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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볕햇살이 홍수처럼 좍좍 쏟아져 내리던 날이었다. 마차 한대가 굴라 정문을 통과해 교사들의 작업장으로 향했다. 마부는 온 몸을 회색 천으로 둘렀고 마차에는 시체를 담는 긴 토관이 실려 있었다. 장례용 마차였다.
마차는 작업장 앞에서 세워졌고 거기서 내리는 사람은 부사제장이었다. 우르의 성탑이 파괴될 것이라는 소문을 듣고 급히 내려간 것이 보름 전이었는데 지금 장례마차를 끌고 왔다면 사제장의 시신이 틀림없을 것이다.
교장은 급히 달려 나갔다. 부사제장이 인사를 했으나 그는 대충 고개만 끄덕인 후 먼저 토관 앞으로 다가섰다.
'그대 마침내 니푸르에 왔단 말이지. 죽어 석달만에 이렇게….'
교장은 토관을 어루만졌다. 무척 뜨거웠다. 먼 길을 땡볕에 쪼이며 온 탓일 것이었다. 자신의 가슴에도 슬픔이 열기처럼 울먹울먹 차올랐다. 그는 더워지는 눈시울을 꾹 누르며 부사제장에게 말했다.
"그래도 용케 시신을 거두어오셨구려."
"아, 아닙니다. 사제장님은 그 속에 아니 계십니다."
부사제장은 황급히 변명한 후 토관의 마개를 뽑아냈다. 만약 시신을 실어왔다면 이미 봉한 마개를 아무렇게나 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욱이 지독한 더위였다.
"제가 토관 속에 넣어온 것은 사제장님의 유품입니다. 하도 경계가 삼엄해서 이렇게 실어온 것이지요."
부사제장은 토관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바구니 하나를 꺼냈다. 바구니 안에는 서너 장의 점토서판이 들어 있었고 그는 그것을 교장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들이 바로 딜문에 관한 대사제장님의 기록서판입니다."
딜문에 관한 서판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자료임에도 교장은 아직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부사제장이 다시 일깨워주었다.
"그밖에 수행에 관한 서판도 이 안에 있습니다만, 그것은 제가 다시 정리해서 나중에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럼 사제장의 시신은?"
비로소 교장이 물어보았다.
"걱정 마십시오. 사제장님 시신은 살아 계셨습니다."
"시신이 살아 있다니요?"
"예, 성탑 계단에 앉아 적들을 막고 계신답니다."
"무슨 소리요? 그럼 정말로 살아계시더란 말이오?"
교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사제장이 살아 있다면 얼마나 경하할 일인가? 하지만 부사제장의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아마 그렇진 않을 것입니다. 제 생각엔 영령께서…."
영령이라? 그럼 영령이 스스로 시신을 일으켜 세워 계단에 앉아 있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왕이 아닌 사제장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는가? 저 세상에 갔다 돌아온 신과 왕들은 여럿이 있었다.
엔릴신도 그러했고 이난나, 두무지, 길가메시, 또 백 년 전의 우르 남무 3세 왕도 그랬다. 하지만 우르 남무 대왕은 혼수상태로 저세상을 다녀왔다. 그러니까, 완전히 숨을 놓기 전이었다. 하지만 사제 장의 사망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도 산 사람처럼 계단에 앉아 있었다니.
"좀더 상세히 얘기해보시구려. 어떻게 계단에 앉아 적들을 막으셨는지…."
"예, 그러니까 침략자들이 성탑을 허물려고 장비와 군사들을 동원해서 몰려갔답니다. 한데 그 계단에 뼈만 남은 사람이 가로막고 있더랍니다. 적들은 누군가의 장난인줄 알고 칼을 휘둘렀는데 전혀 부서지거나 꺾이지도 않았고 오히려 계단 위로 옮겨 앉기만 하더랍니다. 불을 붙여 던지면 그 불덩이가 적들에게로 되돌아오고…. 어떻게 해볼 방도가 없자 적들도 마침내 손을 놓았답니다. 아마 이제는 적들도 선뜻 그 성탑을 허물 생각을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다면 부사제장께서는 사제장의 시신을 확인해보셨소?"
"아니오. 저도 밤에 가보았습니다만 저에게는 현신하지 않으셨습니다. 애초에 떨어진 자리에도 아니 계셨고…."
시신도 없었다? 그럼에도 적들이 나타날 때면 뼈골 형상으로 성탑 계단을 가로 막고 있다? 믿을 수 없는 일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 기적처럼 벌어지고 있다. 복수의 전사인 이난나 여신조차도 침묵하고 있는데, 한갓 사제장의 영령이 저항의 길로 나섰다? 신들처럼 사람을 동원하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여기엔 분명 어떤 암시가 숨어있다. 그래, 이미 단일 신의 신전은 다 허물어졌고, 우루크 쿨랍의 가장 거대한 이난나 신전까지 파괴되어도 신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적들은 안심하고 성탑을 겨냥한 것이다.
그들도 알고 있다. 수메르에서 두 번째로 강한 것이 수도 우르의 그 만신전 성탑이라는 것을. 그것만 무사히 허물면 다음은, 그래, 다음은 성지 니푸르가 된다. 사제장은 그래서 일어선 것이다! 니푸르로 향할 적들의 발길을 막기 위해…. 성지 보호와 우리들의 직업완수를 돕기 위함이다!
교장은 급히 등을 돌렸다. 이제는 우리가 서둘러야 한다. 침략자들이 힘을 모으기 전에, 사제장의 영령이 지치기 전에 우리가 먼저 우리의 임무를 완성해야 한다.
해가 유프라테스 강에 누워 멱을 감고 있었다. 낮 동안 뜨거웠던 몸을 식히고 있는 것이다. 교장은 평화의 문 앞으로 나갔다. 그간 작업했던 점토서판들이 길게 세운 갈대 단 위에서 잘 굳어가고 있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단의 점토판은 벌써 태양에 바짝 구워져서 던져도 깨어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졌다. 열흘간만 그렇게 말린 후 초벌로 구워두기까지 한다면 몇 천 년이라도 끄떡없이 보존될 것이다.
교장은 좀 전에 읽은 사제장의 서판을 떠올렸다. 거기에는 딜문이 두 군데로 지목되어 있었다. 바다 아래와 강 위였다. 그 어느 쪽도 딜문이라고 확신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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