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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여! 당신, 이제 미소 한번 지어 보구려.

오늘도 하루 종일 김치 가게에서 일을 하고 돌아와 곤히 잠든 아내의 볼에 입맞춤해 본다. 어쩌면 이 순간이 아내에게는 제일 행복한 순간이 아닐까. 문득 아내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고마움과 미안함 때문이다.

결혼식 날, 그 어느 신부보다 아름다웠던 아내는 영원히 늙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이제 서른 중반이 된 아내의 눈가에도 어느새 잔주름이 하나 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세월 앞에서는 아내도 어쩔 수가 없는가 보다. 나는 화장품 값이 비싸 "당신은 화장한 얼굴보다 화장하지 않은 모습이 더 아름답다"라는 말을 하곤 했다. 지금은 그 말이 참으로 구차한 변명이었음을 느낀다.

아내의 미소를 본 지도 오래된 것 같다. 나는 항상 아내의 미소에서 힘을 얻곤 했다. 최근 들어 무척 힘들어하는 아내의 얼굴을 볼 때마다 무어라 할 말이 없다. 아내의 얼굴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가 나로 인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니 남편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의 자책감이 든다.

지난 달 형님의 사업 실패로 은행으로부터 형님의 은행 부채 전액인 오천만원을 보증인인 내가 떠맡던 날. 아내는 창가를 바라보면서 말없이 눈물만 훔쳤다. 결혼하고 나서 지금까지 우리 가족에게 이보다 더 큰 위기는 없었다. 믿었던 형님의 배신 때문에 매일 늦게까지 술 마시고 들어오는 나에게도 아내는 짜증 한번 내지 않았다. 오히려 아내는 내 두 손을 꼭 잡으며 위안을 해 주었다. 아내의 이런 행동이 내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여보, 괜찮을 거예요. 저는 아주버니를 믿어요. 그리고 아주버니를 너무 미워하지 마세요. 그래도 당신 형님이잖아요. 당신마저 그러시면 제가 더 힘들어져요. 당신은 저와 우리 아이들에게 큰 나무이잖아요. 그 나무가 흔들리면 저와 우리 아이들은 누굴 믿고 살아야 되요. 여보, 제발 힘 좀 내세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어떻게 되겠지요."

다음 날 아내가 퇴근하고 돌아온 나에게 지금까지 몰랐던 사실들 하나 하나를 털어 놓았을 때 나는 차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방바닥에 꺼내 놓은 통장과 아이들 학원비를 포함한 한달 생계비를 적은 가계부를 살펴보는 내 손은 떨리고 있었다. 교사인 나의 박봉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지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아내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으며 살림을 꾸려온 것이었다.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동안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아내의 모습을 본 내 마음은 너무나 아팠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내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당신에게 죄송한 얘기부터 해야겠어요. 앞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아주버니의 빚을 영원히 갚지 못할지도 몰라요. 그래서 고민하다가 당신과 상의 한번 하지 않고 오늘 은행마다 다니면서 적금 통장 모두를 해약했어요. 그런데 해약할 때마다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 그리고 아이들 학원도 이번 달만 보내고 당분간은 보내지 않기로 했어요. 당신이 힘드시겠지만 앞으로 아이들 공부는 모두 당신이 책임져 주어야겠어요.

저도 이제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당신도 알겠지만 아파트 상가에 빈 가게 제가 오늘 계약했어요. 거기에 김치가게를 낼까 봐요. 앞으로 당신과 아이들에게 신경을 많이 못 쓸지도 몰라요. 피곤하겠지만 퇴근해서 집안 청소하고, 아이들 저녁만 챙겨주시면 고맙겠어요. 힘들지만 우리 가족 모두가 조금만 참고 견디도록 해요."

적금을 해약할 때마다 눈물이 나서 혼났다는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형님에 대한 미움이 증오로 바뀌고 있었다. 결혼해서 지금까지 계획한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것을 지켜보는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데 아내의 마음은 오죽하랴.

아내가 김치 가게를 시작한 첫날, 퇴근해서 현관문을 열자 예전과는 다른 기분이 '쏴'하고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심 이것이 '현실인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무질서하게 어지럽혀진 신발들은 마치 내 마음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부엌에는 아침에 먹은 그릇들이 밥풀이 묻은 채로 싱크대에 수북히 쌓여져 있었고, 방마다 옷과 이불이 너저분하게 널려져 있었다. 어디서부터 아니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아내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줄이야.

옷을 갈아입고 대충 집안 정리를 하고 난 뒤, 결혼하여 처음으로 설거지를 해 보았다. 집안 일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설거지를 하고 난 후 식탁에 앉아 차 한잔을 하는데 왜 이다지도 내 자신이 초라해 보이는지 "휴"하고 한숨이 나왔다.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내 자신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결혼하면서부터 지금까지 남편으로서, 두 아이의 아버지로서 무엇하나 제대로 해준 것이 없다. 고3 담임이라는 이유로 평일에는 밤 열한시, 주말에는 오후 6시, 휴일에는 오후 5시에 귀가하는 나에게 아내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고3 담임을 연임하면서 우리 가족끼리 여행 한번 제대로 가 본 적도 없었다. 작년에 막내 기범이가 학교에서 가족 사진을 가지고 오라고 했을 때 백일 때 찍었던 가족 사진을 보냈다는 아내의 말이 생각났다.

그나마 한 달에 한번 쉬는 일요일에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하루 종일 잠만 잤다. 하지만 아내는 다음 날 출근하는 나에게 "즐거운 하루 되세요"라고 인사를 해 주었다. 항상 내 앞에서 미소만 지어 보이기에 아내에게는 그 어떤 아픔이 없는 줄만 알았다.

지금까지 우리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내가 직장 생활을 충실히 하고 있는 것 모두가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항상 내 곁에는 축 늘어진 어깨를 일으켜 세워 주는 아내가 있고, 재잘거리는 두 아이의 미소가 있기에 내 삶은 행복했다.

아내가 김치 가게를 시작하면서부터 그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를 못했다. 매일 매일 틀에 박힌 생활에 모두가 지쳐가고 있었다. 매월 은행 이자를 낼 때마다 아내와 나는 새삼 한달이 너무 빨리 간다고 느꼈다. 하지만 미안함 때문에 서로에게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 이후로 나는 술과 담배를 끊었고 아내는 생활비를 반으로 줄이는 각고의 노력을 했다. 아이들도 꼭 필요한 것 외에는 무엇을 사달라고 조르지 않았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어느 날 문득 세수를 하고 난 뒤, 우연히 거울 속에 비춰진 내 자신을 바라보게 되었다. 거울 속에 비추어진 내 얼굴 뒤로 아내의 얼굴과 지나간 일들이 아스라히 비춰졌다.

과거에 내가 힘이 들 때, 아내의 미소는 너무나 큰 힘이 되었다. 사실 그랬다. 아내는 어려울 때일수록 더 침착했고 미소를 지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내에게 미소 한번 제대로 지어준 적이 없다. 내 고지식한 생각으로는 아내이기에 당연히 그래야 된다고 생각했다. 아내는 늘 그런 나에게 불평 아닌 불평을 하곤 했다.

"여보, 당신은 웃는 모습이 참 멋진데, 왜 웃지 않으세요?"

혹자는 평소 웃음에 인색한 내가 인상을 쓰고 있으면 무섭다고 했다. 특히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가 웃지 않으니까 한 동료 교사가 우스갯소리로 나에게 이런 말을 던졌다. "무서워서 아이들이 수업 시간에 졸지는 않겠구먼."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잘 웃지 않는 나를 두고 동료 교사들끼리 '나를 웃기기' 내기를 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문득 초등학교 때의 일이 기억났다. 가족 사진을 찍으러 사진관에 갔는데 사진 기사가 웃어보라고 자꾸 호통을 치는 바람에 화가 나서 사진관 밖으로 뛰쳐 나온 적이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께서는 꾸중을 하시면서 말씀하셨다. 그 중 아버지의 마지막 말씀은 나이가 사십이 넘은 지금도 머리 속에 남아있다. "사람은 살면서 웃고 싶지 않아도 웃어야 할 때가 있단다."

아버지의 그 말씀을 실천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아내는 요즘 웃음을 잃었다. 새삼 아내의 미소가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아내가 웃어주기만을 바라는 것은 나의 지나친 욕심인지도 모른다. 그동안 아내가 무엇인가를 해 주기만 바랬지 정작 내가 베풀지는 못했다. 아내가 힘들어하고 있다. 어쩌면 아내는 내 미소를 기대하고 있는지 모른다.

예전에는 하루에 한두번 정도밖에 보지 않았던 거울을 요즘에는 시간만 날 때마다 본다. 아내의 미소를 되찾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아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거울 앞에서 웃어 보기도 하고, 울어 보기도 하고, 인상을 써 보기도 하고, 혀도 내밀어 보기도 하는 등 사람의 얼굴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온갖 표정을 연출해 보았다. 아내의 미소를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 이후로 달라진 나의 표정에 주위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매일 웃고 다니는 나에게 동료 교사들은 지나가는 말로 "김 선생, 오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소?"한다. 그 말이 그리 기분 나쁘게만은 들리지 않는다.

요즘 학생들이 불려주는 별명이 하나 있다. 평소에 잘 웃지 않던 내가 수업 중에 보여 준 미소가 학생들에게는 너무 충격적이었나 보다. 학생들이 나에게 '살인미소'라는 별명을 지어준 것이다. 그 살인 미소의 비법을 물어보는 아이들에게 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 먼저 거울을 보면서 익숙한 미소를 연습해 보라.
2. 벽을 보면서 자신이 '누구를 위해 어떤 미소를 지을까?'를 생각해 보라.
3. 어느 정도의 미소가 익숙해졌으면 이제 환하게 웃어 보라.

아내가 김치 가게를 시작한 지 한달이 지났다. 처음에는 바뀌어진 생활에 적응을 잘 못해 매일 투정을 부렸던 아이들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져 가는 것 같다. 특히 식탁의 김치에는 손도 대지도 않았던 아이들도 이제 김치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을 정도로 아내의 김치에 길들여져 가고 있다.

그리고 아내에게서 김치 냄새가 난다며 피해 다니던 막내 놈도 어느 정도 김치 냄새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마냥 철부지로만 알고 있었던 큰 딸 설이가 "엄마, 힘들지. 안마해 드릴게요"하면서 아내 어깨를 주물러주며 재롱 피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느새 무척이나 커버린 딸의 모습을 발견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어떤 역경 속에서도 아내의 미소는 우리 가족에게 있어서 큰 희망이 되어 주었고 가족의 결속을 다지는 데 중요한 견인차 역할을 해 주었다. 모든 것들을 미소로 받아들이며 자신을 담금질한 아내에게 다시 한번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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