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지난 1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114주년 세계노동절대회에서 비정규직 철폐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지난 1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1만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제114주년 세계노동절대회에서 비정규직 철폐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1년을 끈 참여정부의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은 경제 기득권층의 공세에 완패해 속 빈 강정이 돼버렸지만, 재벌과 부자신문들은 내용은 둘째치고 정부가 비정규직 대책을 발표한 것 자체가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다.

<중앙>과 <조선>은 5월 19일치 사설에서 "기업 쪽에선 정부가 시범을 보인 대로 따라오라는 식의 압박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며 이는 "민간부문 비정규직의 처우개선 부담을 몽땅 기업들에 떠맡긴다는 의미"(조선)라며 "기업이 사면초가의 상황에 놓여 있는데 정부가 앞장서 비정규직 문제를 들고 나온다면 기업의 사기는 떨어지게 된다"(중앙)고 걱정했다.

<한국경제>는 한술 더 떠 정부의 비정규직 대책을 "국민의 세금을 이용한 생색내기" "정부가 앞장서 혼란을 부추기는 일"이라 단정하고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결코 안될 말"이라고 못박고 있다.

열 중 일곱 부동산투기로 재산 불린 '투기형 인간형'

대기업 총수 주식지분 정보제공업체인 <에퀴터블>(www.equitable.co.kr)이 지난 해 5월 기준으로 발표한 데 따르면 조선일보사 방상훈 사장은 추정재산이 1930억원으로 우리나라에서 24번째 부자이며, 660억 원의 재산을 갖고 있는 중앙일보사 홍석현 회장도 93번째 부자라고 한다.

<한국경제>는 전경련, 그 중에서도 현대자동차가 최대 지분을 갖고 있는 재벌단체 기관지 성격이 강하다. 이 신문들이 '경제와 기업 걱정'을 빌어 지키려는 게 다름 아닌 사주를 포함한 한국 부자들의 기득권이 아닌가 의심되는 대목이다.

보유주식 가치를 평가해 발표한 <에퀴터블> 집계를 보면 한국 최고의 부자는 삼성 이건희 회장으로 재산이 1조4280억원에 이르고, 이 회장의 아들 이재용 씨도 9230억원으로 세 번째 부자라 한다.

또 이건희 회장 부인 홍라희 씨가 3710억원으로 12위, 딸 부진·서현·윤형씨가 각 1790억원으로 공동 27위이고, 이명희 신세계 회장(5970억원·8위), 이재현 CJ그룹 회장(4740억원·9위) 등 삼성 이씨집안 재산을 합치면 무려 4조8340억원에 이른다고 한다. 뒤를 이어 롯데 신씨가문(2조6240억원), 현대 정씨가문(2조원), 엘지 구씨가문(1조9090억원) 등 4대 재벌가문의 재산은 11조원을 훌쩍 넘어선다.

이들을 포함한 한국 100대 부자들은 100명 중 63명이 단 하나의 혼맥도에 포함될 정도로 두 세 단계를 거치면 세 명의 전직 대통령까지도 사돈으로 연결되는 '피맺음의 정경유착'이란 특징을 보인다고 한다. 열 중 일곱이 부동산 투기로 재산을 불린 '투기형 인간형'도 한국 부자의 독특한 특징이라 한다.

또 이들이 재산을 불리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 바로 비정규직, 여성, 영세업체, 저학력 노동자, 외국인 이주 노동자들에 대해 온갖 차별을 가하며 형편없이 낮은 임금을 주고 부려온 '노동착취형 경영'이다.

한국 노동시장 유연성 OECD 20개국 중 3위

통계를 보면 이미 재벌과 기업들은 1980년대 중반부터 사람을 쓸 때 둘 가운데 하나는 비정규직으로 고용해 '주면 주는대로 시키면 시키는대로' 부리고, 자르고 싶을 때 언제든 잘라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해 이 추세는 잠시 주춤했으나 외환위기 뒤에는 아예 정규직은 뽑지 않을 뿐 아니라, 있는 정규직도 내쫓아 비정규직으로 채워왔다. 그 결과 지금은 전체 노동자의 56%인 786만명에 이르는 극빈층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양산한 것이다.

재벌과 부자신문들은 덜 주고 더 많은 일을 시켜 더 높은 이윤을 얻기 위해 비정규직을 채용해온 진짜 이유를 가리고 '노동시장 유연화 만이 살길인데 한국 노동시장은 지나치게 경직돼 있다'는 그럴듯한 논리를 펴고 있다.

하지만 지난 해 2월 미국의 포브스(Forbes)지가 4가지 지표를 비교해 분석한 데 따르면 한국의 노동시장 유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0개 국가 가운데 미국·캐나다에 이어 3위로 나타났다. 최근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김유선 박사가 9가지 지표를 비교 분석한 결과 한국은 미국에 비해서 8개 지표에서 유연성이 증가했고 고용 변동성과 상관성에서도 OECD 1위 미국을 앞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재벌단체는 생산성 지표와 임금통계를 엉뚱하게 대비하는 방법으로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뛰어넘는 임금인상을 거듭해 경제를 어렵게 하고 있다는 논리를 펴지만, 제대로 비교한 통계를 보면 명목임금이나 실질임금 모두 생산성에 향상에 못 미치고 그 결과 노동소득 분배율이 외환위기 이전 수준도 회복하지 못하고 있고 빈부격차도 벌어지고 있다.

제조업체의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이 외환위기 이전(1990-97년) 12.6∼14.0%에서 외환위기 이후(1998-2002년) 9.7%∼10.1%로 줄어든 데서도 비정규직이 늘어난 결과 인건비 총액이 그만큼 줄어들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더구나 같은 기간 비정규직을 급격히 늘려 인건비를 줄일 수 있었지만, 매출액 대비 영업이익율은 6.5%∼8.3%에서 5.5∼7.4%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미 낡은 경쟁력이 돼버린 저임금 - 저부가 가치 체제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비정규직을 늘려야 기업의 경영성과가 나아진다'는 논리도 성립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경제를 위해서는 내수를 살려야 한다지만, 정작 내수를 얼어붙게 한 것은 786만 비정규직을 비롯한 다수 서민의 절대 빈곤이기 때문에 경제를 위해서도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역논리가 설득력을 얻는다.

내수 얼어붙은 건 비정규직 등 다수 서민의 절대빈곤 때문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함 때문인지 재벌과 부자신문들도 '문제는 비용을 누가 댈 것이냐'라며 한발 물러서면서도, 자신들의 비용부담을 피하려 비정규직 문제의 책임을 다른 이들에게 떠넘기고 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대기업 노동자 책임론이다.

비정규직을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주범이 돼버린 대기업 노동자는 누구일까. 최대한 넓힌다면 아마도 대학을 나와 웬만한 기업의 사무직으로 취직했거나 공고를 나와 생산직으로 일하고 있는 '종업원 500명 이상을 고용한 기업에 다니는 직장인'이라 하겠다. 그 수는 2002년 현재 127만 명이다.

물론 실제로 이들은 많게는 10인 이하 사업체나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노동자 임금의 두 배를 받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500인 이상 사업체에서 일하는 샐러리맨이나 생산직 노동자들의 생활과 노동조건이 다소 나은 것이 사실이나, 비정규직을 몫을 가로 챈 주범이거나 양보해야 할 부자와는 거리가 멀다.

나아봤자 사회보장제도가 잘 갖춰져 있어 대학까지 의무교육에 무상의료는 물론, 한국과 같은 땅 투기 광풍도 없어 집 문제도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맹국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삶의 질보다도 못한 경제규모 세계 12위 대한민국 대기업 노동자의 솔직한 현실이다.

노동운동을 똑바로 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노조가 적극 나서야 한다는 주장은 백 번 옳지만, 그것과 비정규직 고통의 책임이 정규직에게 있다는 논리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비정규직 고통의 원인은 노동착취형 기업 경영에 있으며, 그 수혜자는 우리사회 맨 꼭대기에 있는 재벌을 비롯한 부유층들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 양보해야 할 당사자도 이들이다.

검찰의 차떼기 정치자금 수사에서 끝내 처벌을 피한 재벌 총수들의 모습에서, 참여정부 비정규직 대책을 속 빈 강정으로 만든 데서 한국사회 절대 강자인 재벌과 부유층들의 하늘을 찌르는 힘은 뚜렷이 느껴진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추진하는 출자총액제한제도, 금융지배 폐해 방지대책 등 최소한의 개혁정책도 경제부처에 밀려 정부안에서조차 암초에 부딪히고 있는 모습도 마찬가지다.

냉전의 우산을 쓴 군사독재에서 벗어나 정치의 본령인 사람 먹고사는 문제를 둘러싼 정책을 눈여겨볼수록 경제 기득권층의 절대 영향력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요즘이다.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