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머리에 있는 법당을 그냥 지나쳐서 언덕받이에 있는 나한전으로 먼저 갔다. 1985년 보물 제 832호로 지정된 나한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아담한 건축이며 옆면에서 바라볼 때 사람 인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았는데 맨 위 한 단을 화강암으로 마감했다. 그 위에다 자연석 초석을 놓은 다음 기둥을 세웠는데 한참을 들여다보아야 겨우 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약한 배흘림이다.
절의 문살을 이루는 나무의 재질은 거의가 춘양목이다. 춘양목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일대와 태백산맥 등에 분포돼 있는 소나무로 봉정사 극락전이나 부석사 무량수전도 이 춘양목으로 지었다.
꽃살문을 만들 때는 백년에서 삼백년 가량된 이 춘양목 가운데서 고른다. 한 나무에서도 북쪽을 보고 자란 쪽을 쓰는데 그것은 북쪽을 보고 자란 부분이 나이테가 촘촘하게 박혀서 형태가 쉽게 변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무를 켜서 북남풍이 부는 쪽에서 삼 년간을 말려야 비로소 문살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고 하니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추측컨대 내가 이 나한전 마당에서 올려다 보고 있는 저 꽃살문도 아마 그런 과정을 거쳐서 여기에 존재하고 있을 터다.
성혈사 나한전 꽃살문은 가운데 어간 2쪽, 좌우 2쪽씩 모두 6쪽으로 된 문이다. 가운데 어간문은 통판투조꽃살문이다. 통판투조꽃살문이란 널판에 꽃무늬나 기타 다른 무늬를 통째로 새겨 문틀에 끼운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좌우 협간은 솟을빗꽃살문 장식으로 되어 있다.
나한전 앞으로 바짝 다가서서 중간에 위치한 어간 문을 꼼꼼히 들여다 본다. 어간 문살 전체는 연못이다. 그 연못을 연꽃과 연잎으로 가득 채우고 나서 연잎 위 또는 여백에다가 자라 , 게, 물고기, 개구리, 물새 등을 새겼는데 연잎 위에서 노 젓는 동자상이 매우 귀엽다. 문 전체가 하나의 연못이며 문을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마치 연꽃이 가득 핀 연못을 들여다 보는듯 한 느낌이 들게 한다.
정토종의 삼부경 가운데 하나인 관무량수불경(觀無量壽佛經)이 설하고 있는 극락정토 못물의 풍경을 문살 위에 그대로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연잎의 푸른색과 연꽃과 게의 붉은 색이 살아 있던 때의 문살의 색채는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목질이 다 드러나 있을 정도로 단청이 퇴색해버린 문살의 현재 상태가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우협간 문에는 부귀의 상징인 모란꽃이 새겨 있는데 채 벗겨지지 않고 남아있는 단청의 붉은 색이 애처롭게 다가선다. 좌협간과 우협간 문은 똑같이 빗살의 교차 지점을 관통하는 장상(수직살대)를 첨가한 형태의 솟을빗꽃살문 형태로 빗살문보다 한 단계 더 정교해진 수법을 보여준다.
지극한 아름다움을 담은 것들은 한결같이 슬픔을 배태하고 있다. 성혈사 나한전 문살에서도 그랬다. 지극한 아름다움과 슬픔을 동시에 만난다. 그러니까 나한전 문살은 그 문살을 조각한 한 장인의 영혼으로 들어가는 또 하나의 문이다.
내가 만난 그는 마음 속에 눈물이 가득 고인 사람이었다. 삶의 내용은 부질없고 고달프건만 극락정토 가는 길은 아득히 멀기만 하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조금씩 꺼내어 이 문살에다 투조한다. 결국 내가 바라본 것은 문살이 아니라 문살을 조성한 장인의 마음의 결이자 무늬였던 것이다.
문을 열고 나한전으로 들어가면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석가의 뛰어난 제자였던 16 나한이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이후 중건된 것으로 알려진 이 건물은 내외 이출목(二出目)의 공포를 기둥과 기둥 사이의 평방 위에 짜 얹은 다포식(多包式) 건축으로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나한전의 앞마당에는 얼굴은 호랑이상이며 몸체는 용 문양이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석등 2기가 있다. 성혈사의 역사를 좀더 자세히 알아보고자 이 절의 유일한 스님이신 덕현 스님에게 절의 역사에 대해 물어봤지만 자신은 이 절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르겠노라는 대답이 돌아올 뿐이다.
내가 본 성혈사는 짓다만 당우들, 쇠락한 요사채 등등 살림이 매우 궁핍해 보이는 절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행여 성혈사 나한전의 문살들이 무관심 속에 방치되지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그저 아름다운 나한전 문살들을 좀더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보존하여 오래 오래 그 아름다움을 잃지 않기를 바라면서 언덕을 내려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