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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 사이의 땅


'니푸르는 야자나무 도시였다. 넓은 강과 아름다운 시내가 있었다.
거기에 젊은 청년 엔릴과 젊은 처녀 닌릴이 있었다.(신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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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소포타미아는 '두개의 강 사이에 있는 땅'이란 뜻이다. 두개의 강이란 곧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이며 이 강들은 서북 방향에서 동남으로 흘러 나란히 페르시아 바다로 빠져나갔다(대홍수 전에는 그랬다).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 즉 이 강 사이의 내륙은 긴 협장형(狹長形)으로 그 거리가 약 2천여 리에 달했다.

이 협장형 내륙에서 딜문을 그 상부에 둔다면 시파르가 중간지점, 에리두가 최하단에 있는 셈인데 니푸르는 또 시파르와 에리두의 가운데쯤에 위치해 있었다.
지금은 거의 모든 도시가 강 중턱부터 하류 쪽으로 발전하고, 또 최하류 에리두가 문화의 중심지가 되고 있지만, 전에는 상류 쪽에서도 상당한 문명을 꽃피웠다. 자르모(6500-BC), 하수나(5800-BC), 사마라 등이 크게 번성했고, 그곳 역시 부족에서 수장, 군주 사회로 차례차례로 번창하다가 또 사라져갔다.

이 내륙의 바깥, 그 서쪽은 아리바이라는 거대한 사막이 있고 동쪽은 산악과 사막이 병존하는 이란인데, 이 양편 곳곳에 유목민이나 반 유목민들이 흩어져 살았다. 이들 미개한 무리는 늘 문명국 근처를 배회하면서 그들의 재물이나 안락한 생활을 탐했고, 틈만 나면 쳐들어가기도 했다.

물론 이때는 개인이나 집단이 항상 이주하고 있던 시기였다. 유목민이나 반유목민의 부족들이 변경의 문명지역으로 밀고 들어오는 압력이 팽창했고, 때에 따라서는 포학한 정복의 길로 나서기도 했는데, 그 결과는 대체로 침략자의 승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까 메소포타미아 문명발상지가 시기를 따라 자리를 옮겨간 것도 이런 상호작용에 의해서였으나 그렇다고 침략자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도시를 계속해서 모두 번창시킨 것도 아니었다. 우선 접수한 도시를 이끌어갈 능력이 없으면 함께 망하거나 혹은 후속 침략자들에게 또다시 정복당하곤 했다.

어쨌거나 다시 이동 족이 되면, 드라비다 족 일파나 인도 유럽 인들처럼 수만리 로 떠돌아다니게 되고, 그리하여 종족의 시원 지도가 크게 바뀌어버렸는데 그것은 이미 석기시대부터 진행되어온 일이었다.

그렇게 보면 환족이 딜문에 머물게 된 것도 그와 유사한 경로였겠으나 처음 그들은 이곳에 오래 정착할 의사가 없었다. 그래서 지명조차 딛고 들어왔다가 딛고 나간다는 뜻으로 그렇게 지었던 것인데, 인구가 많아지거나 오래 정착해 살다보면 생각 또한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봄이었다. 눈이 녹으면서 시작되는 강의 범람도, 그 홍수도 지나갔다. 이제 식물과 꽃들은 앞 다투어 피어나거나 또 바쁘게 짝짓기를 할 것이다. 여름이면 비 한방을 내리지 않는 더위가 계속되지만 가을철 짧은 우기가 되면 식물들은 또 서둘러 씨앗을 낳아 땅에 묻으며 자기의 한 생애를 조용히 갈무리 할 것이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천리마 두 마리가 햇살이 가득한 들녘을 달리고 있었다. 에인과 두두였다. 두두는 제후의 아들로 올해 열여섯 살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사온 천리마를 타고 에인과 함께 니푸르로 가는 길이었다.

"이렷!"
두두는 에인에게 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말을 차대며 앞서 달렸다. 에인은 뒤처져서 힐끔힐끔 주위 경관을 감상했다. 남쪽으로 갈수록 초원이 짙어졌고 양들도 평화롭게 풀을 뜯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봄도 태어나고, 성장하고, 무르익는다면 지금은 한창 무르익어가는 그런 봄이었다. 에인은 비로소 여행길에 나서길 아주 잘한 일이라 싶어졌고, 이 여행을 추천했던 제후도, 멋진 길로 안내하고 있는 두두도 새삼 고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키슈인데 그 도시도 한번 돌아보고 갈까요?"
두두가 말고삐를 늦추며 에인에게 물었다. 유프라테스 강을 끼고 달릴 때였다.
"아니, 곧장 가자꾸나."

에인은 강가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강가에는 큰 나무들이 줄지어 섰거나 텔이 깎이어 협곡을 이루었고 그런가 하면 어느새 강폭이 넓어지거나 갈대가 어우러져 있어서 에인은 하나의 강을 따라오면서도 마치 여러 개의 강을 거쳐 오는 기분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이국의 강이었다.

'바람과 햇살과 강과 들, 마치 지상의 모든 자연과 함께 내달리는 듯하구나.'
그는 문득 속력껏 달리고 싶었다. 갈피마다 숨어 잇는 이국적 향취를 센 바람으로 들이키고 싶었다.

"이렷!"
그는 처음으로 천둥이만 재촉했다. 그러나 천둥이는 두두의 말을 앞지르지 않았다. 두두의 천리마가 자기보다 빨라서가 아닐 것이었다. 상대가 여성이라 늘 앞세워주면서 천둥이는 그렇게 신사도를 지키는 모양이다.

"이제부터 걸어가도 됩니다."
두두가 말의 속도를 늦추며 말했다. 니푸르에 거의 도착한 모양이다. 에인은 해를 쳐다보았다. 벌써 서녘으로 한껏 기울어 있었다. 이른 새벽에 출발했는데 저녁 무렵이었다. 그렇다면 몇 리나 내려온 것인가? 중간에 두 번 잠깐잠깐 쉬었을 뿐이니까 천리쯤 왔는가? 그때 두두가 손을 들어 저 앞을 가리켰다.

"장군님, 저기 왼편으로 숲이 보이죠? 그 안쪽이 니푸르입니다."
두두가 가리키는 곳은 숲이라기보다 큰 나무들이 길게 줄지어 있어서 차라리 방풍림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았다. 두두의 말처럼 그 안쪽이 마을이라면 그 나무들은 마을의 자연 울타리도 되는 모양이었다. 에인이 물어보았다.

"여기가 니푸르라면 네 외가가 이렇게 먼 곳에 있었단 말이냐?"
"그런 셈이지요."
"그럼 여기도 환족 마을이냐?"
"아니오."
"한데 어찌 이곳이 네 외가냐?"
"그렇게 되었대요."
"무슨 소리냐? 그러니까 네 외가는 변란 때 이곳으로 피신을 왔다는 게냐?"
"아니오. 외가식구들은 본래 이 고장 출신들이에요. 변란 뒤에 우리가 외가로 피신을 온 것이지요."

"이상하구나. 네 어머님은 환족이신 것 같던데 어찌 이렇게 멀리 떨어진 곳이
외가란 말이냐?"
"외할아버지 때문에 그렇게 되었대요."
"외할아버지가 딜문에서 이곳으로 이주하셨나?"
"글쎄요, 그것도 이주가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두두가 그 내막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외할아버지는 젊은 시절부터 딜문에서 우바이드, 에리두로 장사를 다녔다고 했다. 그런 어느 날 이 젊은 상인이 니푸르를 지나다가 그만 뱀에 물렸고 그리하여 온몸이 마비가 되어 길에 쓰러져 있는 것을 두두의 외할머니 부친께서 발견하고 집에 데려다 해독을 시켜주었다는 것이었다.

"그 증조할아버지께서 용케 해독약을 가지고 계셨던 모양이구나."
에인이 말에 두두가 설명을 보충했다.
"그 증조할아버지께서는 본래 의원이셨대요. 우리 외할머님도 그걸 전수 받으셨구요"
"외할머님께서도?"
"외할머님께서 무남독녀셨거든요. 그 말은 의원을 전수할 사람이 외할머니밖에 없었다는 뜻이지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약초 다루는 법을 배우셨구요."
"그랬구나."
"아무튼 그때 외할머니는 혼기를 앞둔 처녀였고, 그 인연으로 두 사람은 결혼을 해서 이곳에 정착하게 되었답니다."

딜문 사람들은 환족 대상들이 가져오는 물건을 받아 그것들 들고 남단 끝 에리두 항구까지 다니면서 무역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또 에리두나 우바이드의 청동거울, 혹은 채색토기 등을 가져와 대월씨국에 넘기고 비단을 가져오기도 했으며, 그런 유통으로 동서의 문물이 동방은 물론 소아시아까지 넘나들 수 있었다.

"이상하군. 보통 환족들은 결혼을 하면 그 색시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가는 법인데 외할아버지께서는 어찌 여기서 정착하시게 되었을까?"
에인이 궁금해서 물어보았다.
"외할머니의 아버지께서 붙잡으셨대요. 아들이 없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장사 일보다 의원일이 훨씬 낫다, 그거나 배우라'고 시쳇말로 꼬드기신 거지요."

두두는 또 너스레를 떨었다. 에인이 물었다.
"그럼 외할아버지 내외분은 자손을 많이 두셨나?"
"3남매를 두셨지요. 제 어머니는 그분들의 첫째 딸, 그러니까 외삼촌 다음에 태어 나셨구요."
"어머니의 형제분들도 다 딜문 사람들과 결혼하셨고?"
"외삼촌은 여기분과 결혼하셨고, 우리 어머니와 이모는 둘 다 딜문 사람과 결혼하셨어요."
"그럼 이모님은 지금 딜문에 계시겠구나. 함께 귀환하셨을 테니 말이다."
"아니오… 여기 삼촌 집에 살고 계셔요."
"그래… 그럼 외할아버지도 지금 삼촌과 함께 살고계시고?"
"할아버지는 수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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