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사월 초파일에는 어느 절에 갈까'를 놓고 부석사와 문경 봉암사를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부석사로 방향을 틀었다. 가는 길에 꽃살문이 아름다운 절 성혈사에 들르기 위함이었다.
저녁 5시 반 부석사에 당도했다. 부석사로 오르는 길의 오른쪽 배경은 푸른색이었다. 분홍색 사과꽃이 진 자리엔 살구씨만한 작은 사과 열매가 송알송알 맺혀 있고 길가 곳곳에는 부석사가 5월 내내 벌이고 있는 화엄 축제의 행사 내용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여기서부터 아미타불이 계시는 무량수전에 이르려면 9개의 축대 위에 놓인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下品下生, 첫째 돌계단을 올라간다. 구품구생이라니! 깨달음 없이 그저 세상을 맹목적으로 살아가는데 익숙해있는 나 같은 중생에겐 부석사로 오르는 계단이, 그 삶의 단계를 구별하는 상징이 벅차기만 하다.
어떻게 살아야 9품인 上品上生에 이르러 극락을 꿈꿀수 있는가. 삶의 품격을 한단계씩 높여가는 일이 어찌 이 계단을 오르는 일만큼이나 쉬운 일이기를 바랄 것인가. 그래서인지 늘상 부석사 계단을 오르는 일은 숨이 가쁘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摩旨(마지)를 울리는 쇠종 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마지-부처에게 올리는 밥.
정호승 시 <그리운 부석사> 전문
정호승의 시 <그리운 부석사>의 글감이 되어 주던 당간지주 앞을 그냥 스쳐 지나 천왕문에 도달한다. 나는 시인처럼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했노라고 한탄하기보다 내 저녁 공양을 챙기기 위해 시간에 늦지 않도록 도착하는 일이 급했기 때문이다.
한층 더 높은 축대를 올라가니 비로소 부석사의 종무소, 범종루 등 당우들이 눈에 들어왔다. 구품 분류에서 하품 세 계단을 거쳐 왔으니 이제부턴 중품하생인 것이다. 맨 먼저 나를 맞는 건 동방사지에서 옮겨왔다는 3층 석탑 한 쌍이다. 시계를 보니 저녁 공양 시간까지는 한 시간이 남았다.내친 김에 무량수전까지 오르기로 했다.
아홉 번째 축대인 안양루 아래층에 다다르면 상품상생의 구도 행각은 끝이 난다. 가운데로 열린 계단을 한 발 올라서면 깨달음의 땅이 펼쳐진다. 안양루 2층은 불단에 맞대어 짜인 아무타불의 또 다른 불단이다. 이제 난 극락의 다른 이름인 안양(安養)에 다다른 것이다.
무량수전 앞마당에 있는 팔각석등의 화사석에 양각된 4구의 보살상에 카메라의 초점을 맞춘다. 보살 공양상의 부드러움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무량수전으로 가서 서쪽에 앉아계신 아미타불을 친견했다. 언제 보아도 늠름하다. 깨달은 자의 풍모가 저쯤은 돼야 하리라.
잰 걸음으로 무량수전 쪽 언덕에 삼층석탑을 지나 조사랑, 삼인당을 돌아오니 어느덧 저녁 공양 시간이다. 각종 고추장을 넣고 비벼먹으라는 뜻인지 갖가지 산채가 그득하다. '절간에서 인심난다'라는 속담은 아직도 유효한가 보다.
저녁 7시 줄에 내건 꽃등의 불들이 일제히 켜졌다. 응향각등 요사채는 물론 범종루와 안양루 아래 층에도 빼곡히 자리를 깔고 앉은 할머니들이 외는 "석가모니불" 소리가 봉황산을 메웠다.
저 할머니들의 원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기복, 구복의 저런 신앙의 형태를 원시적이라 폄하하기 전에 오늘 이 땅을 사는 우리네 삶이 얼마나 바스라지기 쉽고 연약한 것인지를 생각했다.
나는 그들이 세우는 원력이 이뤄지기를 축원했다. 홀로 세우는 원력이 저 꽃등처럼 화사하게 피어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원만을 세우는 것은 하품하생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저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자신의 원력 뿐 아니라 여럿이 같이 세우는 원력, 즉 사회적 삶에도 관심을 보여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사는 현세를 더불어 살기 좋은 극락정토로 만들어 가려는 마음 가짐이 혼자서 아미타불이 게신 극락에 가야겠다는 원력보다 상품상생의 삶이 아닐까 싶다.
혼자 잘 살기도 좋지만 간혹 민족통일, 평화 등 큰 원력을 세우는 대승적 태도가 그리운 때도 있다.
밤 9시 초파일을 맞아 조실이신 근일 대선사께서 사자좌에 올라 특별 법문을 설하셨다. 모두 4월 초파일을 석가모니 부처님이 오신 날로 알지만 그게 아니다. 부처님께선 온 바도 없고 가신 바도 없으며 항상 그 자리에 계신다. 우리도 하루살이 같은 삶이 아니라 부처님처럼 무량수겁을 살려면 어찌해야 하나. 굳이 여기서 '썰'을 풀지 않아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이야기다. 언제나 우리가 낑낑대는 병은 실천이라는 병이 아닌가.
큰 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나니 밤 10시가 되었다. 할 일 없이 경내를 기웃거리다가 선묘 바위 앞에 멈춰 섰다. 갖가지 사념이 뭉게뭉게 일어난다.
의상이 자신의 꿈을 방해하는 집단을 물리치고 전법도량 부석사를 완성한 데는 선묘 아가씨의 역할이 지대했다. 머리 위에서 곧 떨어질 듯 말 듯 오르내리던 거대한 바위 앞에 의상의 불사를 방해하려는 세력들은 혼비백산하여 달아나게 되고 의상은 가람창건 불사를 순조롭게 이뤄낼 수 있었다.
지난 탄핵 정국 국면에서 좌절에 부닥친 노무현 정권에게 개혁이라는 꿈의 마차를 다시 끌수 있도록 추동해 낸 것은 국민의 힘이었다. 말하자면 국민들이 선묘의 역할을 해낸 셈이다.
이제 노무현 정권이 행동할 때다. 정치의 틀을 새로 짜고 민생을 안정시켜 이 땅 위에 상생의 아름다운 무량수전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무량수불인 국가의 기틀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이젠 노무현 자신이 혼신의 힘을 쏟는 모습을 국민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또 다시 곤경에 자초하고 그때마다 국민이 선묘의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바람이 점점 심하게 불고 날씨가 점점 서늘해졌다. 무량수전 한 켠에 주저 앉아 졸다 깨다 하며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새벽 3시 반 예불을 알리는 도량석 치는 소리가 났다.
이윽고 새벽 예불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몇 번인가 오체투지의 절을 한 다음 "나모라 다나다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마하 사다바야 마하가로 니가야…"하고 신묘장구대다라니경을 외웠다. 내가 비록 불교 신자는 아닐지라도 새벽에 듣는 낭랑한 독경 소리는 마음에 깊은 울림을 준다.
예불이 끝나갈 무렵 밖으로 나오니 안양루 저편 소백의 산맥들이 희끄무레하게 제 면목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503.
새벽은 밤을 꼬박 지샌 자에게만 온다.
낙타야,
모래박힌 눈으로
동트는 地平線을 보아라.
바람에 떠밀려 새 날이 온다.
일어나 또 가자.
사막은 뱃속에서 또 꾸르륵거리는구나.
지금 나에게는 칼도 經도 없다.
經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
길은,
가면 뒤에 있다.
(후략)
황지우의 시집 <나는 너다>에서
나는 황지우 시인의 '경이 길을 가르쳐 주진 않는다'라는 깨달음에 동의한다. 어디까지나 가면 뒤에 있는 생의 진실 혹은 길을 찾아내는 것은 자신의 몫에 속한다. 불기 2548년 부처님 오신 날. 봉황산 부석사에서 맞는 부처님 오신 날 아침 나는 부석이 설하는 법문을 들으며 천천히 부석사를 떠났다.
부석은 설한다. 때로는 무거운 돌도 힘없이 공중에 들리는 수가 있으며 삶도 일종의 부석이라고 애기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들리고 마는 의외성. 궁극적인 문제는 내 자아가 얼마나 튼튼한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