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정말 재미난 연극 한 편을 보았다. 대학로에서 만난 한양레퍼토리 극단의 <상사주>가 바로 그것. 상사주(相思酒)는 상사초라는 약초로 만든 술이다. 이 술로 인해 전혀 어울리지 않던 두 여인, 지상애와 한주연이 친구가 되어 벌이는 에피소드가 극의 내용이다.
극의 시작은 아주 엉뚱했다. '이제 곧 배우가 나오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앞의 무대를 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여러분 여깁니다. 이쪽입니다"라는 말이 뒤에서 들렸다. 객석 뒤편에서 분홍색 관광안내원 유니폼을 입은 한주연이 관광객들을 이끌고 무대 위로 오르면서 그렇게 연극은 시작되었다.
관광안내원 한주연은 주소지가 서울 송파구이면서도 경남 진주에서 임진왜란 때 논개가 남강에 떨어진 촉석루를 소개하고 있다. 때는 두꺼운 옷차림의 겨울이고 관광객들은 서로 일행끼리 속닥거리며 상투적인 설명에 지루해한다.
이윽고 봄이 되고 가벼운 옷차림의 여름으로 계절이 바뀌지만 한주연 자신도 안내책자에 쓰여진 대로만 읽어 내려가는 관광안내원의 일상에 지치게 된다.
지쳐가던 한주연은 주연만 맡으라고 해서 이름을 '주연'이라고 지어준 어머니로부터 영향을 받은 연극적 기질을 역사 관광해설에 적용한다. 즉, 역사에 대한 열정과 타고난 상상력으로 관광해설을 재미있게 진행하기에 이르고 좋은 반응을 얻는다.
예를 들자면, '최경희 현감과 논개의 러브스토리', '남강에 떨어져 죽으려던 논개를 잉어떼가 구했다', '인어이야기'가 그것이다. 이 때 자연스럽고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펼친 한주연 역의 임유영은 나뿐만 아니라 객석의 폭소를 자아냈다.
그러나 재미있다는 반응 외에도 상상력이 지나쳐 근거 없는 해설이 역사를 훼손한다는 엇갈린 반응에 부딪힌다. 곧 그 엇갈린 반응은 문화유산관리청에 투서가 되어 관리청 직원 지상애가 파견, 한주연을 지켜보게 된다. 지상애는 보수적 성격에 문화유산관리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다.
결국 한주연은 직장을 잃게 되고 고양이를 껴안고 자신의 집안에 틀어박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백수 신세가 된다. 하지만 한주연의 역사에 대한 열정에 매력을 느낀 지상애는 한주연의 집을 찾아가 한강유람선의 안내원 일자리를 소개해준다.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한주연은 자신이 직접 빚은 술, 상사주를 꺼내오고 둘은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상사주를 나누어 마신다. 술기운에 지상애는 한주연에게 자신의 어릴 적 이야기며 건축학도로서의 지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어느새 한주연과 친숙해진 지상애는 본연의 모습을 감추던 가발을 벗어버리며 숨겨져 있던 뜨거운 감상과 열정을 표현한다. 친숙해진 두 여자는 역사 속의 열정적인 인물이 되는 연극놀이를 즐긴다.
여기까지가 극의 전반부였다면 그 다음에는 갑작스럽게 종결로 치닫는 후반부에 이르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변호사 박문수가 등장하면서 한주연이 살인미수죄에 몰리게 된 상황인 것. 살인미수죄의 혐의를 벗기 위해 한주연은 변호사에게 지상애와 벌인 둘만의 연극놀이를 재연한다.
낭랑공주와 호동왕자에서 목을 치는 망나니역을 할 때, 그만 지상애의 머리에서 피가 흐르게 된 경위가 드러나고 이를 창피해하는 지상애는 이제 공무원으로서 자신은 해고라며 좌절한다. 하지만 이내 두 여자는 손을 잡고 새로운 사업의 구상을 펼치며 연극은 막이 내렸다.
연극적인 한주연의 집을 꾸며놓은 소품도 재미를 더했다. 또 정자가 있는 풍경, 도심의 빌딩, 주택가 등을 나타내는 바깥풍경을 암시하는 장치가 인상적이었다. 원작이 영국 피터 쉐퍼의 코미디 '레티스와 러비지'라고 하였는데 우리나라 설정에 맞게 잘 묘사하였다.
아쉬운 점도 몇 군데 눈에 띄었다. 후반부로 접어드는 부분의 힘이 부족했고 지상애와 한주연의 불신과 오해가 사라지는 과정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 급작스럽게 제시된 사업구상이 두 여자의 관계를 해결하는 묘안이란 설정도 상당히 빈약해 보였다. 전반부의 극 전개에 비하여 결론이 빠르게 내려졌고 그 과정이 짧아 무언가 빠진 듯한 느낌이었던 것.
그러나 단정해 보이던 가발이 벗겨지던 순간과 박문수 변호사 앞에서 안절부절하던 지상애 역 황석정의 코믹한 연기는 압권이었다. 동시에 가식적인 자신의 틀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주제가 강하게 전달되었다.
두 여주인공의 연기력도 훌륭했고 무대도 신선하고 좋았다. 시시때때로 바뀌는 영상이 배경으로 깔리고, 촉석루에서 사무실로 다음에는 한주연의 집 실내로 이어지는 구조도 좋았다.
뿐만 아니라 관광객들과 사무실의 미스리, 변호사 박문수 등의 인물이 짧게 등장하면서도 배우 각자의 역할이 잘 드러나고 있었다. 그들의 감초 같은 대사, 동작, 표정연기는 극의 맛을 살렸다.
대학로 한양레퍼토리씨어터 (옛 동숭씨네마텍 1관)에서 6월 27일까지 공연된다. 문의 : 02-764-6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