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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먼타임스
[송옥진 기자]5월 광주민주화운동 24주기를 맞아 여성대표로 가두방송을 하며 광주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던 전옥주씨를 만났다. 전옥주씨는 계엄군의 탱크가 몰려오기 직전 시위대의 여성대표로 전남도지사와 협상을 하는 등 항쟁에 앞장서다 1980년 5월 22일 정보요원들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체포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언론 인터뷰는 4년 만에 처음이라는 그는 광주민주화운동 관련단체들의 공식활동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경기도 시흥에서 네 아이를 올곧게 키우며 그 나름의 광주정신을 이어 가고 있다. 그런 그에게 ‘광주’는 그리움이자 아픔으로 남아 있었다.

5·18 유공자보상 여성차별에 분통 한때 시의원 출마

1980년 5월 ‘우리 아들 딸이 죽어 가고 있습니다. 광주 시민이 나서 광주를 지킵시다’라며 광주 시민의 심장을 파고들었던 가두방송 목소리의 주인공 전옥주(55·당시 이름은 전춘심)씨가 인터뷰를 통해 광주와 관련단체에 “행방불명된 사람을 찾아야 할 때”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한때 5·18여성동지회를 만들며 여성모임을 주도하기도 했던 그는 특히 여성들의 단결과 활약을 강조했다.

전옥주씨는 “계엄하에서 여성들은 똘똘 뭉쳐 밥을 해내고 항쟁을 이끌었다. 그때의 힘을 발휘, 행불자를 찾아 그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도록 여성이 앞장서자”고 강조했다.

하지만 전옥주씨는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왜곡보도로 ‘계엄군의 간첩’으로 몰리고 ‘돈 받고 기자를 만난다’는 헛소문이 돌자 언론을 기피해왔다. 그런 그에게 1995년 지방자치단체 선거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당시 전옥주씨는 ‘여성의 분함’을 풀기 위해 고향 광주에서 시의원 출마를 결심했다. 정부가 5·18 유공자 보상 과정에서 여성을 차별한 데 대한 한스러움과 항쟁의 역사기록에서 여성의 역할이 보조적인 위치로 묻혀버리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당시 여성의 평균 임금이 남성의 2분의 1이라며 보상금이 2배 이상 차이가 났다. 그 기간에 남녀가 어디 있고 누가 더 하고 덜했겠나”고 묻는다.

그러나 동지들이 그의 진의를 오해하며 출마를 반대했고, 남편마저 그와 아이들 곁을 떠났다. 그 일로 상처를 안고 서울로 돌아온 그에게 세상은 수도 없이 사기를 쳤다.

동지·남편마저 등돌려...“이젠 아이 키우는 재미로 살죠”

전씨는 “차 속에서 6개월을 살기도 했고, 전기가 끊어진 집에서 아이들은 라면으로 연명한 날도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런 날이면 송도 외곽도로로 가서 혼자 목놓아 울다가 돌아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에게 한 갓난아기가 맡겨졌고 그는 그 아이를 보듬으며 살아왔다. 이제 네 살이 된 송도의 갓난아기는 “엄마가 슬프면 나도 슬퍼”하며 그의 눈물을 닦아준다. 한없이 내주고 자신의 것은 챙길 줄 모르는 우리네 어머니처럼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광주에 내주고, 네 아이를 바르게 키우려는 사랑으로 살아가고 있다.

마음의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지만 전옥주씨는 “항쟁 기간 동안 물 한 방울이라도 나눠 먹었던 동지들이다. 이제는 친동기간처럼 살다 가고 싶다”며 동지들과 화해를 원했다.

그는 5월 18일이 다가오면 아이들을 데리고 사나흘 먼저 망월동을 찾는다. 아이들에게만은 역사의 현장이었던 광주의 참모습을 알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마지막 소원이라면 소리소문 없이 끌려가 행방불명으로 신고된 희생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 문제이다. “누가 더하고 덜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다 고생했다”며 “더 늦기 전에 행불자를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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