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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6월 9일자 A22면에 실린 박찬욱 감독 인터뷰.
조선일보 6월 9일자 A22면에 실린 박찬욱 감독 인터뷰.

박찬욱 감독님 안녕하십니까? 명계남입니다.

영화 <올드보이>의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까다롭기로 이름난 칸에서 날아온 수상 소식은 한국 영화의 쾌거였습니다. 몇 년 전부터 세계 영화계에서 한국 영화가 거두는 일련의 성취는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가슴 뿌듯하고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 영화가, 우리 문화콘텐츠가 세계인들의 눈높이에도 손색이 없을 만큼 성큼 성장하고 인정받았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고, 그리고 어쨌든 ‘상’받는 것은 기분 좋은 일입니다.

각종 매체에서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바쁜 박 감독을 만납니다. ‘좋아서’ B급 영화를 만든다는 비주류 감독에서 <공동경비구역JSA> <복수는 나의 것>를 거쳐 <올드보이>에 이르러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대표 주류 감독이 된 박 감독을 만나는 일은 묘한 희열이었습니다.

영화에 대한 열정, 그 열정 못지 않은 해박한 지식, 사회적 약자에 대한 관심과 애정에서 ‘민주노동당’ 지지자임을 밝히는 소신, 그리고 ‘예술가는 오만하고 당당해야 한다’는 자의식까지….

앞으로 한국 영화의 더욱 큰 발전을 위해서, 이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7000원으로 만끽하는 두 시간 남짓의 즐거움을 위해서라도 나는 관객으로서 당신의 그 ‘오만’과 ‘당당함’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박 감독 <조선일보>에게도 ‘오만’하고 ‘당당’할 수 없나요?

'영화만 계속 만들 수 있다면 행복한 감독 아닐까요?'라는 제목의 <조선일보> 인터뷰 기사에 대해 묻고 싶습니다. 정말로 영화만 계속 만들면 행복한가요? 그게 다인가요?

인터뷰 첫머리에서 당신은 “미군 장갑차에 사망한 여중생들 2주기 추모집회에는 꼭 가고 싶었는데 단편 옴니버스 영화 <쓰리, 몬스터>의 후반 작업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아쉬워 하고 있었습니다.

당신을 그토록 안타깝게 만들었던 두 어린 소녀의 죽음이 있던 2년 전 6월 13일, 그 다음날 아침 <조선일보>에서는 관련 기사를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 없었습니다. 월드컵 열기로 흥분해 있던 모든 언론들이 겨우 단신으로만 이들의 죽음을 보도한 것이 사실입니다. 기막힐 노릇이었죠. 물론 <조선일보>는 이 마저도 하지 않았습니다.

꼬박 1주일이 지난 후 이 사건과 관련한 <조선일보>의 첫 보도가 나왔습니다. '주한미군 여중생 추모행사 열어'가 제목이었습니다. 모르셨죠? 저도 그랬습니다. 나중에, 1년이 지난 지난해 민언련이 주최한 ‘미선·효순 1 주기 추모 미군 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관련 조선일보 모니터 발표’를 통해서야 <조선일보>의 추악한 작태를 알게 되었습니다.

박 감독, 다시 묻습니다. 정말로 영화만 계속 만들 수 있다면 행복한가요? 어린 두 소녀가 남의 나라 군인이 모는 장갑차에 치여 다른 곳도 아닌, 매일 오가던 제 사는 마을길을 걷다 어이없이 처참하게 죽어갔는데도, 이를 겨우 1단 기사 취급하는 언론이 있는데, 영화만 찍으면 행복한가요?

가족들의 억울한 호소도,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민들의 항의도 외면해 놓고 미군이 연 추모 행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실어주는 언론이 바로 <조선일보>입니다. 바로 그 <조선일보>와 인터뷰하며 "영화만 계속 만들 수 있다면 행복한 감독"이라고 말하는 당신.

혼란스럽습니다. 미선이 효순이보다, 두 딸을 앞세우고 가슴에 대못 박힌 부모보다, 가해자 미군을 감싸는데 정신 팔렸던 바로 그 신문과 인터뷰를 하며, “영화인은 휴머니스트”여서 “사회적 약자 편”에 끌린다고 자랑스럽게 밝힌 당신은 미선이 효순이에 대한 추모를 숨기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이 당신의 영화보다 더 “기괴한” 장면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해가 안 갑니다. 말꼬리를 잡는다고 하시겠습니까? 내가 속 좁고 못나서, 상상력이 모자라서 인가요? 바로 그 인터뷰에서 박 감독은 “민주노동당은 제 세계관에 맞기 때문에 선택했습니다. 전 무엇보다 빈부격차가 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일이나 자주성은 그 다음이죠”라고 말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이 박 감독의 세계관에 맞는다고 떳떳하게 ‘밝히는 당신’을 나는 지지합니다. 당신의 정치적 선택을 존중하고, 그것이 가능하도록 우리가 성취한 민주주의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조선일보>는 아닙니다. 박 감독의 정치성향과 수구 <조선일보>가 맞지 않는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관, 가치관, 정치지향이 같은 신문만을 상대하라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조선일보>는 그런 것을 따질 가치조차 없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빈부격차를 줄이기는커녕 재벌개혁을 방해해, 가진 자들을 더욱 살찌우는데 혈안이 된 신문이 <조선일보>입니다. 현대자동차에서 연봉 4천만원을 받으려면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해야(연간 3200시간, 400일 이상) 하는데도 14년차 노동자 연평균임금이 5400만원이라고 거짓말 하는 신문입니다.

3년 전 나는 다른 영화예술인들과 함께 <조선일보> 기고 인터뷰 거부 선언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노무현이라는 바보 같은 정치인을 사랑하게 되면서 세상일에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시작이었지만 무엇보다 선언까지 하게 된 것은 제1차 안티조선 지식인 선언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는 그들의 정체를 위장하기 위해 진보적인 지식인들을 활용한다. 마치 다양성을 존중하는 민주언론인 양 국민들을 호도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정치적으로 민감하지 않은 분야에서 두드러지는데 여기에 현혹된 독자들은 조선일보의 위장술에 넘어가 극우 이데올로기에 동화되기 쉽다. 개혁적인 또는 진보적인 지식인들이 더 이상 이와 같은 '조선일보의 상술'에 기여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필요하다는 취지에서 우리는 이 자리를 마련했다. -2000년 8월 7일 조선일보 기고 인터뷰 거부 지식인 선언문 중에서

박 감독, 가슴 서늘해지는 일이지만, <조선일보>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미선이 효순이의 죽음을 외면한 것에 그치지 않고, 어린 두 영혼을 추모하며, 당당한 나라의 국민이 되고자 한 겨울 추운 길바닥에 촛불 들고 나온 사람들 때문에 한미동맹이 금 간다고 호들갑을 떠는 <조선일보>와 당신을 재능있는 영화인으로 깍듯이 대접하는 <조선일보>의 두 얼굴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동진이라는 빼어난 영화 전문 기자의 펜 끝에서 당신의 영화적 재능과 당신이 민주노동당원이라는 사실이 수구들의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연봉 2800만 원 받는 평범한 노동자를 노동귀족으로 둔갑시키는 <조선일보>의 실체를 감추기 위한 소재가 되고, 상품이 되어 팔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닙니다. 제 아무리 이동진 기자가 당신의 재능을 알아주고, <조선일보>가 당신의 영화를 잘 홍보해 준다고 해도, 박 감독 당신과는 정반대로 사회적 약자들을 짓밟고 휴머니즘을 능멸해온 <조선일보>의 본색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나는 보고 싶습니다. 영향력 1등이라고 하더라도, 영화 기사로는 다른 신문이 따라 올 수 없다고 해도, 친일과 친독재와 거짓으로 쌓아온 <조선일보>의 허명 앞에서 ‘오만하고 당당하게’ 인터뷰를 거부하는 당신을 보고 싶습니다. 당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세계 최고 권위의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당신입니다.

내 글이 과격하고 편향적이라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나치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믿습니다. 이 땅에서 어느 정치 집단의 집권이나 정치개혁 못지않게 언론개혁이 중요하다는 것을. 그 중에서 사악한 사익추구 집단 조선일보의 영향력을 줄이고 언론의 자리로 바로 세우는 것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다시 한 번 부탁합니다. <조선일보>에 허투루 이용당하지 마십시오. <조선일보>는 신문이 아닙니다.

당신의 복수극 완결편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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