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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산 임재영 선생
칠산 임재영 선생 ⓒ 김성철
운대리 도요지를 보존하기 위해 그 곳에다가 도예촌을 만들 계획으로 수원에서 이사와 3년째 폐교에 살고 있는 칠산(七山) 임재영 선생을 지난 5월 말부터 매 주말마다 만났다.

그는 이 곳에서 발굴된 분청사기와 막사발을 귀하게 여기면서 "조선조 도자사에 있어 중국의 도자사와는 너무 달랐다. 중국 역대 자기들이 대부분 고가 진상품이라며 조선 도자기는 막사발이 주류를 이뤘다"면서 "조선의 막사발은 천민들의 생활 속에서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고 천덕꾸러기와 같은 물건이 돼 버렸다"고 안타까워 했다.

칠산 임재영 선생이 운대리 도요지를 찾아와 마지막으로 여기서 예술혼을 꽃 피우겠다고 하기까지는 그의 인생 역정이 남달랐다. 먼저 직업을 얘기한다면 동양화가, 도예가, 건축가, 교수, 스님 등 갖가지 이력을 지녔으면서도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항상 도를 깨우치며, 새로운 것을 창의해 내는 예술가이다.

80년대 서빙고로 연행되어(윤필용 사건에 연류) 신군부에 협조하라고 회유당했지만 이를 거절했고, 89년 서경원 전 의원 방북사건 때는 일본에서 그와 일주일동안 함께 체류한 사실이 있다 하여 대검 공안실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나 법정에 서서 증인 변론을 해주기도 했다.

이런 정치적인 소용돌이 속에서도 함몰되지 않고 오직 세계적인 도자기를 만들어 보겠다는 그 일념 하나로 25년간 산고 끝에 칠채유기도자기(七彩釉氣陶磁器)를 탄생시켰다. 이를 계기로 세계적인 예술가가 되었지만,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예술세계를 내다보며 끊임없이 수도정진(修道精進하)하고 있다.

현재는 민예총 고흥지부 고문을 맡아 이 지역에 문화예술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칠채유기도자기가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인정받았지만 아직까지 북한에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북한과 문화교류가 활발해지면 칠채유기도자기를 북한에도 머지않아 전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그는 오늘도 화선지를 마루바닥에 펴고 페인트 붓으로 아무렇게 색칠하지만 그 깊이는 아무도 헤아리지 못한 세계에서 '무아경' 기(氣) 그림을 그린다.

임재영 선생 '무아경' 그림 그리는 화실
임재영 선생 '무아경' 그림 그리는 화실 ⓒ 김성철

다음은 칠산 임재영 선생 인터뷰 내용.

- 성장배경과 도자기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영향을 받아 그림과 흙을 만지며 자랐다. 서천중학을 마치고 서울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미술활동을 시작했다. 처음 동국대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여 김영기 화백으로부터 동양화를 사사 받았지만 도자기에 관심이 더 많았다.

어느 날 여름방학 때 교수님의 추천으로 이천에 있는 도자기 공방에 아르바이트를 하러간 것이 도자기를 처음 접한 계기가 되어 도예의 입문했고 우연한 계기로 일본인을 알게되어 일본도자기 회사에 입사하게 되었다."

- 일본생활을 하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일본에는 다도라는 것이 있고 이러한 풍습으로 인해 도자기가 발달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일본은 그야말로 도자기 발전의 산실이었다. 이후로 몇몇 다도 선생님을 만나 많은 전문지식을 배웠다. 다도 전문 서적을 읽기 시작하면서 한국, 중국, 일본 등의 3국 도예사를 알게 되었고, 세계 현대도예사를 연구하다보니 그 흐름을 간파할 수 있었다.

도자기 제작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태토와 유약과 불의 조화이며, 도자기야말로 순수 자연물질이기에, 한국적인 도자기를 만들려면 한국의 자연으로 돌아가서 한국의 도자기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보내다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일본은 다도가 발달되었지만 머지않아 우리나라에서도 다도가 유행할 것으로 내다보고 이때가 되면 많은 다기가 필요할 때가 반듯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서둘러 귀국했다."

임재영 선생 작품 오채유기
임재영 선생 작품 오채유기 ⓒ 김성철
- 도예를 처음 시작하여 출품하기까지는
"국내로 들어와서 서울에 있는 국립박물관과 미술관 그리고 골동품 시장을 찾아다니면서 도자기에 관한 각종 자료를 수집했다. 도예공부를 계속 하려고 수원에다가 거처를 정했다. 이 곳은 전철이 다니며 교통이 편리했고 수질이 좋았다. 마을 저수지가 있는 한적한 언덕에 요장을 열었다.

처음 도요를 시작해 보았지만 이론처럼 쉽지 않았다. 3년 동안 실패를 거듭하다가 분청사기를 만드는데 성공했다. 이 작품을 인간문화재 공예전에 77년부터 10여차례 이상 출품하여 모두 입상했다.

당시 정부에서는 전통공예 보호육성책으로 인간문화재를 지정하였는데 이들이 주축이 되어 인간문화재기능보존협회를 설립을 했다. 이사들이 거의 지방에 거주하였기에 협회운영상 어려움이 많다며 도자기분야 이사를 맡아달라는 초대 김봉룡 회장 요청을 받고 활동을 했다.

81년 상공부(중소기업진흥공단)가 주최한 전국민예품경진대회와 경기도에서 주최한 경기도민예품경진대회서 각각 장려상과 1등상을 수상했다. 이때 상공부에서는 각 수상자에게 시상으로 유럽 5개국 해외연수를 다녀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 해외여행을 다니면서 느낀 점은.
"세계 거장들의 현대미술품이 전부 한자리에 전시되어있는 프랑스 퐁피두센터 현대미술관과 독일 카셀 현대미술관을 둘러보니 재현 연구에 급급하거나 모조품 일색에 불과했던 국내 출품작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미켈란젤로 모자이크 건축양식을 보고 수원에다가 건축한 '예술의 집'(팜플렛사진)
미켈란젤로 모자이크 건축양식을 보고 수원에다가 건축한 '예술의 집'(팜플렛사진)
유럽에서는 칸딘스키와 몬드리안을 필두로 추상미술이 탄생되고, 미로와 달리는 초현실주의에서 표현주의로 탈바꿈을 했다. 특히 피카소, 미로 등 수많은 미술계 거장들은 도자기를 소재로 하여 각자 독특한 회화를 개척해 나갔다. 미국에서는 이미 50년여 전에 잭슨 폴록이 액션페인팅(퍼포먼스)을 선보일 정도로 미술계는 시대를 앞서 나갔다.

이탈리아 밀라노와 프랑스 샹젤리에서 세계적인 패션 거장들의 매장을 보면서 큰 자극을 받았고, 로마 바티칸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건축과 창조적인 대리석 모자이크 장식을 보면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한국에도 이런 예술문화를 창조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88년에 수원성 북부로터리 부근에다가 '예술의 집'을 지어 외벽과 실내 모두 도자기로 모자이크건축을 해서 각광을 받았다."

- 당시 국내 도예의 수준은 어떠했는지.
"창의적 개성시대와 디자인 경쟁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과거나 현재에 있어 그 누가 했던 것을 모방하는 것은 위법임을 깨달았다. 그간에 예술품을 보존한답시고 정부에서는 안일한 정책을 펼쳤지만 이는 전통공예 발전과 거리가 멀다.

일본에서는 다른 타인의 작품을 모방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품이 진품처럼 잘 만들었다고 해도 흉내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작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독일, 일본 등의 현대도예는 현대과학에 힘입어 그 차원이 달랐는데 우리의 전통공예는 답습 정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이 틀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번민과 방황이 시작됐다.

전통도예 칠색을 재현하여 전승공예전에서 전부 인정을 받았으니 이를 한 몸에 올려놓으면 칠채가 되고, 칠채가 성공하면 세계 최초의 도자기 역사를 이룩할 수 있는 독창적인 창업이 아니겠는가 싶어 칠채유기도자기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임재영 선생 30대에 만든 도자기 작품
임재영 선생 30대에 만든 도자기 작품 ⓒ 김성철
- 우리나라 전통그릇을 재현하기까지.
"대부분의 청자는 관요이다. 고려청자는 섬세하고 정교하며 귀족적이다. 조선시대로 넘어 오면서 관요가 점차 민요로 바뀌면서 분청사기와 백자가 탄생되었다.

그러나 궁중에서 사용되는 그릇은 달랐다. 궁중요리 전문가 황혜성 교수가 집을 방문했다. 해외에서 한국 궁중음식을 발표해달라고 초청을 했는데 여기에 어울리는 우리 전통그릇이 없다고 했다.

궁중음식 상차림은 그 성격에 따라 그릇의 종료가 너무나 다양했다. 그 종류를 보면 칠첩반상기, 제기, 다기, 다담상, 궁중음식기, 일반음식기 등이 각기 달랐고, 음식에 따라 그릇 모양과 디자인이 제각각 달랐는데 궁중그릇에 대한 자료나 실물이 없으니 어떻게 만들 수가 없어 많은 고민을 했다.

우선 인사동 골동품 거리를 비롯하여 전국의 고미술전시장, 박물관 등에서 공부를 하며 한국음식 전통그릇을 수집했는데 이때 더러 쓸만한 그릇을 구입했다. 황 교수님의 조언을 들어가며 노력한 결과 2년만에 한국음식 그릇을 완벽하게 재현하여 국내외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었다.

그간 우리나라 전통그릇을 재현하는데 어려움과 고충이 많았지만 한국 역사상 최초로 한국 음식그릇 상차림을 신라호텔에서 전시하게 되니 너무 기뻤다. 신문 방송에서 보도가 나가자 전국 각지에서 생활자기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 칠채유기도자기를 중도에 포기할 생각은 없었는지.
"5년 동안 칠채유기도자기를 만드는데 모든 열정을 다 쏟았지만 실패와 좌절의 연속이었다. 이 고통의 나날을 보내면서도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정진한 결과 삼채유기를 탄생시켰다.

한번은 예용해 한국일보 논설위원이 오채유기가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본 민예박물관야나기 관장과 동경정원미술관 관장을 모시고 왔다. 이들이 처음 오채유기를 보는 순간 당황하고 놀라는 표정을 짓더니 그 자리에서 탄성을 질렀다. 즉석에서 일본초청을 요구했지만 예용해 선생은 '한국에서 먼저 발표전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계기로 경복궁 전통공예관에서 오채유기 첫 전시회(91년)를 가졌다. 오채유기 조형형태는 일그러진 항아리 모양을 하였고 시유방법은 액션추상 표현방식을 썼다. 전시회는 성공리에 마쳤지만 내 개인적으로 심신이 매우 지쳐 있는 상태라서 신경이 쇠약해지더니 결국 기억상실증에 걸려 생과 사를 오갔다."

- 칠채유기도자기를 연구 개발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내 자신이 미쳐 버린 것이다. 보관창고에 있던 그림과 도자기를 꺼내 밤새도록 불태우고 깨 부셨다. 날이 새고야 끝이 났지만 이 사건 이후로 나는 미친 사람이 되었고 급기야 집에서 가출했고. 그 길로 강원도 동해안 홍련암으로 갔다.

그 간에 아무 종교가 없었던 나는 처음 불교 깨달음을 알게 하였다. 그리고는 설악산 봉정암과 오세암을 찾아 나섰고, 그 이후에도 전국에 있는 많은 사찰과 암자를 찾아다니며 10여 년간 수행과 고행의 나날을 보냈다.

이때 꿈을 꾸다가 대구 팔공산 성전암에 가라는 신의 음성이 들리는 듯했다. 찾아가 보니 수십 년째 '장좌불와'를 하시는 철웅 스님을 만났다. 처음 보는데 나를 보고 '부처다!'고 소리쳤다.

나의 전생에 대해 말하여 나 또한 스님의 전생을 말하였다. 이처럼 여러 큰스님들을 만날 때마다 연이 있었는지 '부처다!'라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어왔었기에 그리 놀랄 일은 아니었다. 이 곳은 성철스님께서 10년간 '장좌불와'를 수행했던 암자이기도 했다.

철웅스님은 다음날 아침에 친필로 쓴 '시심마대의지하대오(是甚○大毅之下大悟)' 글을 표구하여 기도방에 걸어 놓도록 당부하면서, '이제 만행불도수행을 거두고 집으로 돌아가 예술작업을 다시 시작하라'고 말했다. 이어 '신필을 얻었으니 앞으로 훌륭한 예술가로 명성이 세계로 퍼질 것이다'고 말해 주었다."

화려한 색상과 기가 들어있는 칠채유기도자기
화려한 색상과 기가 들어있는 칠채유기도자기 ⓒ 김성철
- 칠채유기도자기의 칠채색상 생성과정은.
"10년동안 여러 절을 다니며 참선을 마치고 나서 집에 와서 다시 칠채유기도자기 연구에 매진했다. 3년 실험 끝에 내 자신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무아지경에서 만든 작품이 칠채유기도자기로 태어났다. 이때 그 벅찬 감격은 지금도 잊지 못하겠다.

이때 사용한 칠채유약의 주원료인 흙과 나무재는 50가지 이상의 화합물질로 구성된 것이며, 1300℃의 고온으로 소성되어 모든 것이 기(氣)의 화합체를 이루고 있다. 칠채유약은 그 소성온도가 각기 달라 성공률이 너무 희박하고 어렵다. 시음에 있어서도 유약끼리 서로 엉켜 붙어 두꺼운 층을 생기다보면 건조시에 들고일어나 전부 떨어져 나가는 그런 어려움이 있다.

불의 성질에서도 청자는 환원불을 요구하고 백자는 환원중성이고 황유는 산화불이고 녹음은 중성산화이며 흑유는 환원이고 철유는 산화불이다. 녹음은 중성산화이며 흑유는 환원이고 철유는 산화불이다. 진사는 환원불이다. 이와 같은 독자적인 독학 체험에 의해 얻어지기 때문에 남들은 이 깊이를 전혀 알 수가 없다.

칠채유기도자기는 일곱색 유약으로 곡선을 이루고 있는 입체에 어느 한 점이라도 소홀하여 균형미를 잃어버리면 모든 것이 헛수고이다. 그래서 대부분 도공들은 이런 실패를 하지 않으려고 창의적인 것보다는 옛것을 모방하는데 급급하다.

칠채유기도자기가 탄생하기까지는 정말로 눈물겹다. 중간에 여러 차례 포기를 선언하면서도 며칠 지나고 나면 그간의 고생이 아까워 다시 일어나곤 하였다. 칠채라는 마약에 걸려 몸부림치며 허우적거릴 때마다 미련하게 무모한 짓을 저질러 놓은 것을 자책하면서, 어디다 보상받을 수도 없는 삶과 죽음의 경지에서 처절한 투쟁을 했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괴성을 지를 때는 미친놈이 되어야 했으며, 나를 잃고 정처 없이 방황할 때면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에디슨의 실험정신, 노벨의 인내심, 성현들의 수행기 등 각종 책을 읽으면서 이 모질고 힘든 시련을 극복해 나갔다. 25년의 연구와 공력 끝에 우리나라 천년 도예사에 가장 빛나는 칠채유기도자기가 아닐는지…."

임재영 선생 작품 칠채유기도자기(七彩釉氣陶磁器)
임재영 선생 작품 칠채유기도자기(七彩釉氣陶磁器) ⓒ 김성철

- 칠채유기도자기가 세계적으로 그 우수성을 인정받기까지는.
"칠채유기도자기 소식을 전해듣고 일본에 살고있는 교포가 동경에 있는 '도구리미술관' 관장을 데리고 왔다. 사연인즉 일본 교포에게 보낸 오채유기 전시팸플릿을 보고 너무나 감동해서 찾아 왔다는 것이다.

칠채유기도자기를 보고는 흥분하여 탄복하기를 '자기의 미술관에 지금까지 생존작가나 근세 현대 도예는 한번도 전시한 적이 없었는데 칠산 선생의 칠채유기도자기전을 에벤르 특별초청 전시를 하겠다'고 제의를 했지만 이때는 이미 독일 립스타트시립미술관에서 3개월간 초청 전시전을 갖기로 계약이 되어 있었다.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에게 칠채유기도자기를 선물한 내용이 실린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린 기사(99.4.22일자)
영국 엘리자베스여왕에게 칠채유기도자기를 선물한 내용이 실린 중앙일보 사회면에 실린 기사(99.4.22일자)
99년 독일 립스타트시립미술관 초청 전시회가 3개월이 끝나갈 무렵에 독일 함부르크 예술박물관에서 생존 작가로는 최초로 '칠채유호' 삼채유병' 두 점을 구입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이 지역 신문에 크게 보도가 되었다. 이 두 작품은 나중에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전달됐고 나머지 작품들도 유럽 여러 미술관에서 좋은 호응과 찬사를 보냈다고 했다.

어느날 갑자기 팔공산 성전암의 철웅스님이 '수원의 칠산 요장에 오는 중이다'면서 전화가 왔다. 방문하여 칠채유기도자기 한 점을 증정했더니 '바로 이 것이었구나! 이제 됐다 시간이 없으니 간다'며 작별했다.

다음날 영국 대사관에서 "훌륭한 작품에 감사하다"며 전화가 왔다. 이 작품이 바로 '칠채유뮤아호'였는데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김대중 전 대통령 초청으로 방한했는데 이때 전달된 것이다. 그리고 다음날 중앙일보 사회면(1999년 4월 20일자)에 '칠채유뮤아호' 기사가 크게 보도가 되었다.

그 이후에 노르웨이 분데빅 수상, 일본 고이즈미 수상, 아키히토 국왕, 미국 부시 대통령 등 세계적인 지도자들에게 칠채유기도자기를 증정하여 소장하고 있다. 그후 각국 대통령 및 수상들의 친서가 오기를 '머지않아 한국의 칠채유기도자기가 세계박물관마다 전시될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미국에서 전시하는데 칠채유기도자기 작품 한 점을 20억원에 사겠다고 했지만 거절했다. 피카소 도자기도 경매에서 80억원에 거래되고 있는데 예술의 혼이 담긴 내 작품이 그 정도 선에서 거래가 안 된다면 민간외교 차원에서 부시 대통령에게 기증했더니 나중에 친서가 왔다."

일본 아키히토 국왕이 칠채유기도자기를 선물받고 감사의 뜻을 보낸 친서
일본 아키히토 국왕이 칠채유기도자기를 선물받고 감사의 뜻을 보낸 친서
- 운대리 도요지를 남달리 사랑하는 이유라도.
"4년 전(2001년 9월) 인적이 드문 조용한 곳에서 은둔생활을 하고 싶어, 호남의 땅 끝인 고흥 운대리 도요지가 있는 인근 폐교에다가 요장을 열었다.

고흥까지 오게된 사연은 경제적으로도 말못할 고충이 많았다. IMF시절 은행에 이자 2개월 연체를 했다해서 수원에 있는 '예술인의 집' 등 재산 전부가 경매로 넘어갔다. 이때는 미국을 오가며 작품활동에 전념하고 있을 때라 이렇게까지 될 줄은 몰랐다.

당시 현시가로 300억원대 이르는 재산을 하루 아침에 부도를 내고 겨우 이사비용만 챙겨 고흥까지 내려와 이 곳에 정착했다. 그 때는 붓이 손에 쥐여지지 않아 갈피를 잡지 못했지만 지금은 모든 걸 잊어버리고 작품활동에만 전념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에서 문화활동을 하는 장효문 민예총 고흥지부장, 송학종 운대도요지 보존회장 등의 헌신적인 도움이 크다. 나중에 여기에다가 도예촌을 만들어 모두 기증할 생각이다."

임재영 선생 약력 및 전시회

1948년 충남 사천군 마서면 봉남리 출생
1884년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교육과 졸업
1983년 제70회 IPU 서울총회 기념 미술초대전
1984년 흥사단 초대전
1988년 서울 올림픽 기념 초대 작가전
1989년 대구시 초대전
1990년 부산시 초대전
1991년 경복궁 전통공에관 초대전
1997년 일본 요코하마시 초대전
1999년 독일 립슈타튜시 초대전
2000년 세계도자기엑스포 출품
2001년 미국 LA아트H아전

<작품 소장처>

1982년 동국대학교 박물관
1990년 동경 도구리 박물관
1990년 동경 민예 박물관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소장
1999년 해남 대둔사 성보 박물관
2002년 노르웨이 분대빅 수상 소장
2002년 미국 부시 대통령 소장
2002년 일본 고이즈미 수상 소장
2002년 일본 아키히토 국왕 소장
- 우리 삶의 방향과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산업사회가 되면서 각종 넘쳐나는 쓰레기와 대기오염으로 인해 지구촌이 죽어가고 있다. 일회용주의가 생겨나면서 자원낭비와 자연파괴로 이어진다. 과거 우리 조상들의 방식대로 영구히 대를 물려 사용할 수 있는 그런 생활용품이 필요하다.

오늘날 박물관 등에서 국보나 보물로 대접받는 것이 옛날에는 일상생활에서 사용했던 용기이며 도구였다. 그러므로 가급적 정성과 정이 담겨있는 무공해 수공예품을 애용해야 한다. 이런 제품들은 세월이 흘러도 싫증나지 않고 손때가 묻을수록 정감이 간다.

이러한 삶 속에 작품활동이 이뤄져야 한다. 여기서 마지막까지 예술을 꽃피워 순수예술의 경지에서 평가를 받고 싶다. 시대보다 앞서가는 새로운 예술품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외롭고 고통의 나날이 클수록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 같다.

외국에서 국빈들이 저와 전시된 작품들을 보려고 여기까지 찾아오지만 잠자리와 샤워시설이 부족하여 오는 사람마다 큰 불편을 겪고 있다. 지난번 노르웨이, 캐나다, 핀란드 대사 등이 방문했어도 큰 불편을 겪었다. 오는 6월 중순경에 덴마크 대사 일행이 방문해서 하룻밤 묵고 간다는데 준비가 안돼서 걱정이다.

현재 살고 있는 폐교가 교육청 소관이라서 증축 개축도 불가능하다. 폐교부지 일부가 도로계획에 의해 금년내에 공사가 착공되면 폐교관사 일부 철거되어 작품 전시장도 다른 곳으로 옮겨 이사를 가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마지막으로 운대리 도요지는 옛 도공들의 숨결과 혼이 깃 든 곳으로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가 생을 마감했던 도공들의 원혼을 달래는 위령제를 지내야 하고, 하루빨리 이 곳이 국가 사적지와 유네스코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한다."

임재영 선생 30대에 만든 도자기 작품을 전시
임재영 선생 30대에 만든 도자기 작품을 전시 ⓒ 김성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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