어머니의 반응은 예상 밖으로 시큰둥했다. 처음엔 어머니가 뭔가 잘 못 보신 줄 알았다.
‘하나 밖에 안 틀렸어요!'
어머니는 내 마음 속 외침을 듣지 못하셨고 유일하게 틀린 자연 시험지를 보며 내게 말씀하셨다.
“이 문제 답 알고 있었지?”
그제서야 어머니가 시큰둥한 이유를 깨달았다. 틀린 문제는 어머니의 예상 출제문제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그 문제의 답을 알고 있었는데 방정맞은 지우개 탓에 실수를 했다. 어머니는 단박에 그 상황마저도 꿰뚫어보고 있었다.
“이거 엄마랑 같이 공부한 건데 왜 틀렸어? 다음엔 꼭 올백 맞아!”
그 때의 절망감이란 정말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설레던 기쁨도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어머니는 단 한 문제의 실수를 추궁하고 계셨다. 그래도 열심히 했는데, 칭찬 받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물이 핑 돌았다.
그 후, 나는 공부가 재미없어져 버렸다. 잘 했을 때조차 칭찬을 받지 못한다면 뭐 하러 공부할까. 어린 나는 시험이고 뭐고 다 지겨워져 버렸다.
며칠 전, 큰누나네 갔는데 초등학교 2학년 조카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나는 옛 추억을 떠올리며 무조건 조카를 칭찬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누나는 “함께 공부한 걸 틀려오면 얼마나 화나는 줄 알아?” 엄마의 입장을 강변했고, 어머니도 옆에서 “그건 안 해도 되는 실수를 자꾸 하는 네 성격을 고쳐보려고 한 거야!”라면서 내게 핀잔을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교육문제에 있어서 교육을 받는 사람, 즉 교육의 수용자 입장이 가장 중요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교육의 방식은 수용자 입장에서 고려되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의도가 숨어있다고 해도 수용자에게 전해지지 못하는 ‘일방적인 선의’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교육학 용어가 있다. 이 효과는 ‘자신의 기대대로 이루어진다’는 자기 충족적 예언(self-fulfilling prophecy)을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는 자신이 조각한 여인상과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래서 신에게 여신상을 진짜 살아 숨쉬는 여인으로 만들어달라고 간곡히 기도를 드린다. 그의 기도에 감동한 신은 여인상을 사람으로 만들어줬고, 피그말리온은 그 여인과 사랑을 이루었다.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이 그의 바람대로 살아 숨쉬는 여인이 되었듯이, 아이들도 교사와 부모의 기대대로 변화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피그말리온 효과'의 핵심이다.
로버트 로젠탈과 레노이 제이콥슨의 저서 <피그말리온 효과>를 보면 재미있는 실험이 나온다. 1968년 두 교육학자는 학생들을 무작위로 뽑아 지능검사를 하면서, 그들에게 ‘지적 능력이나 학업성취 가능성이 높은 학생들’이라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학생들의 성적이 평균보다 훨씬 높게 향상되었다. 주위의 기대와 칭찬이 그들의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열쇠가 된 것이다.
칭찬을 받으면 칭찬을 받은 대로 되고, 꾸중을 받으면 꾸중을 받은 대로 된다. 말이란 무서운 것이다.
시험점수로 아이의 능력을 평가하는 잘못된 관점을 버리자. 그리고 항상 아이에게 말해주자.
“넌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내가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