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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한창 일을 하고 있는데 둘째 바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내 목소리를 확인하기가 무섭게 바다는 대뜸 울음부터 터뜨렸다. 그 뒤에선 쌍둥이 큰딸 하늘이의 울음소리도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바다는 “빨간 마스크가…” 어쩌구 하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목이 꺽꺽 거릴 정도로 심하게 울며 말하는 터라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확히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빨간 마스크 운운하는 걸로 미루어 또 유치원에서 친구 중 누군가에게 무슨 무서운 얘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전날도 그랬다. 퇴근 후 집에 돌아가니 두 녀석이 난데없이 “우리 오늘은 빨간 마스크 쓰고 엄마 아빠 옆에서 자고 싶어요” 하며 살금살금 눈치를 살폈다. 좀처럼 없던 일이라 그 까닭을 물었더니 두 녀석은 이구동성으로 “엄마 아빠 옆에서 빨간 마스크를 쓰고 자지 않으면 귀신이 나타나 입을 찢는대요”라는 대답을 했다. 누가 그러더냐고 다시 묻자 유치원 친구가 말을 해주더라는 것이었다.

아내나 내가 듣기에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얘기였지만, 아이들 입장에선 또 그렇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아이들은 정말로 빨간 마스크의 존재를 믿는 듯했고, 많이 무서워했다. 아내와 나는 그런 아이들을 위해 친구가 장난을 치느라고 그런 얘기를 꾸며낸 모양이라고 안심을 시켜줬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그런 엄마 아빠의 얘기를 믿고 안도하는 듯했다.

그런데 그 다음날 유치원에 다녀오자마자 아이들은 다시 빨간 마스크 타령을 하며 무서움에 겨워 목소리까지 꺽꺽 대며 내게 전화를 걸어온 것이었다. 이번에는 밤에 잠잘 때 뿐만 아니라 아이들끼리 학원엘 가거나 놀이터에 갈 경우 빨간 마스크가 나타나 입을 찢는다고 했다며 한층 두려움이 커진 듯 서럽게 울어댔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빨간 마스크라는 것은 꽤나 유명한 존재였다. 빨간 마스크를 쓴 여인이 그 주인공인데, 길을 가다가 누군가를 만나면 “나 예뻐?”라고 물어본 뒤 상대가 ‘예쁘다’고 대답을 할 경우 빨간 마스크 뒤에 감춰진 귀밑까지 찢어진 입을 보여주며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그래도 예쁘다고 답하면 상대 입을 찢어서 죽인다는 것이었다.

반대로 상대가 ‘예쁘지 않다’고 대답을 할 경우 빨간 마스크는 식칼을 꺼내들고 쫓아와 상대의 목을 잘라 죽인다는 것이었다. 정말 끔찍한 괴담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이야기는 1978년 12월 일본 기후현에서 비롯된 것으로 전해진다고 한다. 당시 일본에서는 자녀들을 교습소에 보내는 게 유행이었는데, 생활이 넉넉지 않아 자녀를 교습소에 보낼 형편이 안된 부모가 교습소 보내기 붐이 사라지게 하기 위해 빨간 마스크 괴담을 퍼트렸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이틀 연속으로 난데없는 빨간 마스크의 공포에 시달리게 된 큰딸 하늘이와 둘째 바다는 아내와 내가 뭐라고 달래도 막무가내로 울기만 했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와 나는 뭔가 방법이 없을까 고심을 거듭했고,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유치원 원장 선생님에게 도움을 청해 보기로 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그런 얘기가 오가고 있는 지도 전혀 몰랐다는 원장 선생님은 빨간 마스크 얘기에 매우 놀라워하며 하늘이와 바다를 바꿔달라고 한 뒤 한동안 무슨 얘기인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원장 선생님과의 얘기가 끝난 뒤 우리 아이들은 거짓말처럼 울음을 뚝 그쳤다.

아마도 ‘빨간 마스크는 누군가 지어낸 얘기일 뿐이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정도의 얘기였을 것인데, 엄마 아빠가 얘기할 때는 통 못 믿겠다는 반응이더니만 선생님 말은 그래도 꽤나 믿음이 갔던 모양이다. 엄마 아빠를 물 먹인(?) 공포의 빨간 마스크도 선생님한테만큼은 당할 수가 없었다고나 할까?

그리고 다음날 아이들 유치원에서는 선생님들에 의해 대대적인 ‘빨간 마스크 퇴치작전’이 펼쳐졌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처음 소문을 퍼뜨렸던 한두 아이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제 언니 오빠한테 분명히 들었다며 ‘빨간 마스크는 있다’고 강력히 저항하는 소동도 있었지만, 선생님들의 분투에 힘입어 빨간 마스크는 아이들 가슴에서 힘없이 밀려나고야 말았다고 한다.

가정의 달이자 스승의 달인 5월, 정말로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자칫 잘못했으면 빨간 마스크의 공포에 물들 뻔 했던 우리 가정을 평화롭게 지켜주었다. 빨간 마스크 퇴치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모든 선생님들에게 진심으로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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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만평] 빨간 마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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