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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스가이드
아름답기 때문에 우린 사랑하는 것일까, 아니면 사랑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일까. 사랑하는 자는 곧잘 이런 질문에 봉착한다. 드 보통은 스탕달이 아름다움이 '행복의 약속'이라고 정의한 것을 들어 이렇게 말한다.

"나는 클로이가 나를 행복하게 해줄 때 클로이가 아름답다고 생각했으며, 클로이는 아름답기 때문에 나를 행복하게 해주었다."

사랑이란 어떤 타입이나 유형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그것은 유일무이한 개별성, 대체 할 수 없는 그 무엇에 대한 우리의 도저한 집착이 아니던가. 목젖을 뒤로 젖히며 머리를 쓸어넘기는 사소한 손가락의 움직임에서조차 신비와 매력을 읽어내는 자들이야말로 사랑에 '들린 자'들이 아니던가. 공주와의 사랑이든, 창녀와의 사랑이든 그러므로 사랑은 욕망 앞에서 동등한 것이 아닐까.

"사랑은 공통의 혐오를 확인함으로써 커나간다."

하나의 대상을 똑같은 어조로 공격할 수 있는 연인들의 사랑은 견고하다. 태생의 취향이 어떻든 연인들의 취향은 유사해지기 마련이다. 심지어는 정치색마저.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아도 좋은 연인들은 '하나의 후보'를 지지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분류하는 것,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낙인을 찍는 것에는 병적인 저항감을 가진다. 우리가 그런 데에 반대하는 것은 그런 낙인이 틀렸다기보다는 그것이 분류불가능성이라는 주관적 느낌을 정확하게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분류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분류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호락호락하게 보인다는 것, 쉽게 판단된다는 것이 아닌가. 왜 내가 남과 같이 도매금으로 분류되어야 하는가. 나는 내 유일무이한 오리지널리티로 인해서 '나'가 아닌가. 더구나 사랑하는 연인에게서 내가 부정적으로 뷴류된다는 것은 아이덴티티에 대한 가증스러운 위협이다.

낯설음, 습관의 파열은 강렬한 욕망을 자극한다. 때로는 이러한 모험이 사랑을 강화한다. 드 보통은 나레이터의 입을 빌어 말한다.

"그녀가 낯선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내가 아는 여자가 갑자기 낯설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익숙함이라는 갑갑한 담요 밖으로 나와 그녀의 얼굴을 보았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드 보통은 모든 매너리즘은 사랑의 적임을 간파하고 있다. 때로는 반역이, 위반이 필요한 것이다. 피곤한 세상의 율법을 살짝 비웃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는 얼마나 많은 천사와 악마가 들끓고 있는가. 때론 악마에게도 의사 발언권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지. 천사들이 모든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곳은 피곤한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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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것이 제대로 보이는 순간은 온다. 시간은 우리의 눈을 사실주의자의 눈으로 되돌려 놓기 마련. 현실의 그가 보이기 시작하는 법이다. 연인에게 삐친 '낭만적 테러리스트'들은 말한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한다. 너한테 삐치거나 질투심을 일으켜서 나를 사랑하도록 만들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역설이 생긴다. 만일 상대가 사랑으로 보답한다면 그 즉시 그 사랑은 더렵혀진 것으로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낭만적 테러리스트는 이렇게 불평할 것이다. 내 강요 때문에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면, 나는 이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 사랑은 자발적으로 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삐친 연인, 토라진 연인은 아이들과 진배없다. 그들은 쉽게 달랠 수 없다. 때로는 상대방의 위무마저도 단호하게 뿌리쳐 버린다. 냉전, 침묵, 각방 쓰기, 늦게 귀가하기, 맨정신으로 할 수 없는 말을 술 먹고 내어 뱉기, 상처 주고 흠집내기. 그 모든 투정과 토라짐은 결국 너를 소유하겠다는 욕망, 너를 내 영토 안에 붙들어 놓고 말겠다는 제국주의와 다름없다.드 보통은 칸트를 인용하며 사랑의 무보상성(無報償性)을 말한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예상되는 보답에 관계없이 사랑을 할 때에만, 사랑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사랑을 줄 때에만 도덕적이다."

그렇다. 우리들의 사랑은 침실에서건, 카페에서건 공리주의자들의 사랑이었다.

'모든 사람은 자기를 즐겁게 하고 자기에게 기쁨을 주는 것을 선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불쾌하게 하는 것을 악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대체 불쾌란 무엇일까. 혹 그것은 우리들의 타고난 성향이 아니라 사회 율법에 따라 내 안에 무의식적으로 강요되고 구성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주류의 율법과 도덕률을 한번쯤 의심해보아야 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은 아닐까.

클로이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게 되고, 두 사람은 이별을 한다. 사랑에 채인 자는 자신의 고통을 하나의 자질로 고양시킨다. 그는 버림받았기에 위대하다. 사랑을 잃은 자는 버림받았기에 선택된 자다. '예수처럼 십자가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오후 3시에 침대에 자빠져서' 그는 자신을 사랑의 순교자로 만든다. 천박한 영혼이 어찌 고통을 알겠는가. 고통만이 그의 우월성을 증거하는 표지가 된다. 그러나 고통마저도 매너리즘을 이기지 못한다. 드 보통은 나레이터의 입을 빌어 말한다.

"이제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녀의 부재가 아니라, 내가 그녀의 부재에 무관심해진다는 것이었다. 망각은 내가 한때 그렇게 귀중하게 여겼던 것의 죽음, 상실, 그것에 대한 배신을 일깨워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깨진 사랑이었든 아니었든 모든 사랑의 후일담 속에서 그는 잊혀지지 않는 주연이어야 했다. 삶이라는 무의미성에 대항하는 인간들의 이 초라한 욕망, 그러나 그 속에서 사랑의 위대한 시와 서사가 싹 트는 것은 아닌지. 망각에 저항하는 저 불후의 욕망.

세느강은 흐르고 시간은 간다. 열정이 식었다고 말해도 좋다. 시간이 흘렀다고 말해도 좋다. 연륜이 쌓였다고 해도 좋다. 드 보통은 사랑에 대해서 비로소 말한다.

"성숙한 사랑은 절제로 가득하며, 이상화에 저항하며, 질투, 마조히즘, 강박에서 자유로우며, 성적 차원을 갖춘 우정의 한 형태이며, 유쾌하고, 평화롭고, 상호적이다."

시시콜콜한 사적인 연애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어느 순간 철학적 사유가 팝콘처럼 튀어나오는 드 보통의 글쓰기는 시종 유쾌하다. 실패한 첫 사랑이든 진행 중인 사랑이든 반드시 나의 사랑을 생각해볼 일이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양장)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청미래(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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