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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블로그에서 '취업과 진학 사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이 글을 쓴 이는 이공계 전공자인데 ‘취업이냐 대학원이냐’하는 고민은 비단 그만의 고민은 아닐 겁니다. 대학원에 진학했던 인문대학 졸업생으로서, 취업을 하고 5년간 직장 생활을 했던 사람으로서, 취업과 진학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는 인문대학 후배들을 위해 이 글을 씁니다. 작년(2003년)에 썼던 '인문대학 후배들에게' 라는 글과 비슷한 색깔을 띠게 되겠군요.
취업이냐 대학원이냐 하는 고민을 현재 시점의 취업 환경에 비추어 본다면, 상당 부분은 취업의 기회가 워낙 적다 보니 대안으로서의 대학원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일 겁니다. 저는 학부 졸업 후 취직이 아닌 대학원을 택했습니다. 대학원을 다 마치지 못하고 도중에 취직을 했고요. 98년 여름에 졸업했으니, 6년이 지났군요. 그 때의 제 모습을 상상하며, 그간의 경험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취할 건 취하시고, 버릴 건 버리시기 바랍니다.
대안으로서의 대학원은 없다
졸업반이 되면 취업에 대한 걱정과 심리적 압박이 심해지죠. 이 시점에서 '대학원'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먼저 말하고 싶은 건, 대학원이 백수를 면하는 도피처가 되어선 안될 뿐더러 보다 나은 조건으로 취업을 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없다는 점입니다.
두 유형 모두 개인에게는 독이 될 뿐입니다. 대학원은 오로지, 오직 공부와 학문을 위해 존재합니다. 당위론일 뿐더러 현실도 그렇습니다. 다른 이유가 첫 번째 진학 사유로 존재한다면 대학원 생활은 괴로움의 연속일 것이며, 지금 겪는 중압감보다 훨씬 더한 압박 속에서 살아갈 것입니다.
후배가 취업과 진학 사이에서 갈등한다면 저는 무조건 취업을 권합니다. 취직은 어려운 일이지만 만일 할 수 있다면 한 살이라도 젊을 때 하는 게 좋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하게 되면 취업의 기회는 오히려 더 멀어지지만, 취업을 한다면 나중에라도 대학원 진학의 기회를 다시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두 가지 선택을 놓고 고민한다는 것은 그에게 공부에 대한 욕심과 열망은 없거나 아주 적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학생에게 대학원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닙니다. 만만하게 대학원 생활을 하는 사람이 있다면 헛살고 있는 거죠. 오로지 연구자가 되기 위해 대학원 공부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어려운 고비를 현명하게 넘을 수 있고, 힘들어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공부가 간절하다면 또 한 번 불효자가 되십시오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대학원 진학을 망설이는 분들이 있습니다. 충분히 이해하지만, 핑계에 불과합니다. 제가 봤던 이들 중,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지 않으면서 공부하는 대학원생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대부분의 대학원생들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힘든 환경에서 공부를 합니다.
본인이 감당할 수 있는 부분이라면 고민도 안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음 학기부터 경제적인 부분은 본인이 모두 해결한다는 각오와 계획으로, 부모님으로부터 첫 학기 등록금 지원을 받는 것도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공부하는 게 너무 즐겁고 뚜렷한 목표가 있다면, 그래서 반드시 대학원에 진학해야 한다면 부모님께 또 한번 불효자가 되십시오. 아무리 어려워도 대학원에 꼭 진학하시기 바랍니다.
좀 더 깊이 있게 공부하다 보면 시각도 넓어지고, 인맥도 생기고, 그 분야의 다양한 기회들도 생길테니까요. 부모님께 죄송한 생각은 모두 접고, 오로지 본인만 생각하고, 본인만 아끼세요. 본인만을 위해 열심히 연구하십시오. 그러다 보면 어떤 게 진짜 부모님을 위하는 길인지 깨닫는 시점이 올 겁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대학원에 진학한다는 것은 일반 기업체에 취직하는 걸 포기한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백수를 면하기 위해 진학했다면, 학부보다 훨씬 비싼 등록금을 내고 2년간의 안락을 얻는 대신 2년 뒤 모진 절망감을 돌려 받게 될 겁니다. 좀 더 준비를 하여 좀 더 나은 조건으로 취업하기 위해 진학했다면 중대한 착오입니다.
대학원에 진학하면 취업 전선에서 개인의 경쟁력은 오히려 퇴보합니다. 2년 뒤엔 학부 졸업생보다 취업 경쟁에서 분명히 밀립니다. 회사에서 학부 졸업생을 신입 사원으로 뽑는 것은 전문가를 뽑는 게 아닙니다. 전문가가 될 만한, 말하자면 ‘될성 부른’ 인재를 뽑는 것이죠. 전문가를 원했다면 그 분야의 베테랑 경력 사원이나 연구원을 뽑겠죠.
석사 학위를 딴다고 해서 전문가로 인정해 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경력으로 인정해 주지도 않죠. 기업에서 가장 채용하기 어려운 지원자가 바로 석사 학위 소지자들이라는 말은 괜한 얘기가 아닙니다. 2년 뒤에 기업에 취직하기 위한 목표로 대학원에 진학하려고 한다면 심각하게 다시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잘하는 게 없다'와 '뭐든 잘 할 수 있다'의 차이
인문대학 졸업생들이 겪는 가장 일반적인 고민은 사회로 나가기엔 내가 한 없이 부족해 보이고, 또 남들보다 뚜렷하게 잘하는 것도 없다는 불안감과 자신감 결여일 겁니다. 저도 그랬고, 아마 많은 졸업생이 그럴 겁니다. 인문대학은 의대 혹은 사범대 같은 특수 분야와 다르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부생들이 기본적인 인문학적 소양만 갖고 사회에 나옵니다. ‘될성 부른’ 기초적인 소양을 갖추도록 도와주는 일. 인문학부의 역할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당연히 모든 면에서 부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문대 졸업생들은 모든 면에서 부족한 자신의 초라함만을 보려고 하지, 모든 면에서 소양을 두루 갖춘 자신의 모습은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뚜렷하게 잘하는 것이 없다는 인문대학 졸업생들의 고민을 과감히 뒤집는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인문대학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안고 있을 이 고민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부분에서 개인의 명암이 갈립니다. 발상의 전환은 실천하지 않는 이들에겐 쉬운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진짜 학사 학위는 삶의 좌표 설정
사회는 학부 졸업생들에게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신입 사원으로 학부 졸업생을 뽑는 회사는 그에게 전문성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전문가가 될만한 자질이 있나 없나를 보는 거죠. 학점과 토익 점수는 그저 면접 대상자의 수를 줄이기 위한 편리한 수단일 뿐입니다. 최고 학점자와 토익 최고 점수 보유자를 채용 1순위로 두고 있는 기업은 단 한 곳도 없을 겁니다. 만일 있다면, 좋은 인재를 뽑을만한 역량이 되지 않는 회사입니다. 학점과 토익 점수에만 매달려 대학 시절을 보냈다면, 남은 시간만이라도 본인의 재능을 발견하고 삶의 좌표를 다시 설정하는 데 투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취직이냐 대학원이냐 하는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정해진 좌표대로 항해하면 되니까요. ‘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 ‘제 적성이 뭔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라는 고민은 학부와 함께 졸업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런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졸업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와 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에 빗댈 수 있습니다.
삶의 목표가 뚜렷하다면 3년 뒤, 5년 뒤, 10년 뒤, 이렇게 중장기적으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할 수 있게 되고, 첫 직장으로서의 회사 규모나 유명세에 연연하지 않게 되며, 쓸데없이 높아진 눈높이를 바로잡게 되어 그만큼 좀 더 쉽게 취업의 기회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회사이든 한 분야에서 꾸준히 일하다 보면 그 일에 대한 전문성이 생깁니다. 3-4년쯤 열심히 일하고 나면 판단에 따라 이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필요에 따라 대학원과 직장 생활을 병행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경우의 대학원은 학부 졸업 후 진학하게 되는 일반대학원과는 많이 다르죠. 공부에 대한 열망이 다시 불타 올라 일반대학원에 진학할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모아둔 돈도 조금 있고, 사회 생활을 하며 다양한 종류의 사람들과 교류도 하며 경험을 쌓았으니 몇 년 늦긴 했지만 깊이 있는 공부를 위해서는 오히려 학부 졸업 예정자들보다 여러모로 좋은 면도 많을 것입니다.
취업이든 진학이든 온 몸을 던져야 합니다. 대학원에 진학하려면 모든 시간과 노력을 공부만을 위해 쏟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취업하려면 대안으로서의 대학원 따위는 아예 머리에서 지우고 배수진을 쳐야 합니다. 진정으로 온몸을 던질 각오가 섰다면, 그리고 인문대학 졸업생으로서의 내가, ‘잘 하는 게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 아니라 ‘어떤 일이든 잘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섰다면, 당신의 선택은 어떤 쪽이든 모두 현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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